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철 : 절제된 필치 속에 피어나는 정신성
| 2011. 09.30(금) 13:18 |   |
황호철은 온갖 현대미술이 횡행하는 상황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고 수묵화에 매진해왔다. 수묵화에 대한 신념이란 오랜 생활습속에서 배태된 전통예술, 즉 동양미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표현양식이나 형식,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현대미학이 지배하는 시대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전통적인 미를 탐색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전래의 화법에만 안주하고 있지는 않다. 전통적인 가치로서의 정신성을 중심에 두고 그 자신의 체질에 맞는 화법을 강구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의 미적 감각에 충실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화법 및 화풍을 수립하는데 전념할 수 있었다. 오직 자신의 미적 감각에 따르는 진솔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림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작가적인 태도 및 신념이 작품 속에 그대로 용해되고 있다.
그의 수묵화는 실경을 기반으로 하는 산수화 중심이다. 서구미학이 범람하는 현실에서 전통회화를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오직 실경산수로 시종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도 한국화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경산수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그의 작품이 대신한다. 표현양식이나 형식의 새로움, 즉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하여 작품을 감상하면서 고상한 정신 및 감정의 고양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시각이다.
그는 오직 구도하는 자세로 진지하고 실경산수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작업해왔다. 실경산수는 실사, 즉 눈에 보이는 사실을 실제처럼 묘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아름다운 산수경치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시각이야말로 사실정신의 발로이다. 자칫 창작의 윤리성에 충실한 나머지 자칫 주관성을 강조하면 오히려 자연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자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실경산수에 매진하다보면 적어도 거기에 무언가 시각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심미적인 관점이 반영된다고 믿어왔다. 실사가 깊어지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축적되는 가운데 일관된 묘사행위를 통해 세련미와 더불어 인격미가 깃들이게 된다.
물론 더러 화조화로 시야를 넓히기도 한다. 절제된 색채로 시종하는 산수화와 달리 화조화는 채색의 자유로움을 구가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따라서 그의 경우 화조화에 대해서는 일테면 여기와 같은 의미로 접근한다. 어쨌거나 그는 산수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면서 회화적인 사상의 폭을 넓히는데 힘썼다. 그가 지향하는 회화적인 사상은 자연에의 귀의를 이상으로 여기는 동양적인 세계관을 실현하는 일이다. 어쩌면 현대미학보다는 전통미학에 경도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연미에 필적하는 것은 실경산수의 이상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가감할 것 없는 조형미의 원본이기 때문이다. 특히 실경산수의 경우 자연미를 그대로 번안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그런 연후에 그 안에 정신성을 투영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실경산수의 조형적인 이념을 구현하는데 전념했다. 따라서 일체의 기교를 멀리한 채 담담하고 진솔한 필치를 구사함으로써 견고한 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의 산수화를 보면 도무지 삿된 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맑고 담담하다. 명산대천의 기암괴석과 고산준령, 심산유곡을 비롯하여 한적한 정자와 산촌 등 폭넓은 시야를 갖추고 변화무쌍한 사계절을 찬미한다. 그러면서 기교적인 수식을 배제한 채 오직 실상의 재현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의 산수화와 마주하면 눈과 마음이 맑아지는 듯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자연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편안함과 온화한 인상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싶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 즉 자연미는 실상을 재현하는 실경산수의 덕목일진대, 그처럼 담담한 시각적인 인상은 그 자신의 삶의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자연에의 동화를 이상으로 여기는 회화적인 가치관이야말로 욕심을 절제하는 삶의 철학과 일체를 이룬다. 더도 덜도 아닌, 그저 사계절을 순환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과욕 없이 물 흐르듯이 따르는 삶의 태도, 또는 작가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창작세계 또한 그러한 경지에 진입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리라. 그의 작품은 소재 및 제재가 무엇이든지 담담하고 정갈하다. 그러기에 작품과 마주하면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는다. 혼잡한 시정의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적요한 산사에 들어선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담백하면서도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면서 전개되는 필치는 마음의 평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겸허한 마음자세가 그처럼 담담한 필치로 나타난다. 살랑대는 봄바람처럼 살가운 필치로 시종하면서 사실적인 형상을 만들어가는 작업과정은 예도가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금욕적일만큼 철저한 자기절제와 집중력, 그리고 흐트러지지 않는 곧은 마음결에 유도되는 필선은 담백하기 그지없다.
특히 소나무 한 그루를 그린 7미터에 달하는 대작 병풍은 그가 지향하는 수묵화의 세계, 즉 회화적인 사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실제의 크기도 압권이거니와 솔잎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일정한 호흡과 리듬을 유지하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한마디로 정신의 집중, 다시 말해 몰아의 경지에서 작업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수많은 솔잎이 어쩌면 그렇게 정연하고 단아하며 정갈한 선으로 갈무리되고 있는지 절로 감탄하게 된다.
그의 산수화는 수려한 산수경치만을 찬미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외국 여행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데도 인색하지 않다. 중국의 장가계 및 황산 등 명산을 비롯하여 몽골초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로마의 트레비분수, 티베트의 포탈궁도 그렸다. 물론 산수화 기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지만 치밀한 형사로 인해 서구회화를 보는 듯싶은 착각에 빠진다. 수묵의 농담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명암을 나타내고 또 실사를 통해 견고한 형태미를 구축함으로써 서구회화의 조형미에 필적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얻고 있다. 전통적인 화법에만 안주하기보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 및 감각을 반영하는 것도 사실정신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이렇듯이 그는 수묵산수화에 전념한다고 해서 한국의 산하에만 천착하는 것은 아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시야를 넓혀 현대인으로서의 미적 감각을 충실히 반영하고자 한다. 진정한 사실정신이란 현실을 직시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재 및 대상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솔직히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과욕에 빠지지 않는다. 그저 변함없는 일상적인 삶의 태도로 작업하다보면 그 결과가 누적되어 정신적인 깊이로서의 인격미로 현현하리라 믿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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