우리시대의 ‘詩書畫 三絶’ 금봉 박행보 화백
시화집 ‘강산을 훔쳐보고 시를 건지다’ 발간
10여 년 동안의 자작 시서화 160여편 게재
| 2025. 03.28(금) 15: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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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안평대군, ‘예원의 총수’로 불리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삼절로 불렸으며 일찍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제자인 소치(小痴) 허유(許維)를 가리켜 시사화의 삼절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 이후 진정한 우리의 그림으로 문인화가 주목을 받으면서 많은 화가들이 문인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림이나 서예, 한시 등 어느 한 부문에만 머물러 그 경지를 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놓고 옛 선비들의 시를 화제(畫題)로 차용하여 썼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삼절은 없는 것인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어 일필휘지(?)하는 진정한 예술인.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는 선비적 체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멋진 예술인. 최근 구순의 노화백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선생이 1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리고 한시를 지어 화찬(畫讚)한 작품들을 모아 ‘강산을 훔쳐보고 시를 건지다’라는 시화집을 출간했다. 우리 시대 진정한 ‘시서화 삼절’의 면모를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후학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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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선생이 광주 금봉미술관에서 열렸던 미수전(米壽展)과 제주와 전북 등지의 초대전을 통해 선보였던 작품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오랜 지우인 문순태 소설가는 “은유나 적절한 시어 선택을 비롯해서 작품의 완성도 문제는 차지하고 일단은 시적 영감과 문인화의 회화적 세계가 상통하여 높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고 말한다.
추모자친(追慕慈親)
경수심전면제천(鏡水心田面霽天)
인자모정양단신(仁慈母情養端身)
농경답월귀배한(農耕踏月歸背汗)
매도주방루취연(每度廚房淚炊烟)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마음은 경수요 얼굴은 비 개인 맑은 하늘/
사랑하며 몸을 단정히 길러주신 어머니/
농삿일에 땀흘리며 달빛 밟고 돌아오시고/
밥짓는 연기에 번번이 흐르는 눈물/
노화백은 백모련 송이를 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한 것일까? ‘추모자친’이라는 시에서 ‘사랑하며 몸을 단정히 길러주신 어머니’를 추억하고 상념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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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페이지를 넘기면 남종문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소치선생을 그리워하며 쓴 시, 홀로히 산에 오르거나 강나루 배에 올라 달맞이하는 감회 등 도시의 현대인들은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자연인의 여유와 풍미가 가득하다. 더라는 계림동 화실의 창문을 열어두고 먼저 떠난 아내가 심어두었던 꽃송이를 보면서 ‘화실소감’이라는 시도 한 수 읊어 놓았다.
이번 시화집에 실린 160여 편의 시는 7언율시, 5언율시, 4언절구 등 한문으로 지은 작품과 한글로 쓴 시 등이 포함돼 있다. 한글로 시를 쓸 수 있는 화가들은 많지만 한문으로 율격을 맞춰 시를 쓴다는 것은 어지간한 공부와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려서부터 고향 진도에서 명심보감을 읽었고 의재선생 문하에 들어간 후에도 꾸준히 한학을 익혔다. 이때 당나라 두보와 이백의 시를 탐독하기도 했던 것이 오늘날 시화집을 펴낼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沒入圖之一始終(몰입도지일시종)/焉迎米壽似春夢(언영미수사춘몽)/狂如不及揮毫作(광여불급휘호작)/白眼空然惜碧空(백안공연석병공)'(시 '迎米壽')
'그림에 몰두하여 시종 한 곬으로/어찌 미수를 맞이하니 봄꿈인듯/미친 듯 붓 휘둘러 걸작에 미치지 못하니/공연히 푸른하늘 흘겨보며 아쉬워한다'(시 '미수를 맞으며')
88세 미수를 맞으며 쓴 시다, 7언 절구로 이뤄진 이 시는 미수를 맞을 때까지 평생 그림에만 몰두해왔으나 걸작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담은 내용이다.
금봉 박생보 선생은 진도 출신의 화가다. 사군자로 국전에 추천되었으며 문인화로 수련하여 수묵화와 접목하였고 한국의 풍정을 담기위해 담채화로 전위시켰다. 그는 전통을 숭상하되 현대를 접목시키고 여기에 수채화의 멋까지 곁들여 동서양의 융합을 시도한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금봉은 청장년기에 한학자 만취(晩翠) 위계도(魏啓道)선생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의재 허백련으로부터 그림을, 그리고 같은 고향 서예가 소전 손재형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때문에 금봉의 그림에서는 시서화가 어우러져 있다고 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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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이 내종형인 의재 허백련 문하에 든 것은 그의 나이 25세다. 늦었던 만큼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3년여의 각고 끝에 1963년 제12회 국전에서 산수화 ‘선산누관(仙山樓觀)’이란 작품으로 첫입선한 이래 사군자 부분 문공부장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면서 추천작가 지정을 받았고 국전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전형적인 국전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군자로 빛을 보았지만 동양화 부문으로 수 차례 입선하였으며 수묵담채화로 발전시킨 산수는 동서양의 융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군자로 익힌 필법은 산수에서 꽃을 피워 산수 작가로서 오히려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금봉의 그림은 크게 서너 차례의 변화를 거쳤다.
첫 번째는 1960년대의 문인화 시대이고, 둘째는 1980년대 후반까지의 수묵화시대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화선지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화사한 담채색을 구사한 시기다. 그리고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실경산수에 깊이 빠져든 느낌이다. 특히 산수작품은 먹색의 농담변환으로 자연의 생명감을 현출시켰다는 평이다.
속도감 있는 사군자와 자연을 함축한 산수, 여기에 기러기처럼 날아 앉은 畵題가 조화를 이뤄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금봉의 그림에는 문기가 넘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금봉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힘 있고 대담한 화면 구성과 시속에 그림을 불러 들어 함축적 회화미를 꼽을 수 있다. 또 하나는 관념적 회화가 아니라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한다는 것과 설명적 요소들을 제거해버린 과감한 생략으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금봉 회화의 대담함은 묵죽에서 절정에 달하며 속도감 있는 그의 풍죽(風竹)은 대나무를 최고미(最高美)로까지 표현된다. 나뭇잎과 대나무의 흔들림에도 귀 기울이며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소리와 느낌을 찾아 단번에 그어 댄다. 이런 그의 그림은 선의 겹침이 없는 일회적 필선으로 담백함과 강직함을 살려낸다. 용필에 있어서 거침이 없고 필력은 화의에 따라 흐트러짐이 전혀 없다
이러한 기법은 산수화에서도 이어져 부벽준(부벽준)을 응용한 깎아낸 듯한 암벽처리는 금봉의 또 다른 회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군자는 협골법(夾骨法) 몰골법(沒骨法)으로 특징을 보여주고, 산수는 협엽법(夾葉法)으로 윤곽을 나타면서 절묘한 미점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묵을 기조로 하면서 섬세한 터치와 박진감이 넘치는 필선과 필세로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선의 부드러움과 발묵의 빼어난 기법으로 현대를 재조명하고 그림 속에 시를 불러들이고 있는데 그는 스스로 “글이란 그림으로 구제하는 것(書者所以濟畵之不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식 없는 눌변과 진중함 몸가짐으로서 ‘시골 사람의 향취’가 짙게 풍기는 금봉 그는 전남대 강사를 거쳐 호남대학에 서 전임으로 후학을 가르치다 다시 전업작가로 돌아와 왔다. 일찌기 남화(南畵)라는 화사(畵史)나 화통(畵統)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화회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화선지에 마티에를 기법을 도입한 것이나 석탑의 릴리프 기법, 그리고 기하학적인 화면구성 등이 개별성을 확보하기 위하 노력들이다. 화제도 ‘바다가 보이는 풍경’ 등으로 쉽게 표현한 것도 시대성을 반영하기 위한 배려다.
금봉 박행보 선생은 이번에 간행된 책머리에 쓴 ‘삶의 뒤안길에서’라는 글을 통해 “예술창작에 대한 집념을 불사르며 독자적인 화풍을 꿈꾸어 왔으나 한 발자국 떼기도 힘들어 허둥대며 구순에 이르게 되었다. 전작들을 한 점, 한 점 눈여겨보니 아쉬움이 남는다”고 겸손해하면서 “ 그림에만 전념하다 보니 소홀히 했던 한시를 만시지탄하며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뜨거운 정열이 붙타오른다.”면서 구순의 창작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