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동 : 한의학과 그림의 만남
| 2011. 09.30(금) 13:33 |   |
이제까지 서양에서 대체의학으로만 여겨져 온 동양의학이 서구 현대의학계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은 이미 예견돼온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의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아직 부족한 상태이다. 이는 학문으로서의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대학에서 한의학이 정규학문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한 이래 신비주의에 갇혀 있던 한의학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때를 맞춰 한의학을 우리들 실생활에 좀더 밀접하게 접근시킬 수 있는 노력이 병행되고 있다. 중견 한국화가인 조현동이 전통의학인
한의학과 관련한 제재를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것도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백록당한의원 김영권박사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작업은 화가에게는 낯설고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도 목적화이기에 순수창작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림이 목적화가 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종교화도 목적화이지만 예술적인 가치에 대한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듯이 거기에 화가의 열정과 혼이 담기면 문제는 없다. 다시 말해 목적화일지라도 창작화에 버금가는 예술성을 획득하면 회화로서의 존재가치가 손상되는 일은 없다.
실제로 한의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혈류도를 회화적인 이미지로 재구성한 작품의 경우 시각적으로 훨씬 아름답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선묘로만 묘사한 혈류도가 마치 일반적인 그림을 보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일단 목적한 바는 성공적인 셈이다. 전후좌우에서 그린 네 폭의 혈류도를 보면 회화적인 장식성이라는 문제에서도 아주 효과적인 결과를 얻고 있다. 이와 같은 혈류도라면 일반
인들에게도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사계절 열두 달을 상징하는 열두 폭의 또 다른 형식의 그림은 한의학과 관련한 기물들을 중심으로 계절에 맞는 꽃을 배치함으로써 정물화의 일반적인 형식에 근접하고 있다. 약연, 찜질기, 약탕관, 저울, 약 짜는 틀, 왕진용 약상자, 침통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련, 나리, 연꽃, 나팔꽃, 엉겅퀴, 초용담, 민들레, 함박꽃, 매화 따위의 꽃들이 함께 한다. 이들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는 한의학에 쓰인 기물들은 물론이려니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이 모두 한약재로 쓰이고 있음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한약재가 광범위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고려하여 아름다운 꽃을 배치하고 있는 듯 싶지만 사실은 한약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유도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배경에는 동의보감의 문구를 넣는 식의 구성적인 이미지를 통해 서로 다른 소재 및 이미지들을 혼용하는 현대회화의 방법론 및 형식미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혈류도라든가 한의학에 쓰인 기물들을 정물화 형식으로 묘사한 그림의 배경에는 우주 및 자연현상인 햇빛 바람 눈 비 우박 따위의 이미지가 추상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물론이려니와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때 따른 조형적인 기술이다. 그러기에 현대적인 정물화로서의 이미지를 획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굳이 한의학에 쓰이는 기물들이 아니더라도 현대정물화에서는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 다시 말해 이들 소재는 특정 목적을 위해 그려졌다는 선입견만 없으면 일반 정물화로서 받아들이는데 하등 문제가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채색화 분야에서 닦은 견실한 실력을 바탕으로 목적화라는 문제 이전에 회화적인 가치를 실현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혀 생소한 소재 및 제재를 거뜬히 소화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량의 결실이다.
한의학은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동일한 관점에서 본 음양오행을 기반으로 한 동양철학이 그 근본을 이룬다. 따라서 음양오행사상을 자연현상과 인체에 결부시킴으로써 인간의 생체리듬 또한 자연의 순환법칙에 동일하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의학은 신체가 병에 드는 것은 음양오행에 따른 순환의 질서가 깨짐으로써 발생한다고 보았다. 혈류도는 이러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아무튼 한의학과 관련된 소재를 찾아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점은 새로운 시도이다. 목적화이기는 해도 작품에 따라서는 독립된 회화적인 작품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들 그림이 널리 보급됨으로써 전통의학인 한의학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킴은 물론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접근방법은 회화의 실용성 및 영역확장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도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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