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진 : 물레방식을 이용한 비정형의 파격미
| 2011. 09.30(금) 14:17 |   |
이광진의 도자기는 현대라는 시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시간을 소급하여 선대의 도공들이 해왔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여전히 옛 방식대로 물레를 돌려 그릇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쓰임새가 분명한 그릇으로서의 용도에 맞는 형태를 성형하고 그 표면에 회화적인 장식을 보태는 정도에 그친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전통에 대한 참다운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 도자기가 그릇이라는 본연의 용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작품, 즉 도조의 개념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전통적인 기법을 고수한다는 것은 시대감각에 뒤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릇으로서의 효용성을 떠난 도자기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작업은 이와 같은 본원적인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인 셈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미학개념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한국적인 그릇으로서의 뿌리는 변할 수 없고 또 변해서도 안 된다는 시각이다.
설령 진부하다는 평을 듣더라도 전통을 고수함으로써 쇠퇴하고 있는 물레방식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유행하는 도조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물레방식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물레를 통해 만들어지는 그릇은 고유의 형태가 있게 마련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전통의 계승이라는 목표에 부합한다. 실제로 그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물레를 돌려 만드는 형태는 제한적이다. 그러기에 표면장식 또는 부분적인 변형이라는 방식으로 그 자신만의 개별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의 작품은 항아리 형태에 집중되고 있다. 작게는 20-30센티미터에서 40-50센티미터에 이르는 대형작품까지 다양한 크기를 아우른다. 그리고 입 부분과 굽 부분의 크기 및 형태에 변화를 줌으로써 제한된 형태에서나마 다양한 모양이 나오고 있다. 몇 종류의 기형에서 만들어지는 다양성이란 음악에서 흔히 쓰이는 변주형식, 즉 항아리라는 특정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그로부터 다채로운 조형적인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다양한 모양의 항아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조형적인 변주는 비례에 관한 모색이다.
어쩌면 도자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례와의 투쟁인지 모른다. 물론 용도에 따른 형태라든가 표면장식, 즉 유약의 종류에 따라 얼마든지 다채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릇의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전체를 장악하고 함축하는 비례를 찾아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입과 굽의 변화를 통해 다양하면서도 저마다 아름다운 최적의 형태미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전통적인 도예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어느 면에서 전통적인 방식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란 바로 개별적인 비례를 찾아내는 일이 아닌가.
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도 포만감을 줄 만큼 넉넉하고 풍부한 볼륨을 지향한다. 살집이 큰 중년의 아낙네를 연상시키는 넉넉함과 너그러움, 안정감 그리고 느긋함이 있다. 이러한 인상은 그의 작품이 일정한 크기를 넘어서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고 보면 그 쓰임새에 집착하기보다는 작품으로서의 시각적인 충족감 또는 아름다움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용도로든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데 불편이 없다. 그릇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까닭이다. 다만 전체적으로 작품의 크기가 큼으로써 용도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사뭇 의도적인 것으로써 일단 그 자신의 창작의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크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지 그가 만든 항아리는 창의성을 중시하는 형태미다. 물론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대호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는 크기라는 점에서는 완상적인 가치가 크다. 다시 말해 실용성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앞서 창작도예로서의 가치를 평가받는 데 적절한 크기라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물레작업이 가지고 있는 성형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일정한 크기 이상은 기술적인 요구가 선결과제이다. 일단 대호의 경우 물레작업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작가의 기술적인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40-50센티미터의 대호를 자유롭게 만들어 낸다는 것은 물레작업의 숙련도를 말해준다. 이렇듯이 그의 작업은 물레작업이라는 굳건한 기반위에서 출발한다. 대호를 다루는 숙련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창의적인 형태미와 유약을 통한 표면장식에서 개별적인 세계를 추구한 다. 어쩌면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창의성을 살릴 수 있는 여지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형태미에 대한 강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릇으로서의 고유의 기능성과 물레작업이 가지고 있는 표현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그 형태는 그리 자유롭지 못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조건 위에서 창의성을 반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器形기형은 물레방식에 따르되 그 형태에 변주를 가함으로써 비정형의 자유로움을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가 만드는 그릇은 기본적으로 항아리 형태인데, 몸통부분에 요철기법을 도입함으로써 비정형의 형태가 된다. 몸통부분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奇形기형의 그릇이 되고 있다. 이는 물레작업과 병행하여 몸통부분을 안쪽에서 밀어내 부분적으로 봉긋하게 돌출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물레를 이용한 성형작업은 완전한 대칭이라는 정형화된 형태이다. 그런데 몸통부분에 변형을 줌으로써 비정형의 형태가 되면서 미묘한 시각적인 긴장 및 쾌감이 따르게 된다. 이는 일종의 파격인 셈인데, 그로부터 발생하는 미적 쾌감은 정형의 형태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다. 완전한 형태의 그 단아함과 엄숙함 그리고 고요함을 일시에 깨뜨리는 파격의 미란 바로 이런 것임을 웅변한다.
이때 봉긋봉긋하게 솟아나는 이미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정한 크기 및 간격에 의한 리듬을 형성하는가 하면, 일체의 틀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는 자유로운 구성을 따르기도 한다. 이런 모양은, 우스운 착상이지만 도깨비 방망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격식을 벗어난 조형의 변주는 그릇의 형태미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제공한다. 정형화된 그릇의 엄숙성을 깨뜨렸을 때 예기치 못한 의외의 상황에서 맛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동질의 감정 및 정신의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항아리는 그 외형에서 또 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른 유약기법을 도입, 새로운 문양을 실현하고 있다. 태토 위에 유약을 입히는 기법, 즉 시유하는 방법 자체를 새롭게 개발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의 독창성이 발현한다. 전통적인 시유방법에서는 유약을 바르거나 입히는 방식이었던데 반해 그의 경우에는 서양회화의 콜라주기법을 원용하고 있다. 종이를 원하는 형태로 찢어 유약을 묻힌 다음 초벌구이를 마친 그릇의 표면위에 붙이는 방식이다. 이런 방법으로 백토, 색토, 자토, 철분백토라는 네 가지 유약을 겹쳐 시유함으로써 마치 현대회화와 같은 문양을 만들어내고 있다. 백토는 흰 빛깔을, 색토는 푸른 빛깔을, 자토는 황토빛깔을, 철분백토는 점점이 박힌 쇠의 녹물빛깔을 나타낸다. 이들 서로 다른 빛깔의 유약이 그의 의도에 따라 구성되면서 아름다운 추상의 세계를 연출한다.
그렇다. 도자기 표면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아주 독특하고 멋진 추상회화로서 손색없다. 네 차례나 겹쳐 붙이는 방식으로 인해 표면은 유약 두께만큼의 질감이 생긴다. 다시 말해 종이에 바른 유약을 붙일 때마다. 일정한 두께의 유약 층이 형성되고 있다. 이는 또 다른 표정의 변화, 즉 아주 미세한 두께의 입체적인 효과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완성된 작품 위에 또 한 차례의 시유를 하고 다시 가마에 넣어 다시 한 번 구움으로써 마치 농익은 과일과 같은 독특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약을 입힌 작품에 다시 시유를 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재벌 시유를 함으로써 이처럼 새로운 이미지의 표면질감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유약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릇에서 유약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그가 강구해낸 시유방법은 현대도자기의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다. 이러한 결과는 전통적인 그릇의 영역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창의적인 열정의 산물이다. 주어진 조건에만 순응하면서 전통의 굴레에 안주하였다면 이와 같은 참신한 이미지의 새로운 시유방법을 강구하지 못했으리라.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물레방식의 그릇이라는 정형화된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현대라는 시제 및 현대감각에 부응하는 새로운 표현방식에 대한 부단한 탐색이야말로 진정한 창작의 윤리성이다. 그는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물레방식에서도 여전히 새로운 조형의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새로운 제안은 그 자신의 창작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일임과 동시에 전통도예가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모범적인 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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