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5.23(월) 11:25
문화일반 문학/출판 문화화제 전시 연주 공연 영화 연예 특별기고 예술인동정 이슈
2022년 5월 24일(화요일)

특집-광주ㆍ전남 1호

목포양동교회·산정동성당·정명여학교 최초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 맹장수술집도 최상채
2013. 06.20(목) 14:40확대축소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과 함께 ‘광주·전남지역의 1호’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지역 최초의 초·중등학교는 어디였으며 최초의 병원이나 의사, 최초의 교회나 성당, 양복점, 극장, 음식점 등을 추적해 기록으로 남기거나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또 최초는 아니지만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간을 리모델링해 공공시설로 사용하는 사례도 있다. 벌교 ‘보성여관’이 보성군과 문화재청의 노력으로 복원돼 새로운 문화공간 겸 숙박 체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산포의 옛 동양척식회사 문서고와 숙직실도 근대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으며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도 나주시에 의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문화통 & Asia는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각종 자료와 증언을 중심으로 우리지역의 최초를 추적해본다. 그러나 일부 자료는 정확한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아 이를 재록(再錄)하여 추후 연구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광주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 1905년 광주 최초의 근대병원으로 문을 열었으며 1911년 미국인 그라함이 죽은 딸 엘라 래빈 그라함을 추모하기 위해 보내온 기부금으로 3층 벽돌 건물을 짓고 E.L. 그라함 병원이라 했는데 1934년 화재로 건물이 불타버렸다.(광주1백년)
최초의 근대병원은 제중병원

우리지역 최초의 근대병원은 제중병원으로 현재의 기독병원이다.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놀란((Dr. J.W.Nolan)씨가 1905년 진료를 시작했으며 1911년 건물을 신축했다. 이 병원은 1911년 미국인 그라함이 죽은 딸 엘라 래빈 그라함을 추모하기 위해 보내온 기부금으로 3층 벽돌건물을 짓고 E.L 그라함 병원이라 했는데 1933년 화재로 건물이 불타버렸다. (광주광역시의사회 70년사, 광주광역시의사회, 2010)
최초의 공립병원은 광주자혜병원으로 전남대병원 전신이다. 자혜병원은 1910년 문을 열었으며 1925년 전남도립 광주의원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광주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초대병원장에 김덕성 박사가 취임했다.
의과대학은 1944년 개교한 광주의학전문학교가 최초다. 현재의 전남대학교의과대학의 전신이다. 인가 당시의 교직원은 교수 5명, 조교수 2명, 서기 2명이다. (광주광역시의사 70년사, 광주광역시의사회, 2010) 광주지역 최초의 개업의는 강진 출신 김종섭으로 1917년 광주시 황금동에 광산의원을 개업했다. 김씨는 1889년 지석영이 설립한 경성의학 전신인 경성의학 강습소를 졸업했다.
1910년 개원 당시 광주자혜의원(광주광역시 의사회 70년사)

최초의 서양의사는 오웬 선교사
광주 최초의 서양의사는 선교사 오웬으로 1904년 광주군 양림리 선교사촌에서 나환자를 진료했다. 오웬(한국명 오원(吳元), Clement Owen, 1867~1909)은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남장로교의 총회 신학교인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를 마치고 다시 버지니아 의학부에서 의학수업을 받았다. 그는 의사가 된 뒤 1894년 목사안수를 받고 1898년 11월 미국 남장로교 한국 파견 선교사로 목포에 와서 배유지 선교사와 합류했다.
오웬 선교사는 처음 목포에 진료소를 차리고 의료봉사를 폈다. 이후 광주선교 개척을 위해 1904년 12월 배유지 가족과 광주로 옮겨와 광주와 전남도내 15개군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1909년 4월 3일 급성폐렴을 얻어 43세 때 세상을 떠났다.

오웬기념각
첫 서양음악회가 열린 오웬기념각
광주에서 처음으로 서양음악회가 열린 곳은 양림동 오웬기념관이다. 이곳은 1914년 오웬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미국 콜롬비아 대학원 출신 김필례가 1920년 처음으로 독주회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김필례는 개화기 이후 당대 최고의 선진여성으로 미국 콜롬비아 대학원을 나와서 한국 YWCA창설을 주도했고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또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운동과 여성교육운동을 선도했다. 또 정신여학교 이사장, 서울여자대학 창설자이기도 하며 오방 최흥종의 동생이자 미국 켄터기 주립대학과 에모리 대학의학부를 졸업하고 광주제중병원 의사를 지냈으며 광주YMCA 회장, 전남지사를 역임한 최영욱의 부인이다.
한편, 광주 최초의 여의사는 현덕신으로 동경여자의전을 졸업하고 1928년 광주(남동)에서 개업했다. 광주 YWCA 2대 회장을 지냈으며 와세다 출신 언론인으로 무등산 석아정 (오방정, 춘설헌으로 개명) 주인이기도 한 최원순의 부인이다. 이 지역에서 최초로 맹장을 수술한 외과의사는 남강 최상채(1903~1973)다. 광주자혜의원에서 10년간 외과의로 근무하다 1935년 외과를 개원했다. 1952년 전남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냈다.
최초로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온 의사는 최영욱(1891~1950)이다. 최흥종 목사의 동생인 그는 미국 켄터키대학을 졸업하고 에모리 대학에서 193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 최초의 양의로 미군정시절(1945)전남지사를 지냈다. (광주광역시의사회 70년사, 광주광역시의사회, 2010).
한편, 1911년 설립된 광주나병원은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이다.

금남로1가 시절의 광주공립보통학교/ 광주향교 옆 사마재에서 개교한 후 전일빌딩 자리에 교사를 지어 잠시 있다가 1927년 현재의 서석 초등학교 자리에 새 교사를 지어옮겼다.(광주 1백년)
최초의 초등학교는 광주서석초등학교
우리지역 최초의 초등학교는 1896년 설립된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3년제)다. 현재의 서석초등학교 전신이다. 이 공립소학교는 광주 향교 옆 사마재(司馬齊)를 임시교사로 사용했으며 1학급 학생수는 50명이었다. 1906년 공립광주보통학교(4년제) 개칭되면서 광주시 사구동으로 이전하였다. (광주서석초등학교 연혁)
공립광주보통학교는 1907년 금남로 1가 전일빌딩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가 1927년 서석동 현 서석초등학교 자리로 이전했다. 한편, 1924년 제 2보통학교(순 여자보통학교)를 설립, 광주공립보통학교에서 여학생 전부를 분리시켰다. (광주100년, 박선홍, 2012년 증보판) 광주중앙초등학교는 1907년 광주심상고등소학교로 개교했으며 1945년 광주중앙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광주중앙초등학교 연혁)
목포에서는 영흥소학교가 1903년 9월 9일 영흥서당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업과 함께 교인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설립한 학교다. 1937년 9월 20일 신사참배문제로 폐교하였다가 1952년 3월 21일 목포영흥중학교로 복교하였다. (목포영흥중학교 연혁)

목포정명학교/ 정명학교 최초의 학교건물관 기숙사(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
첫 중등학교는 목포정명여학교
우리지역 첫 중등학교는 목포정명여학교다. 1879년 목포에 들어온 미국 남장로교파 선교사들이 신도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다가 1903년 학교를 설립했고, 1911년 6월 30일 목포정명여학교로 개명했다. (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 연혁)
광주 숭일학교는 1904년 광주에 처음으로 들어온 미국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1907년 3월 5일 배유지(Eugene Bell)교사 집에서 신도들의 자녀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8년 2월 1일 숭일이라는 교명으로 개교하였다. (광주숭일고등학교 연혁) 숭일중학교는 2년제 소학교로, 숭일고등학교는 4년제 소학교로 개교했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역시 1904년 광주에 들어온 미국 남장로교파 선교사들이 1908년부터 신도들의 여아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배유지 선교사 부인과 엄언라(Miss Ella Graham)가 변요한 사택에서 여학생만 따로 가르쳤으며 이듬해 대한제국정부로부터 여학교 설립승인을 받았다. 수피아여고는 1911년 미국인 스턴스부인으로부터 5천 달러 기부 받아 3층의 회색벽돌건물을 지으면서부터 학교의 면모를 갖췄다. 스턴스부인의 동생 제니 스피어(Jennie Speer)를 애도하는 의미로 새 건물을 수피아홀(Speer Hall)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수피아 여학교가 되었다. (광주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연혁)
광주전남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사립측량학교(훗날 광주농림학교)개교 당시 전경(1909)-광주1백년
광주 최초의 공립 중등학교는 1909년 불로동 서남대 부속병원 뒤쪽에 세워진 광주 농업학교다. 1908년 박봉주(朴鳳柱)가 금화 3백여원을 내서 세운 사립측량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되자 이듬해 이곳에 전남도립농림학교를 개교하였다.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학교건물은 광주군 소유의 30평 남짓의 한옥이었으며 1910년 옛 객사인 광산관으로 이전하였다.(광주 1백년, 박선홍) 이후 광주공립농업학교로 바뀌었다가 1951년 광주농업고등학교(임동)로 , 2001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오치동)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연혁)
광주 최초 사범학교는 전남도립사범학교(1923)로 누문동 광주고보(광주일고 전신) 교사 빌려 개교했다. 수업연한은 2년제인 특별 사범과와 1년제인 강습과가 있었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전신) 전경/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26호(광주1백년)
첫 공립 여성중등학교 욱(旭)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 최초의 공립 여성중등교육기관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1927)로 지금의 전남여고 전신이다. 1920년대 이전까지 광주전남에 많은 학교들이 세워졌지만 여성들을 위한 공립 정규학교가 없자 지역유지들이 적극적으로 설립을 추진하였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는 이듬해인 1928년 4월 장동으로 교사를 신축 이전했으며 1938년 4월 욱(旭, 아사히)공립고등보통학교로 개명하였다. 욱고녀(旭高女)로 불린 것은 이 학교가 아사히마치 즉, 욱정(旭町)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 최초의 금융기관은 광주농공은행
농공은행은 1906년 3월에 제정·공포된 ‘농공은행조례’에 의거해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다. 1906년 서울에 한성농공은행을 시작으로 평양·대구·전주·진주·광주·충주·해주·경성에 각각 설립되었다.
2년 뒤인 1908년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이 설립되었고 이를 나주농공은행이라 하였다. 농공은행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업무를 대행하게 되면서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착을 위한 농토 구입자금까지 공급하였다. 1918년 농공은행을 모체로 한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되면서 이에 흡수·해체되었다.(국내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호남은행은 최초의 일반은행
최초의 일반은행은 호남은행으로 광주·전남지역, 특히 광주와 목포의 자본이 결합해 1920년 설립되었다. 호남은행은 호남의 부호이며 유지인 현준호, 김상섭, 김병로, 윤정하 등 각지 24명의 동의를 얻어 1919년 7월 20일 자본금 150만원으로 발기되었다. 8월 16일 제 1회 주금 37만5천원을 불입완료하고 두취(頭取)에 김상섭, 전무이사에 현준호가 선임되었다. 1925년 김상섭씨가 사임하고 현준호씨가 뒤를 이었다.
1920년 10월 목포지점이 개설되고 1922년 8월 순천지점, 1926년 8월 장성출장소, 1932년 1월 장성지점이 설치되었다. 호남은행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견고한 기반으로 원활히 운용하고 있었으나 일본인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일본인 대출금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당국의 압력을 받아 타 은행과 합병할 것을 강요당했다.
1942년 5월 1일 은행 업무를 주식회사 동일은행에 양도하고 해산한다. 이후 동일은행은 여러 차례 합병과 흡수과정을 거쳐 조흥은행이 되었고 2006년 신한은행에 통합되었다. (조흥은행 105년사)

조선 최초의 금융조합은 광주지방금융조합
『광주지방사정』에 따르면, 사직공원 일대에는 예로부터‘관사(官舍)’로 쓰던 건물에 1907년 광주지방금융조합이 생겨났다. 바로 조선 최초의 금융조합인 광주지방금융조합이다. 조선 최초의 금융조합이 광주에서 처음 세워진 배경에 대해 충분히 알려진 것은 없다.
초대 조합장은 전남관찰부에서 마지막 수서기를 지낸 최상진이 맡았다 (그 아들이 광주지방국세청장과 중앙여고 이사장을 지낸 최태근이다). 조합은 1916년 옛 사마재터에서 지금의 충장로 4가 33번지로 옮기면서 명칭도 광산금융조합으로 바꿨다. 처음 금융조합이 있던 곳(사마재 터)에는 1931년 10월에‘조선금융조합창립기념비’가 세워졌다.
광주지방금융조합과 그 후신인 광산금융조합 외에도 광주에는 일제강점기에 광주금융조합과 동광주금융조합 등 다른 금융조합도 있었다. 광주금융조합은 1919년 2월에 설립됐다. 조합장은 우오타니(魚谷與藏)였다.
동광주금융조합은 1928년 12월 광산동 79번지에 설립되었다. 조합이 있던 건물터는 해방 직후에 광주YWCA 회관으로 사용되다가 YWCA가 대의동 전일빌딩 뒤편으로 옮긴 뒤로는 전남매일신문의 사옥으로도 쓰였다.
또 대의동 옛 농협전남도지부 자리에는 전라남도금융조합연합회(금조연합회)가 있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 한국관광공사)

목포 양동교회/왼쪽 출입문 위쪽에 있는 태극마크.
호남 최초의 교회는 목포 양동교회 /광주 최초의 교회는 우산리 교회
광주·전남에 처음 개신교 교회를 세운 사람은 배유지(Eugene Bell)다. 1896년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그는 1898년 목포에 첫교회 (훗날 양동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유진 벨 선교사와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한국명 이눌서 1867~1951)선교사가 천막을 치고 20여명의 신도들과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다.
양동교회는 호남지역 기독교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1910년 목포에서 산출된 석재를 주재료로 하는 석조건축물로 지어졌다. 특이하게 왼쪽 출입문 위쪽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두산백과)
배유지 선교사는 1904년 10월 동료선교사인 오웬과 조사(助師) 변창연과 함께 광주로 들어왔다. 그들은 선교의 거점으로 양림동 일대의 산자락(양림산 또는 사직산)을 선교의 요람으로 정하고 12월 24일 밤 자신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후 신자들이 늘면서 1906년 가을에 지금의 충장로 3가에 교회를 지었는데 이 교회가 북문안교회다. (광주 1백년, 박선홍, 2012년 증보판 )
그러나 역사신학자 차종순 목사(호남신학대학)의 ‘광주지역 최초의 교회에 관한 연구’에는 광주 최초의 교회는 우산리교회 (송정리교회 -덕산교회 -송정제일교회)로 밝히고 있다. 이 논문은 1928년 발간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권) 1901년 편에 있는 자료를 인용해 ‘송정제일교회의 기록에는 광주군 송정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是)에 선교사 배유지 오기원의 전도로 신도 점증함에 김일서방(金日西方) 집에서 회집하다가 우산리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회집하더니 그 후 송정리에 이전하니 조사(助師)는 조상학 외 수인이 시무하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 논문은 또 배유지 목사가 1896년 11월 송정리와 우산리 지역을 최초로 방문한 후 1897년 가을부터 하층민을 주축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우산리(덕산)에서는 김일서방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 교회당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양반들과 관리들의 박해가 심해져 우산리 교회는 잠정적으로 폐쇄되고 삼도리와 구소리, 요기리, 하나말 등에서 다니던 교인들은 각각의 동네에 교회를 세웠다.
우산리 교회당이 무너지자 1901년 신촌리에 교회당을 세웠는데 이 교회가 송정리교회로 알려진다. 이 교회는 신촌리에 있어 신촌교회로 부르다가 1904년 혹은 1905년경부터 덕산교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후 1916년 송정리 동부로 옮기면서 ‘송정리교회’라고 불렀으며 1979년 송정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차종순, 광주지역 최초의 교회에 관한 연구, 2001, 신학이해, P124-278 참조)

광주 최초의 한국인 목사는 오방 최흥종
광주 최초의 한국인 목사는 오방 최흥종(1879~1966)이다. 광주기독교계의 선각자이자 청년운동가로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투사였다. 나병환자의 어버이이기도 했다. 오방(五放)은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고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의미다.
1904년 말부터 배유지 목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9년 광주제중병원 (기독병원) 포사이드 선교사의 조수로 일하면서 나병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1911년 양림리와 봉선리에 있는 자기 소유의 땅 1천평을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여수 애양원 설립으로 이어졌고 1916년에는 소록도 국립자혜병원이 개설되었다.
오방은 또 3.1운동에 관여해 체포되어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북문안교회에서 광주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목사임직을 받았다. 그후 호남신문사 회장으로 부임해 혼란기 지방 언론을 이끌기도 했다.
또 1947년에 한국나병예방협회를 창립, 나병치료와 후생복지, 나병의 예방을 위해 헌신했다. 같은 해 의재 허백련과 함께 삼애원을 설립해 농촌지도자를 양성했다. (광주 100년, 박선홍, 2012년 증보판 )

광주·전남 최초의 성당은 목포 산정동 성당
전라도 지방의 천주교 전래는 유항검에 의해서이다. 유항검은 전주 초남(草南)이 사람이며 인격과 학문이 깊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당시 전북에는 이미 몇 개의 본당(천주교 사제(신부)가 거주하는 곳)과 공소(사제가 거주하지 않는 곳)가 세워져 있었지만 전남은 산야와 섬이 많아 교통이 불편해 1897년에야 비로소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 본당이 바로 산정동 성당이다. 관할교구는 본당 설립 후보지로 목포와 강경 2군데를 선정해 목포는 드애(Albert deshayes, 曺有道) 신부에게, 강경은 베르모렐 신부에게 본당설립 임무가 맡겨졌다.
1897년 당시의 이름은 목포본당이다. 드애 신부는 1898년 7월 2일 정식으로 목포에 부임한 후 1899년 목포 산정리 산(현 산정동 본당)을 매수하여 벽돌조 성당을 신축하였다. 이렇게 목포 산정동본당은 광주·전남 지역 천주교회의 모교회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목포교회의 관할구역은 당시 전남지역과 전북 순창, 정읍 태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1898년에는 한국인 신부로서는 최초로 이내수(李鳳秀,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목포에 와서 드애 신부를 도왔고, 1899년 7월부터는 무안군 몽탄면 사적리 우적동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광주대교구 50년사, 천주교 광주대교구, 1990)

광주북동성당/ 광주천주교는 1930년 공소로 시잭했으며 북동성당은 1937년 착공해 1938년 준공했다.
광주 최초의 성당은 북동성당
광주 최초의 성당은 북동성당으로 천주교 광주교구의 탯자리다. 광주 북동본당의 첫개척자는 나주군 노안면 양천리본당의 박재수 요한 신부다. 박재수 신부는 당시 목포본당의 주재용 바오로 주임신부의 권유에 따라 1929년 12월 10일 광주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1898년 목포에 천주교회가 생긴지 31년만의 일이었다.
그 뒤 박재수 신부는 선교활동으로 모은 1,328원으로 1930년 8월 광주 북정(지금의 북동) 33번지 300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공소를 지었다. 이 공소는 대구 주교관으로부터 선불로 받은 1년분의 사제 생활비와 그동안 모은 헌금으로 지은 것이다. 이를 전후해서 광주지역의 선교활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영세를 받은 신도가 200여명에 이른다.
교세가 차츰 확장되어 가자 1933년 5월 7일 드망즈 대구교구장은 광주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5월 29일 민정호 마르코 신부를 광주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했다.
그후 1937년 제4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구 토마스(Thomas Quinlan, 具) 신부가 동년 10월에 현 성당건물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1938년 준공하였다. 광주지역 복음전파의 초석인 이 건물은 1999년 4월 30일에 광주광역시 시지정 기념물 제25호 지정되면서 천주교회에 뿐 만 아니라 광주의 문화사적지로도 중요한 곳이 되었다.(광주대교구 50년사, 천주교 광주대교구, 1990)

중국집은 1930년대 후반에 생겨나
광주 최초의 청요리집(중국집)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대개 1920년대 중국의 내란을 피해 인천항을 거쳐 광주에 왔던 산동성 출신들이 변두리에 가게를 얻어 찐빵이나 만두, 호떡 가게를 하다가 짜장면이나 우동집으로 발전했고 기반을 잡으면 청요리집으로 발전하였다.
광주에 중국집이 오픈한 것은 193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왜정시대 광주의 대표적인 청요리집은 화흥루 (충장로 5가), 덕의루(금남로 4가), 송죽루(황금동), 아관원(광산동), 아서원(충장로 4가), 영빈루(금남로 3가) 등이다. 해방 후에는 충장로 1가에 왕자관과 황금동 파레스 호텔자리에 있던 여명반점이 광주의 대표적인 중국요리집이었다.
현재 광주에 남아 있는 중국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은 왕자관이다. 왕자관은 지금의 위치보다 충장로 쪽으로 커브에 있었고 건너편에 뉴욕제과가 있었다. 고흥에서 광주로 이거한 왕지의(王之義)가 1945년부터 운영하였다.
이후 아들 왕가시가 조금 운영하다가 1972년 손문 사장에 넘겼다. 왕자관은 약 70년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현재는 손문사장의 조카인 왕진만(54) 내외가 열심히 맥을 잇고 있다. 두 번째 역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충장로 5가 조흥은행 뒤에 있던 중흥루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1953년께 개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한중일보를 발행했던 왕수지 형제가 운영했다.

광주 최초의 상설영화관은 광남관
광주 최초의 상설영화관은 광남관(光南館)으로 1927년 10월 활동사진상설관으로 등록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 1910 식민지 시대의 영화검열 1934, 2009) 경영자는 구로세(黑風瀨) 였으며 관객 정원은 543명이었다. 일본 닛카츠(日活) 계통의 영화를 상영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세워진 극장 가운데 현존하는 곳은 광주극장 뿐이다. 1933년 설립을 신고하여 1935년 개관한 광주극장은 정원 1,250명의 대형극장으로 설립자는 선대부터 대지주 집안 출신의 최선진이다. 일본 쇼지꾸 영화사와 닛까스 영화사 작품을 상영하기도 했지만 조선인 중심의 거리(충장로 5가)에 들어서 조선인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 문을 닫은 무등극장의 기원은 제국관이다. 제국관은 경찰서와 법원 등 신민행정기관이 몰려있던 일본인의 거리 충장로 1가에 있었다. 이후 동방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무등극장으로 개명했는데 거대자본의 복합상영관 진출로 2012년 문을 닫았다.
한편 영화상영관이 아닌 최초의 공연장은 1910년 중후반에 설립된 광주좌(光州座)다. 광주좌의 존재는 1917년 출판된 ‘광주지방사정’에서 ‘근년에 신축되었다’는 기록에서 발견된다. 1919년 8월 4일과 1920년 5월 20일 매일신보 역시 ‘독자위원회’ 명목으로 광주좌에서 예기(藝妓)들의 기예를 관람한다는 기사를 싣고 있어 광주좌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광주극장문화사, 위경혜)

광주천 최초의 다리는 노지다리
역사상 광주천에 있었던 가장 오래된 다리는 부동교와 공원다리 사이에 있던 노지다리다. 1896년 광주를 방문했던 오횡묵이라는 사람이 남긴 기록 ‘지도총쇄록’에 운교, 즉 구름다리라고 소개했던 다리다. 여기서 노지는 광주를 부르던 옛 이름들 가운데 하나. 노지다리는 통나무를 베어다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얼기설기 잔가지를 얹은 다음 흙을 덮어 만든 다리였다.
러·일 전쟁 이후 통행량과 물동량이 늘면서 1907년께 처음으로 반영구적인 다리 광주교(일명 공원다리)가 세워졌다. 이 다리는 차량 등 현대적 교통수단의 통행을 생각해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최초의 광주천 교량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교는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의 모태) 도로를 개설, 확장하는 과정에 개설되었다.
한편, 광주천은 장불재 샘골에서 발원하여 24.2㎞를 흘러 극락강과 합류한다. 현재 광주천에서는 29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문화통 & Asia, 2011년 가을호)

최초의 양복점 와다나베, 양장점은 모나미
최초의 양복점은 와다나베다. 1920년대 초 일본인 와다나베가 지금의 충장로 1가 조선대학교 동창회관 자리에 문을 열었다. 그는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조선인 기술자를 양성했는데 기술이 뛰어났다.
와다나베 양복점 출신 한국 기술자로 처음 양복점 문을 연 사람은 임씨라는 성을 가진 기술자였다. 양복점 간판은 자신의 성을 따서 임옥 양복점이라고 했다. 광주에 많은 양복점이 생겨난 것은 해방 직후다.
광주 최초의 양장점은 이진모씨가 1955년 충장로 2가에 문을 모나미 양장점이다. 초창기에는 주로 교복을 만들다가 양장을 주로 했다. 그 다음이 이철우가 1957년 충장로 2가에 오픈한 남성양장점이다. 남성양장점은 1973년 후 서울로 진출해 마담포라라는 전국브랜드로 성장했다. (문화통& Asia, 2012년 여름호)

최초의 신문은 목포일보
광주·전남 최초의 신문은 1899년 6월 16일 창간한 목포신보(일문판)다. 일본인 야마노다키조가 주간으로 시작해 격일간을 거쳐 일간으로 발행했다. 일본인들끼리 보는 기관지 성격의 신문. 사옥은 본정(중동). 창간당시 순보를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1일과 6일 4.6배판 8면형 4단조로 발행되었다.
1910년 광주에서는 일본인 가타오하카루가 일어기관지인 광주신보를 창간했다. 이신문은 2년뒤인 1912년 10월 목포신보 주필을 지낸 아이까와호소(相川保三)가 인수하여 제호를 광주일보로 바꿨다.
일본 총독부가 1941년 1도 1사 주의라는 명분으로 언론통폐합을 단행, 광주일보와 목포신보가 없어지고 전남신보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전남신보는 제호만 바뀌었을 뿐 시설과 진용은 광주일보 그대로였다.
해방 후 전남신보의 유일한 한국인 기자였던 김남중(전 광주일보 회장)은 해방이 되자 한국인 사원들을 규합, 신문발간에 나섰다. 김남중이 주간 겸 편집국장을 맡았던 전남신보는 1945년 미군정청에서 관리권을 얻었다는 이은상이 나타나 건준전남도위원을 앞세워 인계를 강요해 체제가 개편된다.
1946년 박준규 사장이 물러나고 이은상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제호를 호남신문으로 바꾸고 가로쓰기를 시작했다. 호남신문은 전남신보의 사옥과 윤전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광주전남 언론사, 광주언론인동우회 간, 1991)

가장 오래된 식당은 나주 ‘하얀집’
광주·전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나주에 있는 나주곰탕의 원조 ‘하얀집’이다. 1910년 고(故) 원판례 할머니가 백반을 팔았고 6.25직후부터 곰탕으로 바뀌었다. 2대 며느리 임이순 할머니, 3대는 길한수, 4대는 길형선씨로 이어졌다.
그 다음이 1924년에 문을 연 해남 천일식당이다. 천일식당은 고 박성순 할머니로부터 시작해 며느리 고 이정례씨를 거쳐 현재 오현화씨가 3대를 이어가고 있다. 가정식 백반을 비롯해 애저, 아귀찜, 장어구이 등이 특히 맛이 있었고 1960년대 초 며느리 이정례 할머니가 전문화된 식당으로 키워 떡갈비를 대표메뉴로 하는 한정식을 개발했다.
세 번째로 오래된 집은 광양에서 1930년에 문을 연 삼대 광양 불고기집이다. 이소은 할머니가 ‘일흥식당’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광양불고기를 처음 선보인 뒤 2대 이영조씨를 거쳐 3대 이형중씨가 이어가고 있다.
네 번째 오래된 집은 1932년 문을 연 담양 신식당이며 다섯 번째 오래된 집은 1940년에 문을 연 영암 독천의 영명식당이다. <문화통 & Asia, 2012년 가을호>

광주 최초의 설렁탕집은 유일관
광주 최초의 설농탕집은 충장로 5가 만경관 건너편 유일관으로 알려진다. 그 후 금남로 4가에 춘일옥이 생겼고 광주극장 앞에 창경원이 생겼다. 그 가운데 창경원은 본격적인 시설을 갖추고 서울식을 모방했다. 만경관과 유일관은 밤을 세워가며 서민들의 벗이 되었고 새벽에는 수다한 건달과 술꾼들의 해장으로 인기가 높았다. (대도무문, 김남중, 1347쪽)

광주에 전깃불이 켜진 것은 1917년 8월
광주 최초 전깃불이 켜진 것은 1917년 8월이다. 광주전등주식회사 사옥은 수기동에 있었고 전선은 고압과 저압선을 합해 연장 9km다. 당시 전봇대는 2백여개이며 발전용량은 3,500등 규모다. 가장 먼저 공급된 곳은 자혜병원으로 95등, 광주감옥 45등, 광주우체국 35등이다.
일반 가정에 전기가 공급된 것은 이듬해인 1918년 8월 16일부터다. 일반 가정에는 저녁 5시부터 이튿날 7시까지 공급되었는데 정액등과 종량등으로 구분되었다. 정액등 16촉광은 월 1원 30전, 10촉광 1원, 5촉광 70전이었다.
광주 최초로 수돗물이 공급된 것은 1920년 5월이다. 증심사 입구 제 1수원지가 1917년 착공돼 3년 만에 준공됨으로써 수돗물 공급이 이뤄졌는데 초기에는 주로 시내 중심부의 공공시설, 그리고 일본인과 몇몇 조선인 가구에 공급되었다.

1956년 개업, 2013년 현재 충장로 4가 그 자리에 남아있는 화신다방.
최초의 다방은 광산동 쓰바메
최초의 다방은 쓰바메(제비) 다방으로 1928년 광산동 광남 빌딩 근처에 있었다고 알려진다. 최초 숙박업소는 1908년 개업한 동운여관으로 일본식 숙박업소다. 일본식 요정인 키타무라로도 1908년 황금동 학생회관 자리에 문을 열었으며 마츠다 양조장은 1907년에 생겼다.
이밖에도 광주 최초로 자가용 승용차를 탄 사람은 지정남으로 광주에서 광주 최초로 잡화점을 차려 많은 돈을 벌었다. 최초의 백화점이라고 할 대형잡화점은 1930년대 초 시작한 동아부인상회 광주지점(충장로 3가 옛 호남은행 바로 옆자리)이다. 조선은행 행원 출신 서울의 청년 실업자 최남, 이필수, 장덕수 등 100여명의 유력인사들의 후원으로 자본금 40만원의 주식회사로 발족해 여성용품, 일용품, 학용품 등의 잡화를 취급했다. 그러나 일제말엽 물자난으로 폐업되고 말았다.
광주 최초의 일본 상인은 교토 출신 이즈츠(1905)로 충장로 2가에서 잡화상을 했다. 한국 상인은 임학운으로 가구점을 운영했다. 최초의 여자상인은 최화정 목사(서림교회 2대 )의 부인 김세라로 김세상회를 열어 도자기, 고무신 등 잡화를 취급하였다.
한편, 광주에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오바나(尾花) 자동차가 있었으나 해방 후에 설립된 최초의 택시회사는 1946년 박인천이 설립된 광주택시(황금동)다. 박인천은 1948년 주식회사 광주여객자동차를 설립했고 1970년 고속버스 운행을 개시했다. 시내버스는 1954년 삼양버스 (현 을로운수) 와 천일버스가 설립되었다, (광주 1백년, 박선홍)

광주지역 최초 야학 송정리노동수양회
광주지역 최초의 야학은 1920년 7월에 송정리노동수양회가 개설한 야학이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29일자 신문에 따르면 “광주군 송정리 노동수양회에서는 래(來) 7월 1일부터 야학을 개시하야 일반 회원에게 조선문(朝鮮文), 산술(算術), 수신(修身), 보통용 일본어를 교수할 예정인대 교사는 해지방유지청년제씨(該地方有志靑年諸氏)가 의무로 윤회교수(輪回敎授)한다더라.”고 기사가 실렸다.
그 해 9월에는 광주청년회 주관으로 야학을 열었는데 콜롬비아 대학출신의 김필례(교장), 임자혜(교사, 광주3.1운동의 주역 김강의 부인), 홍승혜(교사) 등이 운영했다. 흥학관을 빌려 한글, 한문, 산술, 가정학 등을 가르쳤는데 수강생은 4백여 명에 달했다.
이후 조만선, 최원택, 최선진 등 당시 북문밖 부호들이 밤길을 걸어 흥학관까지 가기 어려운 북문밖 여성들을 위해 인근 교회 (북문밖교회, 훗날 중앙교회)를 빌려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북문밖교회는 밤에는 여성들을 위한 야학으로 낮에는 아이들을 위한 강습소가 되었다. (광주 1백년, 박선홍, 2012년 증보판)

최초의 사회장은 서서평
서서평(본명 엘리사벳 J. 쉐핑(Elisabeth J. Shepping, 1880~1934)의 사회장이 치러진 것은 1934년이다. 서서평은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32살 때 미국 남장로교가 파견하는 간호선교사로 광주에 왔다.
1934년 별세할 때까지 22년 동안 제중병원(현재 기독병원)의 간호사 겸 선교사로 봉사했는데 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였다. 평생을 미혼으로 살았으며 항상 굶주린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나눠주었다. 그가 숨을 거둘 때 집에는 밀가루 두 홉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서서평은 그 외에도 1923년 5월 조선간호협회 (현 대한간호협회 전신)의 결성을 주도했고 현 백운교회의 전신인 진다리 교회와 봉선리교회를 세웠다. 1922년 전국 최초로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에서 여신도회를 조직해 봉사활동에 앞장섰다.
1934년 6월 26일 54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고 유언에 따라 장기는 모두 의학실험을 위해 기증되었다. 장례식은 당초 교회장으로 치를 계획이었으나 광주지방 유지인 김신석 최원순 김용환 정상호 정광호 최경식 등의 주장에 의해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뤘다. 장례식은 12일장으로 1934년 7월 7일 양림 오웬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많은 지방 인사와 기독교인들은 물론 서울 평양 부산 등 국내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하얀 소복을 입은 이일학교 제자들이 운구를 맡았고 그 뒤에는 13명의 양딸과 수백명의 거지, 문둥이들이 따랐다. “어머니”“어머니”하고 부르며 목놓아 우는 그들의 통곡소리에 조객들은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녀는 양림 뒷동산에 묻혀있다. (광주 1백년, 박선홍, 2012년 증보판)

광천시민아파트
최초의 우체국은 나주우체국
전라도 최초의 우체국은 나주우체국(사)로 1896년에 설립돼 이듬해인 1897년 광주로 이거했다. 나주우체사의 광주이전으로 나주에는 우체사가 없었다. 우편망 확장을 위한 임시우체제도 시행으로 1898년 6월 1일 나주군과 남평군에 임시우체사가 각각 설치되었다. (나주소통의 창 ‘수레바퀴’ 다음 블로그, 김경식 운영)
이 지역 최초의 세무서는 1934년 설립된 광주세무서다. 이후 1954년 광산세무서가 세워졌다가 없어졌다. 최초의 엘리베이터는 1968년 7층 건물로 신축된 전일빌딩이며 훗날 10층으로 증축되었다.
최초의 아파트는 1969년 건립된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알려지고 있다. 6.25 피난민과 농촌실향민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에 지어진 공동연립아파트 가.나.다 동이있다.
이곳에서는 지난 2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프로젝트의 하나인 ‘광천시민아파트로 가. 나. 다’연극이 공연되었다. 이 연극은 광천동 성당에서 시작된다. 들불야학 이야기, 5.18 당시 주민들이 겪었던 이야기와 사진전시회가 열렸으며 옥상에서는 주민들과 함께하는 국악연주회가 열렸다.
◇지형원 / 발행인


이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개)
이 름 비밀번호 이메일
이모티콘
제 목
내 용
특집 주요기사
특집/ 전라도 시·군 대표 막걸리 특집 / 영산강 八景을 아십니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5개원 어떻게 운영되나?만원 경매장을 아십니까?
건배사- ‘술잔 속 빛나는 센스’30초의 승부사…영화속의 건배사 -그대 눈동자를 위해 건배
전일빌딩 반백년 /전일빌딩 역사전일빌딩 반백년./광주일보
전일빌딩 반백년/ 전일방송전일빌딩 반백년/전일빌딩과 5.18
최신 포토뉴스

이문석 '어미 새와…

'우크라이나에 평화…

소리꾼 김수현이 부…

명진고 '역사, 5…

'미술 아카이브의 …

특집기사 전라도문화수수께끼
통발굴 전남의 마을 1박 2일
인물 해외통신원 리포트
 2022. 5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일 2일 3일 4일 5일
6일 7일 8일 9일 10일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국제교류음…
이문석 '어미 새와 아기 새 '
현대미술 전문잡지 ‘에뽀끄 ’ …
명진고 '역사, 518 골든벨대회…
극단 청춘 '버꾸 할머니' 공연
사진작가 김석은 초대전 '바다 위…
'미술 아카이브의 가치' 특강
소리꾼 김수현이 부르는 동편제 …
웰빙 라이프
광주-서울 항공요금 4만 1천원으…
한국공항공사(사장 김석기)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에어부산과 함께 23일부…
광주-제주 저가항공 신규 운항 시…
호남권 최초 저비용항공사인 티웨이항공이 4일 오전 7시 TW901편을 시작으로 …
인사말 | 회사개요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 회원약관 | 개인보호정책 | 청소년보호정책 | 공지사항 | 광고문의 | 기사제보 |

Copyright ⓒ . 제호 : 문화통. 관리자에게 mhtong@hanmail.net for more information

사단법인 광주문화발전소 발행인 겸 편집인 : 지형원 등록번호 : 광주아 00031 등록일자 : 2008년 12월 31일

주소 : [61475]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196번길 8 오송빌딩 301호 제보 및 각종문의 : 062-226-5511 FAX : 062-226-1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