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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3일(화요일)

배동신 화골(畵骨)’을 그렸던 천재 奇人 -세계적인 수채화가
2015. 10.12(월) 15:04확대축소
화골(畵骨)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없다. 그림의 뼈대라는 뜻이고 뼈대만 그렸지만 그 속에 혼이 담겨 있는 그림을 일컫는다. 더 쉽게 말하면 굵은 몇 개의 선으로 그려놓은 고지도(古地圖)가 산의 내부를 제시하는 것과 같다. 배동신 선생의 그림이 바로 마음의 눈으로 읽어야 할 철학적 사유의 그림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조야(粗野)하고 졸(拙)한 기법인데 이것이 바로 선인들이 말한 공교(工巧)한 것이 졸박한 것보다 못하다라는 것과 같다.
소펜하우어는 “천재란 지구를 삼켰다가 내뱉는 자”라고 했는데 배동신 선생이 바로 고승이 게송(偈頌) 읊듯 화안(畵眼)의 감상자들을 선경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광주출신의 수채화가 고(故) 배동신 화백의 작품이 해외 경매사이트에서 잇따라 최고가에 낙찰되는 등 고인의 작품에 컬렉터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배화백의 작품은 지난해 10월 대표작 중 하나인 「누드수채화」가 이베이의 온라인 경매를 통해 36만 달러(약 4억 원)에 판매된 데 이어 지난 7월에도 정물화 「복숭아」가 글로벌 마켓플레이스 ‘이베이’를 통해 18만 달러(약 2억 원)에 판매되었다.

「누드수채화」는 현재 일본 오사카에 머물고 있는 배화백의 가족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 비슷한 구도의 누드작품을 몇 점 더 남긴 것으로 알려져 컬렉터들을 중심으로 소재 파악 열기가 뜨겁다. 특히 한국 화가의 작품이 해외 경매사이트에서 거액에 낙찰된 경우가 거의 없어 배화백의 작품에 고가 행진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자못 기대가 크다.
사실 배동신 화백은 23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입상하면서 일찍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유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예쁜 그림’에 길들여졌던 한국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품격의 수채화에 대해‘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그린 그림’정도로 홀대한 나머지 우리 곁에 있었던 ‘위대한 천재’를 너무도 쓸쓸하게 보내버린 것이다. 그가 떠난 뒤에도 국내에서는 이렇다 할 재조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나부>


우리가 그를 서서히 잊어갈 무렵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배동신 열풍’이 한국인들, 특히 ‘동네 할아버지’정도로 생각했던 광주사람들, 애써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이 지역 작가들에게 엄청난 자책감과 충격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 입상 이후 그의 천재성이 다시 입증된 것은 1974년 도쿄의 화랑과 오사카 한국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였다.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일본 황실에서도 직접 전시장을 방문,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외국 귀빈들이 줄이어 관람한 가운데 주일 미국대사는 배화백에게 미국영주권을 제안할 정도로 파격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당시 일본미술협회장이던 구라다 혜이키치씨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화가의 그림이다.”라고 극찬했다. 또 일본 수채화 협회장인 후아이쇼우씨는 팸플릿에 실린 자화상을 액자에 넣어두고 공부한다는 말을 편지로 보내올 정도였다. 요즘 말로 ‘솔더 아웃’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주재 대사 윤탁씨는 일본 기자들이 “일본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세계적인 화가라고 극찬했다.”면서 “와, 크다. 무겁다. 대담하다. 다른 사람의 그림과는 다르다. 이것이야 말로 회화 자체의 창작이다.”라고 썼다고 술회했다.
이는 배동신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도식화된 그림이 아니라 사물의 정수(精髓)를 보여주었고 속필과 물빛의 강약조절을 통해 영혼의 색채, 아득한 빛이 되는 풍경과 사물의 속살을 들춰냈다. 5호짜리 「자화상」은 일본인 컬렉터가 날마다 전시장에 와서 사고 싶다고 했지만 ‘한국에 있어야 할 그림’이라고 가지고 돌아왔다고 전한다.
배동신이 이처럼 환대를 받은 것은 파리 화풍의 영향을 받고 일본 화풍을 받아들여 독특한 스타일의 수채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서양화풍의 화가이면서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추구해 한국 근현대 화단의 수채화 1인자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그는 유화의 밑그림으로 인식되던 수채화를 회화의 한 장르로 격상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일본을 떠나온 지 20여년 만에 가진 일본전시회를 갖게 된 사연은 잠시 뒤에 이어가기로 하자.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좌화상 (좌로부터 53년작, 72년작 )


1920년 광산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배동신 화백은 1920년 6월 16일 광주 광산구 송정동에서 배연원과 조옥진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이 한약방을 운영하다가 벌교로 이사하는 바람에 광주서석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벌교로 전학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금강산으로 가출했다. 운명이었을까? 이곳에서 박수근을 만난 것이다. 배동신이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지켜본 박수근이 재능을 발견하고 그림의 기초를 일러주었다. 이후 박수근의 소개로 평양에서 장이석을 만나게 되고 문학수의 권유로 동경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죽음을 각오한 밀항이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다. 1939년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 입학하여 1년여 동안 본격적으로 그림의 기초를 익혔다. 이무렵 동경에서 문학수와 이중섭을 만나 더욱 화가로서의 열정을 불태운다.
그러나 배동신의 일본생활은 비참함, 바로 그것이었다. 신문배달과 당구장일을 하면서도 몇 달째 하숙비를 못내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는 일본의 유명한 미술교수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가난한 식민지 국가의 청년과 일본 상류층의 딸과의 사랑은 처음부터‘이뤄질 수 없는’것이었지만 사랑의 위대한 힘은 그들을 갈라서지 못했다. 와타나베 마사에는 ‘기교도 드러나지 않고 선도 꾸임이 없으면서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는 배동신의 그림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들과의 사이에 첫째 아들 ‘용’이가 태어나고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며칠을 대문간에서 서성였으나 거절당했다.
배동신은 이 고난과 좌절의 시기에 중요한 기법 발견을 발견하게 된다. 수채화의 물맛과 자연스런 번짐에서 영혼의 번짐, 수채화 순수기법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무등산


‘조선의 젊은 천재 우에노에서 꽃피다’

1943년 신인 미술가의 등용문인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람회에 「초상」을 출품해 입선을 차지하면서 ‘동경의 에뜨랑제’배동신은 일본화단에 화려하게 등극했다. 자유미술창작가협 심사위원진은 그의 입선을 결정하는데 며칠 동안의 고민이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일본의 언론에는 ‘조선의 젊은 천재 우에노에서 꽃피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었다. 한국유학생 환영회 자리에서 이중섭은 아리랑을 불러 입상과 등단을 축하했다. 당시 유학생은 이중섭 강용운 양수아 박고석 신상옥 등 20여 명이었다
고화흠씨(전 원광대 미대학장)는 생전 “당시는 물감과 화구가 크게 부족하여 서로 남는 것을 바꿔서 쓸 정도로 어려웠고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만나지 못했는데 배동신의 입상을 계기로 결집했었다.”회고한 바 있다.

배동신은 일본이 패전하자 어렵게 배표를 구해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와 두 아이와 함께 배 밑창에 숨어 한국으로 나왔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그는 나주 금천에서 과수원을 하던 형의 집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즐겨 그린 그림이 나주 금성산을 비롯한 남도의 산하들이다. 해방 직후 한국화단은 친일과 반일, 친공과 반공으로 나뉘어 이념분쟁이 극심했다. 한국미술계는 선전 이후 새로운 미술계를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설되었다. 미술계는 이때 친일문제와 색채시비가 일기도 했다. 혼란의 와중에 배동신은 유학시절의 초기작품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런 가운데서도 당시 광주·전남화단은 20명이 넘는 일본유학파의 활동으로 상당히 활발한 양상을 보였다. 1945년 12월 중앙초등학교 강당에서 동서양화 합동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듬해 1946년 목포에서는 목포미술원전이 열렸는가하면 태평양미술학교 출신들이 녹영회를 창립, 광주에서 창립전을 갖기도 했다.
1946년 배동신은 서중학교 미술교사로 초빙되었다. 당시에는 학교 체제가 갖춰지지 않아 서중에서 욱고녀(전남여고)로, 또 광주여중으로 얼마든지 옮겨 다녔다.
그는 항상 가식이 없고 자유분방한 차림으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작업복 바지를 입고 교실의 문이 아닌 창문을 뛰어넘어 들어오는 일본유학파 미술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선망의 로맨티스트였다.
광주여고에서는 개교기념일에 올릴 연극 무대의 그림을 맡았는데 화우인 김인규가 놀러왔다가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3개월여 만에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그가 교탁에서 남긴 고별사는 한동안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전한다. 그 유명한 고별사가 “너희들이 싫어하니 갈란다.”라는 한 마디었다.
배동신은 1947년 광주도서관에서 광주·전남에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유화로는 남도의 뼈대를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유학시절에 익힌 습기 머문 수채화를 선보였다. 기름기가 제거된 맑은 수채화만이 남도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과


그러나 일본에서의 화려한 평가와는 달리 광주의 첫 전시회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수채화도 그림이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저렇게 묽은 물감으로 죽죽 그어대는 것이 그림이냐? 애들 장난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광주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유화를 최고로 생각했던 것. 그러나 배동신은 결코 기가 죽지 않았다.
“이놈들아 그림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이냐? 너희들은 잠깐 피었다 스러지는 저 아름다운 노을을 사고 팔 수 있느냐? 저 깊고 푸르게 우렁우렁 울어대는 무등산의 울음소리를 사고 팔 수 있느냐? 자연이란, 아름다움이란, 풍광의 영혼이란, 개인의 소유가 아닌데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이후 배동신은 순천사범학교를 거쳐 이듬해 진도중학교 교사로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기인적 삶은 여전했다. 진도중학교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세운 학교로 배동신이 최초의 미술교사다. 이사장인 손재형이 남농 허건에게 미술교사 추천을 의뢰했는데 허건이 조선대 미술교수이던 오지호 선생에게 부탁해 이뤄진 것.
진도중학교에는 이후 조각가 김영중-서양화가 오승우-서양화가 조규일로 이어지는 탄탄한 미술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어느 날 학교에 나오지 않아 찾아가보니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시궁창에 빠졌던 것. ‘단벌신사’이었기에 옷이 없어 아내의 고쟁이를 입고 앉아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인 아내 와다나베는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험한 일을 하면서도 일본의 잡지 ‘문예춘추’를 주문해주는 등 지극 정성을 다했다. 학생들이 땔감도 해다 주고 학부모들이 간장이나 된장을 가져다주는 등 따스한 보살핌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했다.
“진도에서 1년 반 정도 근무하셨는데, 아마 배동신 선생으로서는 한 곳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곳입니다.”
생전 배동신과 막역하게 지냈던 서양화가 조규일(82)화백의 회고담이다. 배동신과 특별히 가까이 지냈던 것은 훗날 그가 진도중 미술교사로 근무했다는 인연도 있지만 기본에 충실했던 후배를 눈여겨 보았던것. 가난한 가운에서도 충장로 4가 대한다방 전시회 때 전시장에 나와 국전 출품작 ‘옥매산’(50호)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해주었고 그림도 한점 사주었다. 배동신은 진도에서 나와 영산포에서 잠깐 교편을 잡다가 광주로 올라왔다. 특별히 갈 곳이 없었던 그는 ‘도깨비대학’으로 불리던 동명동 강용운 선생의 집에 얹혀살았다.‘도깨비 대학’으로 불린 강용운의 집은 김인규 양수아 등 일본 유학파를 비롯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붙여진 것이다.
어느 해 여름에는 충장파출소장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 그날만은 제발 시내로 나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박정희대통령이 광주에 오는 날인데 술을 먹고 충장로에서 객기라도 부리는 날에는 입장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오센집’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던 실비집으로 지금의 전일빌딩 외환은행 후문 바로 앞에 있는 김밥집 자리다. 가난했던 예술인들이 모여 콩나물에 막걸리를 먹던 집인데 양수아의 18번은 ‘빨간마후라’였고 배동신은 ‘눈물에 연기 나네’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가곡을 자주 불렀다. (조규일 회고)
배동신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예술인 가운데 가장 술값을 잘 낸 사람은 박상섭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얻어만 먹는 사람, 어떤 사람은 통금 직전에 작은 돈을 내는 사람 등이 있었는데 오센집의 수수께끼 하나가 “오늘은 누가 술값을 낼까?”였다. 가장 확률이 높은 답은 박상섭이었다.
바로 이 무렵이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이 전위주의자로서, 그리고 서구의 보조에 휘말려 최신식 스타일을 추구했던 시기다. 1950년대 후반 잘 다듬어진 그림을 배격하면서 강렬한 추상주의와 기하학적 추상주의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1960년대 초 축소주의 및 대중예술과 함께 하는 단색화법으로 이어졌다.
배동신이 이처럼 ‘대책 없는 예술’에 취해 있을 때 마사에는 눈물을 머금고 귀국을 결정하게 된다. 도저히 배동신을 믿고 살다가는 점점 커가는 자식들의 교육이 걱정이었다. 사실 그때 마사에는 과일행상과 날품팔이를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더러는 공사판에도 나가 일했기 때문에 손을 잡을 수 없었을 정도였다. 배동신은 그것이 슬퍼서 술을 마셨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 지쳐 일본행을 결심하게 된다. 아이들의 옷을 챙기다가 가와바타 유학시절의 그림보다 더 빛나는 수채화 7점을 챙겨들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대목은 돈이 없어 부산에서 배를 타고 귀국했다는 설, 비행기를 타고 하네다공항으로 갔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음)
두 아들과 칭얼대는 어린 딸을 등에 업은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날 하네다 공항에서는 큰 실랑이가 있었다. 세관원이 마사에의 짐 속에 들어 있는 배동신의 그림을 보고 미술품을 훔쳐서 위장반입하려는 것으로 생각해 닥달하고 있었던 것. 한국미술협회에 전화까지 걸어 확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세관원이 배동신의 그림에 집착을 했던 것은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본 적이 없고 ‘국보급 그림’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 일로 하네다 공항은 기자들의 취재경쟁으로 난리가 아니었다. 사건이 일본에서 알려지면서 여러 화상들이 그림을 사려고 찾아왔으나 마사에는 남편의 그림의 머지않아 유명해 질 것으로 생각하고 판매를 거절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에서도 배동신에 대한 관심이 잠깐 일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마사에는 훗날 삽화를 배워 근근이 살았다고 전한다.
마사에가 떠나버린 뒤 배동신은 그야말로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사에 대한 연민과 등에서 칭얼대던 어린 딸, 두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그를 더욱 절망과 나락으로 내몰았다. 그럴 때마다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동전을 넣고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짱, 마짱” 와타나베 마사에를 부르는 소리는 처절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 차가웠다. 그때마다 술을 마시며 제목도 모르는 가곡을 불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일본 유학시절 마사에 의 누드를 나무판에 그린 유화작품과 그녀의 모습을 새긴 판화 1점을 꺼내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다가 그리움과 굶주림, 외로움으로 날마다 술에 빠져 급성간염으로 쓰러져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때 달려온 여인이 살레시오 여고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전남여고 시절의 미술부 제자 김영규였다. 조대 음악과 박기석교수로부터 입원소식 듣고 달려와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배동신은 아름답고 가식이 없는 해맑은 소년의 모습이다. 낡은 청바지에 유리창을 넘어 다니고 문교부장학관이 올 때도 교탁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가르치던 선생님. 김인규는 그런 선생님을 보면서 자신도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피아노를 공부하여 서울대 음대에 진학해 살레시오 여고 교사로 돌아왔던 것. 그녀는 배동신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위대한 천재가 쓰러질 것 같은 생각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배동신의 나이 38세였다. 신혼살림은 광주여고 옆 2층집에 차렸는데 1층은 피아노 교습소로. 2층은 살림방과 화실이 두었다. 김인규의 피아노교습소는 광주에서 가장 많은 수강생들이 몰렸던 학원이었다. 배동신 화실에는 광주상고생이던 이근표와 여학생 한 두명이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어느 날 배동신은 1939년 일본에 있을 때 마사에를 그렸던 유화 1점(33 20㎝)과 목판화 1점을 절친했던 친구 서태관에게 주어버렸다. 새로 결혼한 마당에 다른 여자의 누드 그림을 간직할 수 없었던 것. 이 그림은 훗날 30년 제자였던 서양화가 이근표(63)에게 전해졌으며 타계하기 얼마 전인 2000년대 초 부인이 보는 앞에서 사인을 했다.
그가 재혼하고 몇 년이 지난 뒤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 마사에가 귀국할 당시 공항에서 취재했던 잡지사 기자가 전시를 주선해 일본전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배동신은 수채화 3점을 그려 보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40여점을 더 그려서 1963년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발표했다. 이 소식은 NHK에서‘이중섭과 유학했던 천재’라고 소개하면서 일본 화단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일본전을 가진 것은 그보다 10년이나 뒤인 1974년에야 이뤄졌다. 이는 배동신이 그림이 머릿속에서 완전한 구상이 끝나기 전에는 좀처럼 붓을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번민 속에서도 그림을 한 점씩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화는 생리에 맞지 않고 계산적이고 의도적이어서 자연스럽지 않았다. 역시 물맛이 스미고 번지는 수채화라야 마음이 설레이었다. 일본에서는 애타게 기다렸지만 배동신은 수채화의 본질을 찾아서 십년을 써 버려던 것이다.
일본유학시절에도 주문 받았던 그림을 3년이나 그려주지 않았다가 곤란에 처한 적도 있었다.
배동신은 일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일본의 전설적인 화가 호쿠사이와 비교되곤 한다. 유학시절 지인이 배동신에게 수탉 한 마리를 그려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다. 배동신은 일주일 후에 오라, 한 달 후에 오라, 두달 후에 오라. 6개월 후에 오라 등으로 계속 미루다가 3년이 흘러 버린 것. 화가 지인이 지금 당장 그려내라고 다그치자 순식간에 그렸는데 너무나 걸작이었다.

그러나 배동신이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화실 벽에는 수탉 그림 수십 점이 걸려 있었다.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수백 점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렸으며 술 마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작업에 몰입했다. 그는 수채화를 그릴 때 커다란 동양화 붓을 이용해 직접적이며 빠른 붓질로 검객이 춤을 추듯 영혼의 세계를 화면에 인양해 냈던 것이다.
배동신이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은 매우 독특했다고 알려진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물론 아내마저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거나 얘기를 하다가도 화상(畵像)이 잡히면 작업실로 뛰어올라와 괴성을 질러가며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그림을 그리며 나르시서스를 느꼈으며 그림을 그리 뒤에는 지극히 고요한 선(禪)의 경지에 들어가곤 했다.

1974년 일본전에서 ‘수채화의 거장’평가

1974년 일본 동경 미술가 화랑과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전은 그야말로 일본 미술계를 사로잡았으며 ‘수채화의 거장’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파리화풍에서 영향을 받고 일본 화풍을 결합해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창출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인터뷰에서 “유화가 육식에 비유될 수 있다면 수채화는 채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유화가 동적이고 극적인 감동을 연출한다면 수채화는 상큼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는 의미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1973년 신동아 8월호에서 “한국수채화의 전통은 과거에 이인성 손일봉 이경희 등 경북출신들이 이어왔다. 그러나 배동신의 출현으로 한국수채화의 영역을 넓히고 중앙집권적 문화에 쐐기를 박았다.”고 평하면서 “대상의 본질을 찌른 그의 시각의 정확성은 세부적 묘사를 생략한 대담한 구도 속에 여실히 실현해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초기에는 루오의 세계를 깊이 탐닉

배동신의 작품세계를 시대별로 나눠보면 대체적으로 일본유학을 떠나 1943년 자유창작가협회전에 입상한 시기다. 이 무렵 그는 루오의 그림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오는 파리 출신으로 H.마티스, P.피카소 등과 함께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작가다. 집이 가난해 14세 때부터 공예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스테인 드 글라스 견습공으로 일했고 수채화나 과슈화(고무 수채화)를 주로 그렸다. 주제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보려는 기독교적 엄숙감, 순수한 회화성을 강조한 그림을 그렸다. 배동신은 일본에서 루오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하루 종일 미술관에서 그림을 관람하고 스케치 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이근표 증언) .
실제로 배동신의 작품 속에는 루오나 세잔느의 영향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치열한정신으로 배동신만의 조형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배동신을 야수파의 범주에 넣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배동신의 누드는 여인의 육체가 아닌 거대한 산”

1945~1977년 까지는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파리 풍과 일본풍을 넘나들며 자유분방하면서도 한국수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인물과 풍경, 정물 등을 두루 그렸으며 뛰어난 소묘력을 과시했다. 인체의 뼈와 볼륨은 소묘력에서 나오는데 빠른 운필과 순발력, 경쾌함과 장중함이 어우러진 콘트라스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자화상은 대담하고 거침없는 선과 굳게 다문 입언저리 묘사가 독특하다. 흑백톤을 대비시킨 검은 뿔태 안경 속의 시선은 일본화단을 감동으로 뒤흔들었으며 누드작품은 세계화단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볼륨감을 드러냈다. 그의 누드는 여인의 육체가 아닌 거대한 산이며 자유분방한 디포르메가 두드러졌다.
이 무렵 가장 많이 그린 풍경이 무등산과 목포항, 금성산 등이며 배동신이 무등산은 커다란 붓을 사용해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산을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했으며 황갈색으로 그린 그의 무등산은 완벽한 조형감을 보여주었다. 세잔느가 빅토리산을 흠모했듯이 배동신은 무등산을 사랑했다.
배동신에게는 그림을 그릴 때 특별한 버릇이 있었다. 하나는 누구도 화실에 들이지 않았으며 괴성을 지르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똑 같은 소재만 그리되 장소도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그는 생전 무등산과 나주 금성산, 삼학도 등을 즐겨 그렸는데 무등산은 광주MBC 근처의 언덕에, 삼학도 그림의 경우 항상 화장실 옆에 이젤을 내려놓았다. 정물은 사과 복숭아 뿐인데 허름한 나무 쟁반에 5개나 6개를 올려놓고 그렸다는데 사과가 썩을때까지 그리지 못하고 바라만 본 적도 있다.

산을 연상시키는 「裸婦」 대표작

후반기는 서울에서 여수로 내려온 뒤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광주를 떠나 서울에서 활동 하다가 1989년 여수로 내려와 수채화 작업에 열중했다. 이 무렵에 그는 여수항을 중심으로 한 풍경과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나부(裸婦)」를 많이 그렸다. 옆으로 길게 누운 여인의 누드를 그린 것으로 대담한 구도로 두상과 다리를 자르고 부분을 강조한 다이나믹한 작품이다. 이는 수채화 작가로서도 회화의 조형적 가치와 창작의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한 독창적 세계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나부(裸婦)」는 마치 무등산처럼 펑퍼짐하고 이상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인체를 마치 산을 볼 때처럼 같은 조형성으로 다루고 있다. 꺾이고 접힌 흔적과 긁어내고 문지른 표면 효과가 곧 인체를 통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조형성은 배동신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회화적 본질을 느끼게 해준다.
한 미술비평가는 “배동신은 그림에 대하여 단순하고 담백하며 긴장된 몰입을 하는 작가이다. 그는 권위와 금전과 소유욕을 버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미술평론가 Perry A. Bialor 는 1990년 3월 29일자 코리아 헤럴드 미술기사에서 “배동신은 후쿠사이와 같은 그림에 대한 광적 집념의 소유자”라고 쓴 바 있다.
왜 하필 배동신이 고향도 아닌 여수로 갔을까? 배동신은 평소 바다를 좋아했는데 목포나 군산의 바다보다 물이 맑은 여수를 좋아해 말년을 보내기 위해 내려왔다는 것이 조규일 화백의 증언이다.
그는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예술의 유행에 편승하지 못하고 지역작가로 살았다. 1978년 구상전 회원인 최영림 박고석 등이 상경을 권유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1989년 여수로 내려와 그야말로 초탈의 경지에서 예술혼을 일구었다. 그는 물질적 소유를 초월한 총체적 인격의 소유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작업은 ‘순수한 예술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 주로 그린 그림이 피안의 항구, 산 등인데 그림의 주제는 어김없이 그리움이었다. 그는 일본의 부인 마사에를 잊기 위해 누드그림까지 친구에게 줘버렸지만 늙은 나이에도 그를 잊지 못해 오동도의 밤바다에서 술을 마시며 전화를 걸곤 했다. (당시 KBS 순천방송 부장이던 김재규 전 광주 영어방송사장의 회고)
미술평론가 兪在奇(미술평론가·대학교수)는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를 모두 아우르는 그는 평생 수채화의 꿈을 일순간도 놓지 않았다. 남도의 미항 여수에서 자연이 주는 원초적 아름다움, 답답한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던 풋풋하게 다가오는 단순함에 그는 매료되어 더욱 생에 마지막 붓질을 마음껏 발산하였다. 마치 하루의 황혼이 가장 아름다운 세상의 하루를 채색하듯이 인생의 석양을 과로로 눕지 않고 호흡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예술의 혼기를 집중하였다.”고 쓰고 있다.
또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배동신을 회고하는 글에서 “1945년 이후 대구의 이인성과 서울에 있는 몇몇 화가 들이 중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수채화를 그렸는데 배동신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유럽으로부터 새로이 받아들인 수채화 기법과 정신을 공부하고 천성이 깨끗하고 물욕을 모르는 이른바 에꼴드 파리식의 예술가였다. 직설적이고 대담한 구도와 속도감 있는 붓의 움직임은 그의 작품의 매력의 원천이다.”고 평하기 했다.

불멸의 화가 배동신

그의 대표작은 「항구의 배」와 「자화상」 「조선장」 「목포항구」 「무등산」 「여인-인물」 시리즈 등이 있는데 주요작품은 일본 동경 우에오미술관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1974년 일본전이 끝난 뒤 가지고 돌아온 「자화상」(1953년, 33×20㎝) 한국의 드로잉 걸작으로 평가받은「드로잉」작품 (1985년작, 3호크기) 드로잉걸작, 르몽드지에 소개된 누드 드로잉(1959년 64×45㎝) 「복숭아」(1961년작, 62×40㎝) 「무등산」(1963년작 54×40㎝) 「붉은 옷을 입은 여인」(1964년작 52×40㎝) 「나부」(1978년작, 40×64㎝) 등이다.
그가 보여준 그림의 미학은 순간의 감응으로 빚어낸 조형적 상상력, 여기에 수채화 특유의 물맛을 살려냄으로써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선과 획을 긋는 터치나 루벤스의 풍만한 뎃생기법, 여기에 루오와 상통하는 혼(魂), 빈센트 반 고흐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천재적 기질과 강한 자의식 등이 혼재된 천재화가였던 셈이다.
그의 그림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찾아낼 수 없는 깊은 메타포가 숨겨 있었다. 대상의 본질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내면의 존재의지를 표현했다. 이를테면 풍만한 여인의 그림에서는 한 많은 어머니의 세월, 그리고 모정을 남김없이 내포하고 있다.
불교적 동양정신이 살아 숨쉬며 무엇보다도 중복되고 겹쳐진 선들이 안개처럼 되살아나며 뿜어내는 영혼의 언어, 커다란 젖가슴과 두꺼운 허벅지를 드러내놓은 무등산과도 같은 누드화, 테이블 위의 접시에 놓인 사과와 복숭아…. 그의 색채는 대개 침묵하고 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갈색과 자줏색, 노랑과 빨강 등은 다른 작가의 색채와는 크게 다르다. 또한 그는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동네나 만나는 사람들, 시장어귀에서 언제나 살 수 있는 소재들을 친구삼아 대화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피사체가 응답해주지 않을 때는 괴성을 지르며 윽박지르기도 했고 웃음으로 화답할 때 소년처럼 해맑게 그려주었던 그 순수한 영혼. 어쩌면 전생이 화가였을 것이고 하늘에서 화가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배동신미술관 건립 움직임 일어

한편, 배동신 선생이 국제적인 미술품경매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탄생 100주년이 5년여 앞으로 다가오는 시점에서 광주지역 미술애호가, 화가들을 중심으로 배동신 미술관 건립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배동신 마니아 최효삼, 정연태, 치과 의사 조상훈 등과 제자인 이근표 등이 최근 출생지 조사를 마쳤으며 이후 거주지인 양림동과 서석동 일대의 집터에 대한 조사도 시작했다.
앞으로 작품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전문가 초청 심포지엄을 개최할 계획이며 지방자치단체와도 협의해가면서 미술관건립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한국화의 의재 허백련, 서양화의 오지호 선생이 오래전 광주를 대표하는 미술인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지만 배동신 선생이 결코 이들과 비견해서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문화통 특집팀>

- 주요연보 -

1920년 광주 광산구 송정동 출생(6월 16일생. 부 배연원, 모 조옥진)
1927년 광주서석초등학교 입학
1932년 여수 서 초등학교 졸업, 금강산서 박수근과 조우, 그림지도 받음
1936년 금강산에서 박수근에게 사사, 문학수 장리석과 교제
1937년 일본 유학(일본소화 의전에 재학 중인 이경석의 도움으로)
1939년 일본 가와바타(川端)화학교 양화과 입학
1940년 문학수·이중섭과 교제
1943년 제 7회 일본‘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입상, 정회원, 회원전 참가
1945년 귀국하여 나주 금천에 정착, 광주서중 전남여고 교사 (49년까지)
1947년 광주에서 제1회 개인전 가짐
1968년 ‘수채화 창작가협회 창립전’(초대회장)
1970년 ‘황토회’ 창립전 참가
1972년 구상전 추대회원
1974년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1975년 한국수채화협회 창립 초대회장
1977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미술대상전 초대
1978년 제 1회 중앙미술대상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79년 한국현대미술 대표작가 100인전 출품, ‘93 배동신 화집’발간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1979년 한국현대미술 1950년대 서양화전(국립현대미술관)
1981년 한국현대미술 81선(국립현대미술관)
1983년 한국현대미술 초대전(88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1984년 한국수채화초대전(한국문예진흥원), KBS-TV미술관 방영(유준상 해설)
1985년 ‘한국현대미술 40년전’(국립현대미술관)
1988년 서울올림픽기념 수채화전
1989년 광주전남미술50년전(조대미술관)
1993년 한국원로작가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95년 남도미술 100년 선집(맥출판산)
1996년 한국누드미술 80년전(예술의 전당)
1997년 오지호미술상수상, 호남미술100인전(조흥문화관)
1998년 광주시립미술관 ‘배동신수채화 60년전’기획초대전
2000년 보관문화훈장
2008년 여수에서 별세
2009년 1주기 추모전(여수 오동도 동백관)

개인전
1947년 제 1회 개인전(광주도서관)
1973년 제 20회 개인전(서울신문회관 전시장)
1974년 일본 동경 미술가 화랑(9월)
오사카 한국화랑 개인전
1976년 제 23회 개인전(회화랑)
1978년 제 24회 개인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82년 제 25회 수채화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89년 자화상 시리즈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98년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광주시립미술관)
자화상 53년- 1974년 일본전시작품 33=20
드로잉- 1985년작-이근표 3호정도
드로잉걸작- 1970년, 한국의 드로잉의 대표작 4호크기
누드드로잉- 1959년 64-45 르몽드지
복숭아- 1961년작 62-40
무등산 - 1963년 54-40센티
적의를 입은 여인
1964년도 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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