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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일(토요일)

전일빌딩 반백년 /전일빌딩 역사

광주전남 언론의 탯자리
일어판 광주일보-호남신문 -전남일보-광주일보-전일방송까지
2013. 09.12(목) 15:32확대축소
왼환은행에서 바라본 전일빌딩 <리일천 작가 촬영.
광주시 동구 금남로 1가 1번지 전일빌딩. 한때 광주를 상징하는 건물이었고 80년 5월을 정면에서 지켜보았던 전일빌딩이 경매된 데 이어 철거냐 보존이냐를 놓고 찬반논쟁이 뜨겁다. 광주도시공사가 문화관광체육부에 매각을 전제로 지난 2011년 7월 22일 3차 경매를 통해 138억1165만5000원에 낙찰을 받았으나 예산확보가 이뤄지지 않아 광주도시공사가 매년 2억여원의 적자를 내가며 관리하고 있는 상태다. 광주시는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 일대에 ‘민주평화광장’ 조성계획 2단계 사업으로 전일빌딩을 철거한 뒤 잔디광장을 조성하고 지상 2층과 지하에 주차장을 건립할 방침이었다.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실시한 시민여론조사에서 60% 이상이 존치를 희망한 것으로 나타나 금남로 방향의 전일빌딩을 보존하고 뒤편 동부경찰서 방향을 철거해 녹지공간 또는 주차장을 조성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일빌딩의 이모저모와 전일빌딩과 광주일보, 전일빌딩과 5.18, 전일방송, 전일다방, 그리고 설계자 인터뷰, 최장수 근무자 등의 이야기를 통해 전일빌딩 반백년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전일빌딩의 주소는 금남로 1가 1번지다. 그러나 실제로는 1번지는 없고 1가 1-1번지(금남로변), 1-2번지(외환은행), 5-1번지(남쪽 교회자리), 6번지(구 학정서예원 자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전일빌딩은 모두 6차에 걸쳐 준공이 되었다. 1차는 1968년 12월 10일 외환은행 뒤편 지하 1층 지상 7층이 준공되었다. 옛 전남일보 윤전실이 지하에 있었고 1층에서 지사지국으로 신문을 실어 보냈다. 2층이 공무국, 3층이 편집국이었는데 편집국 바닥을 뚫어 도르래로 원고와 교정지를 올리고 내리고 하였다.
2차는 70년 8월 19일 학정서예원이 있던 별관 1층~7층이 준공되었다. 2층에는 전일체육관이 있어 전남도체육회 이재인씨가 체육관장을 맡았다. 3차, 4차는 금남로변 본관으로 74년 8월 27일 전일다방 위쪽 지하 1층~지상 10층이 완공됐다. 5차 (75.2,19)가 외환은행 위쪽 1층~7층, 마지막 6차(80.12.29 )가 옛날 교회자리 신관 지하 1층~10층이 완공돼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김남중 전 전남일보 회장의 친필로 새긴 전일밀딩 머릿돌


전일빌딩은 오무송·조동희씨가 설계 했으며 시공은 금광기업(고제철)이 맡았다. 68년에 시작해 80년에 준공되었으니 무려 12년이 걸린 대역사(?)였던 셈이다.
전일빌딩에는 초기에 국가기관도 입주했다. 남광주세무서가 3층에 있었고 이리국토관리청, 자원재생공사, 가스안전공사 사무실이 있었다. 교육보험광주지사를 짓기 전에는 5층에 교육보험지사와 지점이 있어 오전 10시께는 보험아줌마(?)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사무실은 4층 광주간호학원(윤창혁 원장)으로 1969년 입주해 2012년 이사했다. 2012까지 43년 동안 무려 12,000명의 간호조무사를 배출해 이 지역 의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별관에 있던 학정서예원(원장 이돈흥)은 1980년 3월 입주해 2011년 옮길 때까지 7만~8만여 명의 서예인을 길러냈다.
1층에는 고려증권, 서울증권, 유진증권 등 증권회사가 있었고 남양건설(회장 마형렬)도 72년 5월 입주해 95년 4월까지 23년간 몸담았다. 언론기관으로 광주일보, 연합통신과 경향신문호남지사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효성문화재단(이사장 김학중), 중앙합동법률사무소, 광주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등이 있었다.
전일다방은 74년 10월 15일 허가를 받아 수차례 주인이 바뀐다. 주인이 바뀔 때마나 사업자를 변경할 수 없어 당시 전남일보 총무부장이던 김광영 이름으로 허가를 받아 고광술을 거쳐 현재의 허귀덕으로 이어졌다. 전일다방은 한때 장사가 잘돼 이발관으로 사용하던 곳까지 영업을 했는데 주로 선을 보거나 은밀한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즐겨 찾았다.초창기 전일다방은 이른바 고급손님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또 갤러리가 없을 때 많은 화가들과 미술그룹이 작품전을 열었던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80년대 1도1사 정책에 따라 신문사가 통폐합됐을 때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지망생들이 광주일보 기자들을 만나던 장소이기도 했다.
전일빌딩의 전성기는 전남일보와 전일방송이 쌍나팔(?)을 불어대던 70,80년대다. 지프차에 파란 사기(社旗)를 달고 무소불위로 달렸다. 특히 이 시기는 전남매일신문사와 경쟁하던 시대로 양사가 12시 정각에 신문을 발행, 교환했는데 낙종과 특종으로 날마다 희비가 엇갈리는 피말리는 경쟁이 펼쳐졌다. 특종을 한 기자는 점심시간 데스크로부터 칭찬과 맥주포상을 받을 수 있지만 낙종한 사람은 되갚기 위해 이빨을 갈며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를 견지해야 했다.
넘봉미술관 개관기념 '의재허백련 회고전'


전일빌딩이 재산적 가치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시기는 1990년대 초로 평당 5천만원을 호가했다. 바닥 면적이 743.93평이니 땅값만 371억원에 이른다. 여기에 건축비를 포함하면 1천억원대의 건물이란 계산이 나온다. 당시 건물임대료만도 평당 216만원에 이르렀으며 공실이 없어 대기자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 2011년 경매에서는 광주도시공사에 138억 1165만원에 낙찰되었다. 전일실업이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에 들어가 1차 경매(2011년 4월 29일) 246억6634만9900원, 2차( 2011년 6월 10일) 172억6455만40000원에 응찰자가 없었고 3차 경매에서 낙찰되었다.
전일방송은 1971년 4월 24일 정오 1220KHZ로 개국해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KBS2 방송으로 개편되었다. 3507일 만에 소리를 멈췄다. ‘새롭고 알찬 전일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출발한 전일방송은 각종 생활정보와 건전한 오락프로그램으로 전남도민의 사랑을 받았다. 뉴스데스크,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가로수를 누비며 등의 인기프로와 VOC장학퀴즈, 최금홍이 진행한 심야의 클래식방송도 인기였다.

남봉기념관에 있는 활판인쇄기

외환은행 자리는 금남로 1가 1-2에 거쳐 159평이다. 현재 지하 1층에서부터 지상3층까지가 외환은행에서 관리하고 4층 이상의 지상권은 전일실업에 있었다. 때문에 전일빌딩을 철거하더라도 외환은행 문제는 따로 해결해야 한다. 외환은행이 사용하는 공간은 1층 187평, 2·3층 208평이다.
전일도서관은 1970년 4월 25일 호남최초의 사립공공도서관으로 문을 열어 1988년 남봉 사후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1988년 남봉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남봉 도서관에는 족보를 비롯하여 54,000여권의 장서를 소장했다. 족보는 조선대도서관으로 기증했고 나머지 서적은 전남대학교로 기증되었다.
전일도서관은 많은 장서뿐 아니라 70,80년대 이지역 학생들의 공부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공휴일에는 전일도서관에 입장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했다. 때문에 272석 규모로 시작했던 전일도서관은 70년 428석, 78년 939석, 81년 1,400석까지 늘렸다. 전일도서관을 거쳐 수많은 사람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했다.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판·검사 의사 가운데는 전일도서관에서 공부했다고 술회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자동차 이동도서관과 농어촌주민을 위한 분관도 운영되었다.
남봉미술관은 74년 전일빌딩 2층에 개관되었다가 76년 5층으로 옮겼다. 78년 삼양백화점에 두었다가 84년 다시 전일빌딩 3층으로 옮겨 88년 남봉문화재단 설립과 함께 남봉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74년 개관이래 이 지역 동서양화단의 거장들을 초대하면서 지역작가의 전시장으로 대관하였다. 개관기념전으로 의재 허백련 회고전이 열렸고 88년 남봉미술관으로 재개관하면서 오지호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이밖에도 남농1주기 추모전, 동·서양화 20인초대전 등 굵직한 전시회들이 잇따랐다.
1988년 3층에 개관한 남봉기념관은 언론인 김남중의 기념관이라기보다 호남언론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전남일보 창간 당시의 활판 인쇄기를 비롯 고인의 집필원고, 저서, 각종 서간문, 잡기 등을 전시하여 이 지방 언론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특히 기념관 입구에는 ‘문화의 내일의 위해 여기 이 터전을 닦다’라는 친필이 검은돌에 새겨져 있어 남봉의 굳은 신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전일빌딩 소유주가 바뀜으로서 남봉기념관은 지난 7월 18일 고인의 둘째 아들인 김종성이 경영하는 로케트전기 사옥 1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일빌딩에 1층에 있던 흉상은 로케트전기 사옥 정원에 옮겨졌다.
전일출판국은 1975년 11월 29일 문을 열었다. 전일다방 위쪽 2층에 사무실이 있었고 학정서예원쪽 건물 1층에서 인쇄했다. 초대 출판국장인 강봉규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독일제 하이델베르그 인쇄기를 도입, 이 지역 인쇄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많은 사람들은 전일빌딩 10층 옥상에 있던 해태광고탑도 잊지 못한다. 1989년부터 도심 한복판에 등장한 광고판에는 해태 브라보콘을 비롯한 해태제과의 제품들이 선전되었고 해태타이거즈의 명성과 함께 해태는 전라도사람들의 자긍심이기도 했다. 해태가 사라지면서 1996년 아시아컴 광고판이 등장해 뉴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광고시대가 열렸으나 이 또한 사세가 쇠락하면서 뉴스중단을 멈춘지 오래되었다.

전일빌딩 광주·전남언론의 탯자리

전일빌딩은 역사는 광주·전남언론의 탯자리다.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의 전일빌딩 시대가 시작된 것은 1962년이지만 이보다 앞서 일어판 광주일보와 국내 신문사상 최초의 가로쓰기를 단행했던 호남신문이 이곳 전일빌딩 자리에서 발행되었다.
호남신문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전남신보의 후신으로 1946년 제호를 호남신문으로 변경했는데 일반 경영방식에 의해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여운형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자 전남에서도 8월 17일 전남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최흥종)가 결성되었고 전남건준위가 일본인이 경영하던 전남신보(지령 12,270호 폐간)를 인수받아 전남신보라는 이름으로 타블로이드판 국한문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전남건준위 2대 위원장이던 박준규가 이은상에게 전남신보 발행을 요청해 11월 24일 발행을 임탁했다. 1947년 이은상이 여순사건 장병의 신원보증문제로 물러나자 전 전남지사 최영욱이 사장으로 취임, 배대판(현재의 신문크기)로 신문을 발행했다. 1950년 4월 최종섭(崔鍾燮) 사장이 취임했으나 7월 23일 광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호남신문은 자동 정간되었다.
일어판 광주일보와 호남신문을 발간할 당시의 사옥.


이후 10월 3일 광주가 수복되자 전 도지사 박철수 한규종 서두성 등 구 호남신문 시설을 이용하여 전남도 기관지 전남일보를 발간했다. 주필 고광표, 편집국장 김남중 등이다. 1951년 자유당이 창당되자 호남신문 사장이던 최종섭이 전남일보가 호남신문을 불법 접수했음을 타원해 12월 10일 호남신문을 복간하였다. 1952년 이은상이 다시 사장으로 취임해 경영일선에 나섰으나 경영난으로 1962년 경매에 넘겨진다. 이 경매에서 1억 5백만원을 제시한 전남일보 김남중이 전남매일 김일로를 제치고 낙찰을 받았다. 호남신문은 8월 31일자 지령 4783호를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마지막 사설에서 위민환은 “세상이 무상하여 본지가 창간을 본 후 18년, 그동안 숱한 영욕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나오던 본지가 오늘 다시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 마지막호를 내 보내지 않을 수 없음을 단장의 아픔과 함께 전해드리며”라고 고별인사를 썼다.
한편 전남일보는 이미 1952년 창간돼 10여년 동안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남신문의 사옥만 접수한 셈이며 이곳에 최초의 전일빌딩이 1968년 7층 규모로 지어진다. 전남일보는 1952년 창간 당시 충장로 1가 5번지 왕자관 건너 대한통신 전남지사 사옥에서 출발했다. 이곳에서 100일 보낸 뒤 금남로 5가로 대호다방자리(건물주 최동복)으로 옮겼다가 1955년 3월 6일 금남로 2가 옛 동구청자리 전일인서관으로 이전했다. 그 뒤 1958년 충장로 3가 화니문화관(천지빌딩자리)을 매입 이전했으며 1962년 금남로 1가 1번지 전일빌딩 시대를 열었다.
최초의 전일빌딩인 현 외환은행 뒤편 건물의 대각선 코너에 지역 미술사에 등장하는 ‘오센집’이 있었다. 오센집은 오씨가 운영하던 가게로 병술이나 명태포 등을 팔던 가게다. 이곳에 배동신, 강용운을 비롯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이 모여 문화와 예술을 얘기했던 곳이라고 알려진다.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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