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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8일(화요일)

8.구례 오미리 마을/

나눔과 배려의 뒤주 ‘他人能解’의 운조루 마을
‘남한의 3대 명당’ 문화 류씨가 터를 잡은 ‘행복 마을’
2016. 06.30(목) 22:55확대축소
운조루 전경
구례 운조루(雲鳥樓)는 말 그대로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다. 240년 역사의 고택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가진 자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나눔과 배려의 공간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대표적인 흔적이 굴뚝과 뒤주이다. 가난한 이웃이 밥 짓는 연기를 보면서 배고파할 것을 생각해 굴뚝을 툇마루 아래 만들었다. 가난한 이웃이 주변 눈치 보지 않고 한줌의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 새겨진 뒤주를 둔 것이다.
배고픈 이들은 ‘뒤주’를 통해 배고픔을 달래면서 가진 자의 속 깊은 배려를 몸소 느꼈다. 조선후기 관리들의 수탈과 부패가 심해져 민란이 잦았지만 백성들은 스스로 운조루를 지켜 은혜에 보답했다.

오미리 마을은 구례에서 하동으로 연결되는 19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광주에서 가려면 88고속도로로 가다가 전주-순천간 고속도로에서 화엄사 인터체인지로 빠져서 19번 국도로 가면 된다. 구 도로로 가면 구례읍을 지나 하동쪽으로 가다가 왼편으로 접어든다.

오미 마을은 삼수부사(三水府使)를 지낸 류이주(柳爾胄,1726~1797)가 풍수지리설의 금환낙지를 찾아 이주해가 99칸의 대가를 지으면서 이뤄졌다는 설과 1924년경 상원갑(上元甲)에 환동과 추동(오릿골과 샛뜸)에 금환낙지의 터를 잡아 서산 유씨, 성산 이씨 등이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류이주의 행장에 따르면 전자(前者)가 맞다. 그가 삼수에서 돌아와 형 류이혜 가족과 이곳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는 것. 사람들이 길지(吉地)로 여기면서도 바위가 험하여 감히 집을 짓지 못했으나 류이주는 자신을 위하여 하늘이 남겨준 땅이라고 생각해 집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1771년 낙안군수로 재직 중이어서 직접 집을 짓지는 못했고 아들 덕호(德浩, 1757~1815)가 아버지가 만든 설계도를 받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이주는 1773년 삼수에 유배돼 있었고(74년 풀림) 1776년 함흥 가선대부 오위장, 1777년 상주영장을 지냈다. 이후 용천부사, 경상중군, 삼수부사, 영천부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운조루가 1771년에 짓기 시작해 1777년 완성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류이주가 설계도와 규모를 창안한 첫 주인임은 분명하다.

운조루의 규모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100칸이었다는 설, 99칸 이었다는 설, 그리고 78칸 설 등이 그것이다. 100칸 설은 집의 규모가 매우 컸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99칸 설은 왕실이 아닌 일반인들은 100칸을 짓지 못하도록 했다는 데 근거한다. 그렇다면 78칸 설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류이주가 68세 때인 1793년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문서인 분재기(長子區處記)의 기록은 이렇다. 사당 2칸, 체서 9칸, 동이랑 3칸, 층루 4칸, 서이랑 3칸, 층루 3칸, 전행랑 6칸, 동행랑 12칸, 서행랑 12칸, 중외사 3칸, 외사 8칸, 하외사 1칸, 대문 1칸, 서협문 3칸, 동점사 3칸, 내외측 2칸 등으로 총 78칸이 전해지고 있었다. 여기에 운조루와 함께 지어진 인척들의 집까지 포함하면 100여 칸 규모가 되었던 모양이다.

이 중 일부는 화재가 발생해 훼철되었고 복원, 중건, 보수를 거쳐 현재에 남은 것은 60여 칸이다. 기와와 서까래 일부는 보수했으나 기둥은 그대로 남아 있다. 운조루에 사용된 모든 목재는 지금의 바로 집터에서 베어낸 나무들이라고 한다. 그가 경상도에서 왔기 때문에 한옥의 형태도 전라도 식이 아닌 경상도 건축양식에 따랐다.

오미(五美)마을의 오동은 내죽(內竹), 하죽(下竹), 백동(白洞), 추동(樞洞), 환동(還洞)을 가리킨다. 오미의 다섯 아름다움은 월명산(月明山), 지리산 자락인 방장산(方丈山), 오봉산(五峰山), 계족산, 섬진강(蟾津江)이 있다 하여 오미라 불렀다고도 한다.
류이주의 현손(손자의 손자) 제양이 63세 무렵에 지은 ‘오미동개사’에는 오봉산의 기묘함, 그리고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들이 5성(星)을 이루고, 물과 샘이 족하고, 풍토가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가기에 좋다고 씌어 있다. (이해준 교수)

' 운조루는 ‘-’자형 행랑채, 사랑채와 안채가 연이어 ‘ㅁ’자 형을 이루고 뒤에 사당이 있다. 기둥과 기둥사이에 얹은 서까래와 서까리를 놓은 나무인 도리, 도리를 받치는 나무인 장여로만 된 민도리집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이어져 팔작지붕이다. 건축적으로 특이한 것은 덤벙주추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덤벙주추란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놓은 뒤 돌의 요철(凹凸)을 나무에 새겨 맞춘 것이다. 때문에 주춧돌의 모양이 모두 다르다. 양쪽으로 24칸씩의 행랑채 가운데 위치한 솟을대문에는 건축당시부터 매달아 놓았다는 흰 뼈 2개가 걸려 있다. 밖에서 보아 오른쪽이 호랑이뼈고 왼쪽이 말뼈이다. 운조루 초대주인 류이주가 문경새재를 넘을 때 갑자가 호랑이가 나타나자 맨몸으로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임금께 올리고 그 뼈는 가져와 집안에 액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걸어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뼈도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점점 왜소해지고 있다.
뒤주


운조루라는 현판은 처음부터 걸린 것은 아니다. 3대 주인이었던 류억(柳億,1796~1852) 이 당대의 명필이었던 고동 이익회(古東 李翊會,1767~1848)로부터 받아 목판에 새겨 걸었다. 운조루는 원래 사랑채의 당호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 현판은 운조루 전시관으로 옮겨져 전시중이고 고택에는 새로 각해서 걸려 있다. ‘타인능해’라 새겨진 뒤주만 그 자리에 있고 대부분의 유물을 전시관으로 옮겨 놓았다.

금환락지의 명당터

오미마을 운조루터가 명당이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비기(秘記)에 보면 이 지역에 3개의 명당이 있는데 상대가 금구몰니(金龜沒泥), 중대가 금환낙지(金環樂地), 하대가 오보교취(五寶交聚)라고 한다.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도움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고 이 중에서도 하대 즉, 오보교취가 최고의 길지라고 되어 있다. 또 묘 터 보다 집터를 중요시했던 일본의 풍수연구가는 운조루 터를 ‘동양의 길지’라 일컬은 바 있다.
금구몰니란 금거북이가 묻혀 있다는 명당이다. 거북이는 천구(天龜)라는 영물로 천지의 기운을 흡수하여 만물을 낳는다고 전한다. 그런데 명당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시 부엌에서 어린이 머리만한 크기의 돌거북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금환낙지는 금가락지 형상을 일컫는다. 풍수자들은 한반도를 미인으로 보았고 구례는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리, 그리고 운조루 터는 금가락지를 놓은 자리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오미리는 예전이 금환동(金環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오보교취라는 많은 보물이 있는 곳이라는 뜻. 오보(五寶) 즉 다섯 가지 보물은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5개의 보석을 일컫는 말이다.
1931년에 간행된 ‘조선의 풍수’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31집)에는 “1910년대 초부터 전국 각지로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충청 경상 전라지역 양반들이 100여 호가 옮겨왔다.”고 씌어 있다. 또 인근에 있는 마산면 사도리(沙圖)가 바로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의 묘법을 터득했다는 곳이다. 도선이 마을 앞 강변에서 우연히 어떤 사람(異人)을 만나 세상사를 두고 담론을 나눴는데, 그 사람이 모래 위에 삼국도(三國圖)를 그려 삼국통일을 암시하자, 도선이 이를 깨닫고,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에 기여하게 된다. 모래위에 그림을 그렸다 하여 그 때부터 사둘(沙圖)이라 칭하였다. 이후 웃사돌, 아랫사돌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사도리가 되었다.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광양의 옥룡사도 도선국사가 창건했는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절터의 큰 연못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면서 사람을 괴롭히자 도선이 퇴거를 명했다. 그런데 여덟 마리는 따랐으나 백룡이 대항하자 도선이 지팡이로 용의 왼쪽 눈을 멀게 하고 물을 끓게 하여 쫓은 뒤 절터를 닦았다. 이후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나돌았는데 눈병 있는 사람들이 숯 한 섬씩을 가져다가 연못에 부으면 감쪽같이 눈병이 나았다는 것.

그러나 류이주가 이곳에 운조루를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형 부지암 이혜(爾惠)와 함께 살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다. 류이혜는 호남사림의 한 봉우리였던 손재 박광일(우암 송시열의 문인)과 오미동 팔송정에서 자주 교류했다고 한다. 학문이 깊었던 형을 위해 만년에 운조루에 하나의 방을 만들고 난간을 설치하고 연못가에 나무를 심어 형을 받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문화류씨 31대손 경북 출신 류이주가 터잡아

구례에 터를 잡은 류이주는 문화류씨 31대손으로 경북 해안면 입석동 출신이다. 류이주는 1753년(영조 29년) 무과에 합격해 낙안군수, 삼수부사 등을 거쳐 훗날 정일품에 봉해졌다. 만년에 구례로 돌아와 몸을 낮추고 살았던 삶이 오늘날 많은 귀감을 주고 있다.
이후 덕호(32대)- 억(33대)- 견룡(34대) -제양(濟陽, 35대)- 영환(36대)- 형업(37대)- 증교(38대)를 거쳐 39대 종숙, 종철 종렬, 종옥으로 이어졌으며 40대는 홍수·종수, 41대는 내환·내욱이 뒤를 잇고 있다.

운조루의 주인인 류이주가 영조 52년 삼수부사를 지낸 것과 아들 덕호가 무과에 합격해 정조 때 수원성 건립 책임을 맡았다는 것 말고는 후손들이 큰 벼슬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시끄러운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 나가기보다는 조용히 책을 읽고 농사를 지으며 그야말로 인간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덕호는 류이주의 사촌형 이익(爾翼)의 둘째 아들이나 양자로 입적하였고 류 억(1796~1852)은 덕호의 큰형 광호의 아들로 1825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마절제사, 평안도병마절제사, 토포사 등을 역임한 뒤 만년에 향리로 돌아와 수많은 장서를 벗하였고 문집 ‘원석집’을 남겼다. 운조루에 보관되어 있다가 전시관에 기증된 서첩 중 대부분은 류 억이 수집한 것이다. 운조루에 있는 족한정(足閒亭)은 그가 만년에 글을 읽던 곳이다.
굴뚝


류재양(1846~1922)은 한말과 일제치하에서 구례 지역에서 있었던 민란이나 동학혁명과 같은 혼란기에 운조루의 유물을 잘 간직한 사람들이다. 특히 류재양은 자를 낙중, 호를 이산이라고 하였는데 일찍부터 효경, 사기, 사서 등을 읽어 시로써 이름이 났다, 당시 구례에는 왕석보 왕사각 왕사천 왕사찬 4부자와 매천 황현, 오계 오정석, 해학 이 흔 등 뛰어난 문인들이 있었는데 이들과 교류하며 ‘호남아집’이란 시회를 결성하였고 ‘이산시고(二山詩稿)’를 남겼다, 특히 30년 친구였던 황 현은 ‘회인시(懷人詩)’에서 벗에 대한 깊은 정을 이렇게 읊었다.

문내창백학(門內雙白鶴) / 문외양행유(門外兩行柳) /
문안에는 한쌍의 백학이 있고, 문 밖에는 두 길의 버드나무가 있네..
류형업(1886-1994)은 일제시대 장년기와 노년기를 지낸 인물로 할아버지 재양의 가르침을 받아 13살 때부터 40년간 일기를 썼다. 재양의 ‘시언(是言)’이 한말의 사정을 잘 알려주고 있다면 이 ‘기어(紀語)’는 서구열강과 일본의 참략 앞에 무기력했던 식민지 시대의 지방 실태를 기술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문화 류씨에 관해 알아보자. 문화 류씨의 시조는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이다 그의 후손들이 고려 개국 이후 개성에서 세거해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류차달이 수레 1,000량을 만들어 군량을 조달하였고, 그 공으로 대승(大丞)에 올라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해졌다.

그 시조인 대승공의 묘소와 그 아래 재실인 경사루(敬思樓)가 구월산에 있었으나 재실은 6.25때 소실되고 묘소도 퇴락하였다. 재일교포로 대종회 명예회장인 류기환(柳箕桓)이 지난 2013년에 직접 북한에 들어가 성역화사업을 완료한 것으로 알려진다.
문화 류씨는 삼산이주(三山二州)로 본이 갈라지는데 삼산은 풍산, 서산, 선산이고 이주는 전주, 진주를 일컫는다. 이곳 구례 오미리 류씨는 삼산이주와 관계가 없이 곤산공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영암 모산리 류씨는 하정공파에 속한다.
이곳 오미동에는 1970년대는 류씨 집안이 57세대가 살았으나 지금은 여섯 집만 남았다. 나머지는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전국에서 들어와 산다. 지금도 빈집이 없을 정도로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많다. 집터가 부족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산등성이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데 전통 한옥마을과는 조화가 이뤄지지 않아 씁쓰레함이 느껴진다.

제37대손으로 교직에 몸담았던 종옥(74)씨는 “1970년대까지 집 근처에 하인들의 집이 네 채나 있었는데 부친(증교)이 집과 논을 주어 멀리 이사를 가서 살도록 했다.”면서 선조들이 부를 축적하기 보다는 나눔을 생각했던 것은 후손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고 밝혔다.

근검절약으로 부를 이뤄 나눔을 실천

오미리 류씨는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면서 재산은 상당이 많이 소유한 편이다. 재산축적 과정을 보면 벼슬을 통해 모았다기 보다는 토호세력과의 결혼으로 부를 축적한 것 같다. 운조루의 초대주인 류인화는 영천 허씨와 결혼했고 아들 덕화는 제령이씨와 결혼했는데 토호세력이었던 이시화의 딸이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류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것으로 보인다.

류이주는 운조루 창건시기를 전후하여 토지가 크게 늘어났는데 이 또한 이 시기에 사들였거나 아들의 결혼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류이주가 훗날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1793년 어간에는 토지 소유량이 대략 전 2.5결, 답 26결 남짓하다. 1결은 10,809㎡로 약3천2백75평 정도다. 또 류씨 집안이 소유한 노비는 1774년 5명에서 20,30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 1786년 11명, 1792명 19명이며 1793년 두 아들에게 나눠준 노비는 21명이나 된다.

이후 억은 순창 조씨, 견룡은 진천 송씨와 금천 최씨, 제양은 승평 박씨와 양천 허씨, 영환은 성주 이씨, 형업은 해주 오씨, 증교는 해주 최씨 등 비교적 세력가들과 혼인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운조루 주인들은 검소하게 살아서 지금도 생일상에는 기름을 두른 음식을 올리지는 않는 가풍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일찍부터 공동체의 삶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운조루의 주인들은 훗날에도 문중 소유의 산이나 농토를 마을공동재산으로 기탁하는 등 마을공동체 활동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자생조직인 위친계와 오목계가 20년 전까지 운영되었다. 6.25 동란 때 지리산 일대가 빨치산 소굴로 저녁에는 인민군이. 낮에는 국군이 들어와 큰 곤욕을 치렀기에 이웃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위친계는 부모상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계이고 오목계는 오미리 지구 3개 마을 친목을 도모하는 뜻에 조직, 운영되었다.

현재 운조루를 지키고 있는 종부는 전주이씨 길순(84) 여사다. 큰 며느리가 작고한 탓에 큰 손주 며느리가 이어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종부의 둘째 며느리 진주 곽씨 영숙씨(46)가 한마을에 살면서 운조루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문화해설사 이면서 새로 한옥을 지어 남편 정수와 함께 운조루막둥이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운조루에서는 관리를 위해 1천원의 입장료를 자발적으로 내도록 함을 설치해두었다. 그러나 일부 관광객들은 240년을 고택을 지켜온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조선시대 조경관을 반영한 天圓地方

운조루는 오미산 자락 1천여 평의 부지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 앞으로는 마당은 없고 바로 긴 연못이 가로 놓여 있다. 이곳 연지에는 섬이 하나 있다. 이는 삼신산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상류층의 조경관이었던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연못 주변으로 각종 연화(蓮花)를 비롯한 화초를 심었다.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오미리 마을은 현재 ‘문수골’이라 부르는 ‘타불천(他不川)’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시내를 이루고 흐른다. 어린이들이 발을 적시고 놀거나 빨래를 하기에 좋은 맑은 물이다. 타불천이란 이름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족할 줄 알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제양이나 황매천이 이 타불천 정자에서 시를 지었으며 그 시들이 ‘이산시집’에 전해진다.

오미리에서는 1970년대까지 정월에 농악으로 지신밟기와 대보름날 달집태우기가 계속되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오미 저수지 아래 국도변에 물레방아가 있었으나 역시 1970년대에 없어졌다. 19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쓸어버렸다.

운조루 유물전시관 오픈 … 1만여점 보관

오미마을에는 지난 4월 운조루 유물전시관이 개관됐다. 마을입구 5,905㎡에 건축 총면적 886㎡로 전시실 1동, 화장실 1동, 주차장 및 야외 휴게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이 유물전시관에는 류씨 운조루보존회가 기탁한 약 1만여 점의 유물가운데 100여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데 앞으로 교체 전시될 예정이다. 유물 가운데는 추사 김정희·원교 이광사의 병풍과 류이주가 무과에 합격하고 받은 홍패교지, 19세기초에 그려진 류이주의 영정, 채용신이 그린 류제양 영정, 명필 이익회가 쓴 ‘운조루’ 현판 등과 많은 서적들이다.

운조루 현판
또 운조루 7대 주인이이 류형업이 쓴 할아버지(류제양)의 가르침을 받아 13살 때부터 쓴 친필일기인 ‘기어(記語)’, 또 시를 짓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시패(詩牌)와 류이주가 자식인 류덕호 형제에게 재산을 분배해준 기록인 분재기 등 귀한 자료들이 많다. 용호재 시집, 이산시집 농사일기 60여권도 전한다.

이들 전적은 류이주 때부터 그의 자손인 류억(柳億)(1796-1852), 류제양(柳濟陽)(1846-1922), 류형업(柳瑩業)(1866-1944) 때까지의 문헌이며, 이 전적을 정리해 놓은 {소장책자목록(所藏冊子目錄)} 도 남아있다 . 또 자녀들을 장가를 보낼 때 드는 비용, 부친 장례식 절차와 비용, 조문객 명단, 일제시대의 영수증, 수집했던 물품들의 수집당시 상황도 기록되어 있다.
운조루는 이번 전시관 건립이전에도 전적(典籍)류가 총 326종 801책이 전해오고 있는데 일부인 32종 145책을 1967년 성균관 대학 중앙도서관에 기증한 바 있다.

한편, 이곳에는 ‘청주상당산성도’ 등 고지도 12책이 남아 있는데 청주 상당산성을 복원할 때 이 그림대로 했다고 알려진다. 우리는 이 값진 유물들을 통해 선인들의 삶을 배우고 역사를 올바로 꿰메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 오래지 않아 도둑이 들어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고, 유물들 때문에 먼 길을 떠나는 일도 삼가야 했다고 하니 운조루 역대 주인들에게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빈 집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농촌마을

구례 토지면은 화엄사에 딸려 도자기를 만들어 바치던 토지처(土旨處)였다. 조선시대에 토지면이 되었다. 구만, 단산, 신단산, 월곡, 중산, 하죽, 상죽, 내죽, 도산, 파도, 오미동, 환동, 중대, 불당, 율치, 장요, 용두, 금동, 원내, 음안, 오평, 봉소, 내계, 송정, 외계, 외동, 중추, 직전, 수평, 당치, 평도, 죽리, 원기, 신촌, 남산 등 35개 마을을 관할하였다. 이후 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마산면 하사리(下沙里) 일부를 병합하여 구산, 파도, 오미, 문수, 용두, 금내, 송정, 외곡, 내서, 내동 등 10개리로 통폐합하였다.

동쪽으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남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간전면과 문척면, 서쪽으로 마산면, 북쪽으로 산동면과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닿았다.

지금도 문수계곡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마을 앞으로 흐르고 지리산 둘레길, 이순신장군 백의장군로, 삼림욕장 등을 갖추고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 백의종로는 이순신이 1597년 도원수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천안~공주~논산~익산~삼례~임실~남원~구례~순천을 거쳐 4월 27일 도원수가 있는 곳으로 가던 길이다.
오미리는 민박집이 15개나 되는데 365일 가운데 200여일 정도는 손님들이 찾는다고 하니 유명한 민박마을임이 분명하다. 특히 빈집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곳으로 이사를 오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다고 한다. 그것도 전국적이다. 현재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웹디자이너도 있고, 쇼핑몰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몸은 농촌에서 쉬면서 일은 도회지에서 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얼마 후면 한의원도 문을 연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한의사가 아예 이 곳에 한의원을 오픈한다는 것이다. ‘청정지역에서 가꾼 한약초로 지은 한약’ 이라는 입소문이 나면 또 한 번 유명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행복마을 한옥단지 앞에 조성되어 있는 생태소공원은 생태수로를 지나 전원단지로 들어갈 수 있는 다리와 전통한옥과 어울리는 물레방아가 조성되어 있다. 내방객 뿐만 아니라 마을주민들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벤치와 더불어 소박한 풀밭이 조성되어 있다. 물이 흔한 계절이면 맑은 개울물에서 올챙이를 비롯한 각종 수생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또 마을 서쪽 용두에서 넘어서면 운조루 뒤까지 타원형의 생태숲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호젓한 능선 길을 따라 가벼운 산행을 맛볼 수도 있고 소나무와 도토리 나무 사이를 한적하게 걸으며 짧은 산림욕을 즐길 수도 있다.

조선후기 고택 곡전재도 유명

오미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왼편에 곡전재가 있다. 이 고택은 1929년 승주부호 박승림(朴勝任)이 건립한 것으로 훗날 지인이었던 곡전 이교신에게 1940년 양도되었다. 이후 이씨 가문의 고택으로 5대째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한국관광공사 선정 대한민국 명품 고택으로 지정받았다. 향토문화유산 9호로 지정되어 있다. 곡전재는 금환락지라는 풍수지리 명당에 걸맞게 2.5m 높이의 담장을 금환락지처럼 둘러쌓았다. 전형적인 조선후기 전통목조 주택으로 부연을 단 고주집,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석가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문간채, 사랑채, 안채가 모두‘ㅡ字’형으로 총 6채 53칸의 한옥을 지었다. 그러나 현재는 5채 51칸이 남았고, 한 채를 제외하고 전부 한옥 숙소로 운영 중이다.

곡전재는 1998년 현 주인 이순백이 동행랑과 사랑채를 복원하면서 바로 앞에 누각과 세연(洗淵)이란 연못을 조성했다. 앞바당에는 각종 난과 작약, 대형 소나나무 분재가 있고 한옥지붕으로 나팔꽃을 올려 운치를 더해준다. 특히 대문에는 근대의 생활유물들을 모아 전시해 마치 작은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운조루 약도


▲ 화엄사·천은사
구례는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의 넉넉한 품안에 화엄사 천은사를 비롯한 천년고찰과 온천, 지리산 계곡 계곡에서 흘러나와 강줄기를 이루는 섬진강, 산줄기를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지리산은 남한 제2의 고봉 천왕봉으로부터 서쪽의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만도 반야봉, 토끼봉 등 고산준봉이 10여개나 줄지어 버티고 있어 웅산 중의 웅산이자 민족의 영산으로 꼽힌다.
지리산(방장산)이란 이름은 ‘지혜로운 이인이 많은 산’ 이라는 뜻으로 불리었다고 하며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중국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다.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이 대표적이며,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잇는 100리 능선에는 1,500m가 넘는 고봉이 10개, 1천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나 있을 정도로 높고 크다. 평평한 고원지대도 많이 발달해 야생화나 철쭉 등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 천년고찰 화엄사·천은사
화엄사는 사적 제 505호로 6세기 중엽(544, 백제 성왕)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의 건물이 전소되고 주지였던 설홍대사는 3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왜군에 대항하다 전사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석조물을 제외하고 현재 남아 있는 전각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주요 문화재로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등 많은 보물이 있다.
천은사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지리산 일주도로 입구에 위치한 사찰로 828년(신라 흥덕왕 3년) 덕운조사와 인도의 중 스루가 터를 닦고 절을 지어 절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하였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 그리 이름하였다.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 하여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몰려들었던 곳이다.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려 중건을 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물이 그쳤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조선 숙종 4년(1677년)부터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 한 서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었다.

▲ 사성암 (구례군 문척면 사성암길 303)
원래는 오산암이라 불렀다. 오산은 바위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렀다. 544년(성왕 22) 연기조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사성암사적 四聖庵史蹟』에는 4명의 고승, 즉 원효(元曉), 도선국사(道詵國師), 진각(眞覺), 의상(義湘)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사성암은 해발 530m의 오산(鰲山) 꼭대기에 있다.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하였으며 암자 뒤편에 있는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 등 12비경의 절벽절경이 뛰어나다. 또 암자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암벽에 높이 4m되는 음각 마애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수령 800년의 귀목나무와 7개의 바위가 원을 그리면서 놓여 있는 곳이 있으며 법당 왼편에 지장전, 산신각, 도선굴, 소원바위, 좌선대, 귀목나무가 있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죽연 마을 주차장에 차를 두고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왕복 6000원이다.

▲ 하동 최참판댁 하동 악양 ‘토지’ 드라마 세트장
운조루에서 나와 국도 19번을 타고 하동으로 향하는 길에 고갯길을 넘으면 악양면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이 있다. 경남 하동은 인구 5만의 작은 군이지만 매년 최참판댁을 찾은 관광객이 50~60만명에 이를 정도로 유명하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 몸에 받은 땅이다.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악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중에 소상팔경이 있는데 동정호와 소상팔경은 이곳 사람들의 자랑거리다. 악양면 평사리 상평마을에 최참판댁이 드라마세트장으로 복원(?)된 것은 지난 2001년 11월이다. 98년에 시작해 3년여의 공사를 거쳐 안채, 사랑채, 별당채, 행랑채, 초당과 사당을 갖춘 최참판댁 만들어졌다. 이후 2003년 sbs ‘토지’ 방영을 앞두고 2001년 평사리 483번지 일대 21,453㎡에 조선 후기 우리민족의 생활모습을 담은 초가 29동을 세웠다. 최참판댁 바로 뒤에는 평사리문학관이 건립되었다.

토지마을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거처했던 드라마 촬영 당시의 내용을 근거로 초가 36동과 기와 2동(삼신각, 김훈장네)에 최참판댁, 토지세트장, 평사리문학관, 전통한옥체험관, 전통문화 전시체험관이 있다. 특히 토지마을 김훈장댁, 김평산네 기와 1동과 초가 5동에는 관광객들이 직접 숙박할 수 있도록 온돌방과 아궁이, 화장실을 갖춘 숙박체험동(방 6칸)으로 만들어졌다. 이 곳 최참판댁에서는 드라마 ‘토지’말고도 인기드라마 ‘해를 품은 달’ ‘아랑사또전’ 등의 촬영지로 활용돼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탔다.
하동군은 최참판댁이 준공된 직후 2001년부터 토지문학제를 열기 시작한 이래 매년 1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다채로운 문학행사를 하고 있다, 또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났네’ 공연을 개최하는 등 문화콘텐츠를 통해 관광객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오미리 은하수 행복마을은 농어촌 민박마을 가운데서 최고를 자랑한다. 운조루라는 오랜 역사의 고택과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고 남한의 3대 명당이라는 길지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금환락지’라는 풍수지리설의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전남도의 한옥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지은 고대광실 높은 집들이 조선시대 양반가를 연상케 한다. 마을입구에는 맑은 시냇물이 사철 흐르고 마을 뒤로는 생태숲길이 만들어져 지친 심신을 쉬게 한다. 마을 앞을 지나는 시냇물은 유명한 문수동 계곡에서 흘러오는데 아이들의 물장난 장소나 빨래터로도 손색이 없다.
새로 지어진 한옥들은 대략 200평 내외의 부지에 건평 25~30평 규모로 씽크대, 수세식 화장실 등 현대식 시설을 갖췄다. 하룻밤 방 1칸을 사용하는 데는 8만원~10만원이며, 독채를 빌릴 경우는 20만원~30만원이다. 집의 크기나 비수기, 성수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현재 민박이 가능한 곳은 16세대이며 한 집에서 두 개의 공간을 빌려주기도 한다. 식사는 민박집에서 각자 해결할 수도 있고 마을의 녹색체험관에서 운영되는 ‘들녘밥상’에 가면 언제든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은하수 행복마을 사무실(061-781-5225)로 문의하면 된다. 이 마을 출신 김화란(30) 사무장이 모든 일을 척척 알아서 처리해준다.

운조루 은햐수 행복마을 민박집은 다음과 같다.
▲ 무명촌 : 독채 10인 (류민교 011-224-6734, 010-3800-3982) ▲ 은하수 : 독채 10인 (박상규 010-4663-2514, 010-5274-4331) ▲ 운조루막둥이 : 가족실 2-4인, 독채 10인 ( 곽영숙 010-9305-7705) ▲ 반달가슴곰 : 독채 10인, 가족실 4인 (서영래 010-9222-8837. 010-4103-5630) ▲ 고연락 : 독채 10인, 가족실 3인 (최정례 010-2336-6458)
▲ 소산당 : 가족실 2-3인 (이주현 010-2975-0025) ▲ 파란물가하얀집: 가족실 4인 (유은순 010-3212-6845) ▲ 소담 : 가족실 3~4인 (김옥자 010-4749-1874) ▲ 효임당 : 가족실 3인 (박효임 010-5012-2516) ▲ 녹차나무 : 가족실 4인 (최광두 010-9688-0805) ▲ 감나무 : 가족실 4인 (박도남 010-2989-2300,061-781-2298) ▲ 새뜸정 : 가족실 4인 ( 윤쌍옥 010-7400-2337, 061-781-2337) ▲ 산들민박 : 가족실 2~4인 (류재은 010-7794-2627, 061-781-2627 ▲ 운조루 : 가족실 4인 (이길순 010-8904-2644) ▲ 들녘애 : 가족실 4인 단체실(8명) (최명숙 010-4141-2402, 010-9666-9641 ▲ 무지개 : 가족실 4인 (김금순 010-2414-2206)


▲ 들녘밥상 =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010-4141-2402)
운조루가 있는 은하수행복마을에는 민박가구만 15세대나 된다. 그런데 집집마다 식사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녹색체험교실로 운영되는 마을회관에 식당을 열어 민박하는 사람들을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한사람에게 위탁하여 운영하고 일정금액을 마을경비로 내도록 하는 것이다. 녹색체험교실에서는 콩국수도 만들고, 순두부, 콩물, 콩비지 김치찌개 ,콩비지 김치전 등을 만들어 먹는 체험행사가 할 수 있다.
민박하는 사람 가운데는 직접 먹을거리를 가져와 요리를 해서 먹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들녘밥상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메뉴는 주로 산에서 직접 채취한 산나물이이 많다. 다래순 신선초 등 시중에 나오지 않는 산나물과 뽕잎반찬에다 밥도 뽕잎가루를 넣은 뽕잎밥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손맛이 있기로 유명한 친정어머니로부터 음식만드는 법을 전수받은 최서인(44) 씨가 인기짱의 쉐프다. 특히 조미료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며 집간장만 고집한다. 촌닭이나 오리, 생고기 등을 원하는 사람은 적어도 1시간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
한 끼에 8천원인데 도시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특별한 밥상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 섬진강 = 구례군 토지면 파도리 851-2 (061-781-9393)
섬진강 식당은 그야말로 섬진강에서 나오는 다슬기를 잡아서 수제비나 무침, 전을 지져주는 다슬기 전문식당이다.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과 계약을 해서 수매하고 싱싱하고 좋은 다슬기로 요리하기 때문에 맛있고 건강에 좋다. 특히 다슬기는 간기능 개선에 탁월한 효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식당 2층에 올라가보면 아주머니들이 다슬기를 일일이 까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슬기는 믿고 먹을 수 있다.
다슬기수제비(특 10,00원, 보통 7,000원) 말고도 다슬기 무침(대 35,000원, 중 25,000원), 다슬기장무침(대35,000원, 중 25,000원) 다슬기탕, 다슬기토장탕(8,000원, 특 10,000원)도 있고 다슬기전도 술안주로 좋다.별미의 하나는 김밥에 다슬기를 올려서 먹는 것인데 간장게장처럼 만든 다슬기간장에 찍어 먹는 다슬기 김밥 맛은 정말 그만이다.

글 지형원 (발행인) / 사진 임철진 (편집위원)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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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나주봉황 철야마을17.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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