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윤: 음향오행론의 회화
| 2011. 09.30(금) 12:55 |   |
한마디로 음양오행사상은 한국인이 입고 먹고 자는 삶의 기본조건을 시작으로, 사회생활과 관련한 모든 일에 직접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교는 물론이려니와 문화예술 등 삶의 전반에 걸쳐 관계되어 있다. 그러기에 한국인의 전통
예술을 논할 때 이 문제를 떠나서는 얘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이다.
오승윤의 작업 또한 음양오행사상으로부터 발단한다. 1990년대 이후 그의 ‘風水풍수’ 연작은 음양오행사상의 원리를 색채로 분류한 五方正色오방정색을 기조로 한다. 靑청 白백 赤적 黑흑 黃황 이 다섯 가지 색채를 기본으로 하여 이들 색채간의 중간색인 間色간색으로 자연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방정색은 음양오행사상의 상징적인 색채로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색채 배열방식에 따르는 단청의 기본색상을 이루기도 한다. 단청뿐만 아니라 관혼상제 또는 전통적인 생활기물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방정색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면서 생활정서 깊숙이 젖어들고 있다. 그가 오랜 동안 계속해온 사실주의 및 점묘형식의 작업을 떠나 새삼 오방정색이라는 전통적인 색채개념에 따르는, 전혀 새로운 작업으로 전환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주지하듯이 음양오행사상은 중국에서 시작된 동양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천지만물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바, 그 시초는 太極태극인데, 태극은 시간적으로 ‘선후와 시종을 초월한 영원한 理이’를 뜻한다. 또한 태극은 인간 삶과 관련해서 도덕적인 형이상학의 근본을 이룬다. 우주자연과 인간의 존재는 바로 태극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퇴계 이황은 태극도설에서 ‘無極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動동하여 陽양을 낳고, 동이 極극하면 靜정하니, 정하여 陰음을 낳고, 극하면 다시 동하니,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그 근본이 된다. 음과 양으로 나누어져서 양의 <하늘과 땅>이 성립된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水수, 火화, 木목, 金금, 土토를 낳아서 五氣오기가 순차적으로 베풀어지고 네 계절이 운행된다. 오행이란 바로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고 해석했다.
이에 따르면 천지만물을 표현하는데는 오방정색만으로도 부족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오승윤의 작업은 바로 이와 같은 가설을 전제로 시작된다. 자연의 색깔을 실제 그대로 재현하자면 그 어떤 인위적인 색채로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근사치에 가까이 접근할 수는 있을지라도 실제 그대로의 색깔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천지만물이 음양오행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제로 할 때 음양오행사상이 지시하는 그 상징색만으로 물상을 표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 그의 ‘풍수’ 연작은 이렇듯 한국인의 생활철학 및 전통적인 색채 개념에 의탁한다.
그래서 ‘풍수’ 연작은 오방정색과 그 간색이 중심이 된다. 이처럼 오방정색과 그 간색을 중심으로 하다보니 형태는 자연스럽게 단순화되기에 이른다. 오방정색과 그 간색은 이미 확정된 색채이다. 따라서 이미 확정된 색채만을 사용함으로써 자연히 평면적인 형태해석이 요구되는 바,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형태묘사는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형태묘사가 요구하는 사실적인 색채이미지를 위해 여러 가지 색채를 섞어 삼차색 또는 그 이상의 혼색을 만들어 쓰는 것은 음양오행사상의 색채논리를 벗어나는 일이다. 음양오행사상을 따른다면 사실적인 색채에 대한 미련은 버려야 한다. 오방정색 및 그 간색에는 시각적인 화려함 이면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방정색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가리키는데, ‘동방은 목이며 청이고 좌를 가리키고 사계절의 청춘과 같은 뜻이고, 서방은 금이며 백이고 우를 가리키고 백추를 뜻하며, 남방은 화이며 적이고 상이며 주하를 뜻한다. 그리고 북방은 수이며 흑하로 현동을 뜻한 것이다. 따라서 오행에 의한 청색 백색 적색 흑색 그리고 중앙의 황색이 기본색으로 우주생성의 오원색에 해당하며 오정색 또는 오채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색채의 상징성이 지시하듯이 그의 그림에서는 색채이미지 그 자체보다는 색채의 상징성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오방정색이나 그 간색은 회화적인 순수한 색채로서의 성격을 뛰어넘어 우주자연 및 인간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색채로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오방정색과 간색을 중심으로 할 경우 현실적인 색채가 들어설 자리는 거의 없다. 강렬하고 화려한 원색의 배열만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시각에는 낯설다거나 혼란스럽지 않다. 그 이유는 오방정색 및 그 간색에 충분히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들 원색이 한국인의 삶 전반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색채는 아닐지라도 관혼상제 및 전통 한복 그리고 사찰의 단청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눈에 익힐 기회가 많은 것이다.
실제로 ‘풍수’ 연작에서 볼 수 있는 색채배열 방식은 전통적인 색채배열 방식과 다르지 않다. 물론 전통적인 채색화에서는 오방정색의 개념에 충실한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민화의 경우에는 대체로 오방정색의 색채개념을 따르고 있다. 어쩌면 그의 작업은 민화의 형식을 의식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 중의 하나인 평면성은 민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가령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문자도와 같은 형식은 평면성과 유사한 조형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형태를 면으로 처리하는 평면적인 이미지는 궁궐이나 사찰 등 장엄한 장식에 쓰이는 단청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평면적인 이미지는 이처럼 민화 또는 단청에서 조형적인 맥락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추구하는 평면성은 서양회화의 모더니즘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내용으로서의 사상은 물론이요, 형식미에서도 전적으로 동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미의식 및 미감에 근거하고 있다.
오방정색은 색채에 대한 인간의 잠재적인 본능을 깨울 만큼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색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가장 능동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림을 대할 때 형태에 앞서 색채를 먼저 인식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이 강렬한 색채이미지를 구사하는데도 시각적인 혼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지적인 배열방식을 따르는 까닭이다. 음양오행이라는 심오한 사상적인 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색채배열은 본능을 깨우는 강한 자극적인 요소를 가지면서 동시에 본성에 의해 눈뜨는 자아를 환기시킨다. 강렬한 느낌의 색채에 의한 자극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자아, 즉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색채이미지는 결코 어지럽지 않다. 발색이 억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색채배열방식에는 음양오행사상에 준하는 일정한 규칙성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화려하다는 느낌이 억제되고 있는 것은 원색의 색채배열이 결코 즉흥적인 감정반응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 있다. 감성적인 접근방식을 따르는 색채배열은 당연히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다. 그러니 짐짓 시각적인 화려함을 좇을 수밖에 없다. 우선 시선을 사로잡는데 기민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그의 색채배열 및 조합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음양오행이라는 사상적인 체계를 통해 성립되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풍수’ 연작에서 색채 하나 하나에 대한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양오행의 법칙에 순응해야 하고, 소재 및 대상과의 조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전체적인 색채의 조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조화야말로 그의 작업을 보다 지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건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감성적인 표현은 전적으로 억제되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감성적인 접근방식에 의한 색채의 자율성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 듯싶다.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오방정색 및 그 간색을 중심으로 하기에 자율적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모든 색채는 음양오행이 정하는 색채이미지 및 그 의미내용에 귀결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처럼 색채 운용의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풍수’ 연작은 단청과 같이 종교적인 이념의 구현이라는 규정된 형식의 울타리에 갇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소재 및 대상이 우주와 대자연으로 무한히 열려 있기 때문이다. 소재 및 대상의 선택에서부터 그 배치에 관한 한 전적으로 그 자신의 감성이 요구하는 대로 따를 수 있다. 더구나 색채 문제를 떠나면 소재 및 대상의 선택은 물론이려니와 형태해석에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사유의 공간은 한층 확충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감성을 음양오행이 지시하는 사상 및 철학과 오방정색이라는 변할 수 없는 색채질서에 순응케 한다. 그러고서도 충분히 개인적인 창조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풍수’ 연작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때 이전의 누구와도 다른 별개의 조형공간임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풍수’ 연작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1996년 모나코 국제현대미술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회상’(1995년)은 활옷을 입은 여인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서 있는 모습을 화면 중심에 배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온 그 누구의 작품보다도 시각적인 인상이 강렬한 작품으로 기억될만하다. 마치 색채들이 화면을 벗어나 밖으로 확산되는 듯한 강렬한 발색의 원색들로 채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지 않다. 무엇보다도 어느 특정 부분을 강조하지 않고 화면 전체에 골고루 균등하게 색채를 분산시킨다는 등가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차분하다. 원색의 화려한 발색이 억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주시해야 할 점이 있다. 화면구조에서 중심적인 이미지는 인물이 되지만 이미지의 분산이라는 점에서 볼 때 화면의 중심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현대회화의 전면회화(올 오버) 방식과 같은 구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화면 하단에는 물고기와 물결 그리고 연꽃과 이름 모를 꽃들이 있고 화면 중간에는 사슴과 새들이 있으며 화면 상단에는 해와 새 구름 따위의 이미지들이 거의 균등한 거리를 둔 채 골고루 분산 배치되고 있다. 이미지의 밀도라는 점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사실상 화면 전체에 이미지를 균등하게 배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화면 구조는 연꽃 위에 마치 불상처럼 정좌한 누드의 여인을 화면 중심에 배치한 ‘나부’(1998년)와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있는 누드의 여인을 역시 화면 중심에 배치한 ‘나부’(1998년)에서도 반복된다. 그리고 누드의 여인을 중심에 둔 채 그 주변에 물고기 파도 새 구름 꽃 따위의 이미지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인물을 중심에 두는 구도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형식화되어 있다. 여기에서 인물을 중심에 두는 구도는 인물이 우주만물의 중심(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불교사상과 연계된다. 물론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누드의 여인이라든가 연꽃 위에 서 있는 활옷의 여인, 그리고 꽃방석 위에 앉아 있는 누드의 여인을 묘사한 작품 ‘나부’(1998년)에서 인물의 존재방식은 모두 불교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이나 그밖에 우주 자연에 존재하는 온갖 물상들은 조화를 전제로 존재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시사상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작품에 따라서는 꽃이 화면 중심에 놓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약간 혼란이 일어난다. 그의 경우 따지고 보면 불교사상이라든가 도교사상 그리고 유교사상은 물론이요, 민간신앙으로서의 무속에서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어차피 한국인으로 살아온 터이기에 이처럼 다양한 종교 및 신앙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쩌면 다신교를 허용하는 현실이 이를 설명하고 있듯이 한국인으로서의 삶은 어느 면에서 보다 다채롭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꽃이 화면의 중심에 놓이는 그림에서는 범신론적인 사상의 흔적까지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구성을 위해 또는 구도를 위해 꽃을 화면 중심에 놓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에 풍경화로 돌아오면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그리운 금강산’(1997년) ‘지리산’(1999년) ‘독도’(1997년) ‘바람과 구름’(1999년) 등 작품은 중심적인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 명제가 밝히고 있듯이 특정의 산이나 섬 또는 일반적인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하는 까닭에 화면에 중심적인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 자연풍경에서 어느 부분을 취재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구도가 결정될 뿐, 그와 같은 구도를 위해 특정의 이미지를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풍경에서는 자연이 지어내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무엇이든지 음양오행사상에 기반을 둔 평면적인 이미지와 오방정색을 전제로 하여 모든 형태는 재해석된다.
‘독도’는 절해의 고도가 아니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꿈의 낙원이자 환상의 섬이다. 새와 물고기와 꽃구름이 어우러지는 이상의 세계인 것이다. 마치 꽃바람이 일 듯 원색의 이미지들이 현란하게 춤춘다.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대합주가 전개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 경계가 모호하여 얼른 구분되지 않는다. 하늘과 바다와 섬 경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상은 분별이 없는 그저 하나의 세계일 뿐임을 노래한다. 여기에서는 독도가 섬이라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 다만 작고 앙증스러운 색점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 환상적인 향연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는 세속적인 욕망이나 다툼 미움 질시 시기 모략 따위의 나쁜 감정이 끼어 들 여지가 없다. 한국과 일본간의 영토다툼조차 무색해진다. 독도는 그저 그 본래 주인인 새와 물고기와 식물들이 기거하는 영원한 낙원일 따름이다.
‘그리운 금강산’과 ‘지리산’은 모두가 산세가 험하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명산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이 서로 다투듯이 이들 산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찬미해왔다. 그는 이 두 산에 대해 이전의 화가들과는 완연히 달리 해석하고 있다. 화려한 원색조의 색채배열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평면적인 이미지는 험준한 고산준령의 산세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특히 ‘그리운 금강산’은 기상천외한 모양의 기암괴석이 도열하는 금강산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깨뜨리고 만다. 다만 색동과 같은 연속적인 색채배열을 통해 만들어지는 산봉우리들이 다투듯 하늘을 향해 치솟는 형국이다. 불규칙하면서도 격렬하게 움직이는 선의 흐름을 따르는 가운데 거의 수직에 가까우리 만치 급박하게 치솟는 기운찬 모습의 산들이 영적인 신비를 부풀린다. 봉우리 하나 하나가 독립적인 형태를 가지면서도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며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다. 금강산은 모든 형태의 산을 초월한다. 그가 묘사하는 금강산은 바로 초월적인 세계를 의미한다. 현실을 넘어서는 곳은 필연적으로 꿈과 이상이 자리한다. 꿈과 이상의 세계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는 현실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직 아름다울 뿐인 무원죄의 세상이자 신들의 처소인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꽃처럼 아름다운 색채로 장식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리산’의 경우에는 ‘그리운 금강산’과 유사한 형식을 보이지만 산을 만들어내는 선의 흐름이 거의 일정하게 진행된다. 급박하기는 해도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시각적인 자극이 적다. 흡사 물 너울과 같은 곡선이 반복함으로써 우아한 형태의 산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 ‘지리산’은 ‘그리운 금강산’에 비해 한층 너그럽고 따스한 정서를 풍긴다. ‘그리운 금강산’이 신들의 처소라면 ‘지리산’은 인간들의 거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은 ‘그리운 금강산’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장엄한 위세를 떨친다. 이로써 납득할 수 있듯이 그는 두 작품을 통해 영험한 산으로서의 이미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들 두 작품은 모두가 높고 깊은 산세를 표현하기 위해 화면 상단의 하늘 부분 협소하게 처리하고 있다. 덧붙여 이러한 구도는 상승하는 산의 모양을 강조하는데 효과적이다. 하늘과 맞닿은 산에는 영험한 기운이 감돈다. 거대한 산의 자태와 영험한 기운이 깃들이는 산은 경배의 대상이 된다.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영산으로서의 이미지를 아름다운 색채이미지로 재해석함으로써 그 순결성이 한층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제 더 이상 위압적인 기세는 읽을 수 없다. 아주 편안한 느낌으로 우리의 현실세계로 내려서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금강산이나 지리산은 티 하나 없이 맑은 색채이미지로 인해 아주 경쾌하고 상쾌하며 쾌적한 산으로서의 인상을 준다. 금강산과 지리산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정열적인 색채는 이미 현실상과는 무관한 환영이고 환상일 따름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산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이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仙境선경이다.
‘풍수’(1995년)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전통회화의 족자와 같은 형태의 세워진 그림인데 변형사이즈인 셈이다. 굳이 변형사이즈를 택한 것은 역시 그 형태에 어울리는 내용 때문이 아닌가싶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자연풍경은 가장 이상적인 형식 및 내용을 보여준다.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우주와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비롯한 들짐승 물고기 날짐승 나무 꽃 따위의 온갖 생물체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다. 화면의 중심에는 초가집들이 자리함으로써 인간의 존재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중간자로서의 입장임을 시사한다. 화면 하단에는 한가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와 넘실대는 물결, 상단에는 날아다니는 새들과 구름, 그리고 중간에는 초가집과 사슴 및 산이 보인다.
이처럼 하늘과 땅과 물이 어우러지는 세상은 공존의 논리만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이 작품에서는 화면의 중심이 없을뿐더러 주도하는 이미지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면서 균등한 분배원칙을 따른다. 더구나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는 물상, 즉 초가집 사슴 물고기 새 산 따위의 이미지를 제외한 구름이나 물결 그리고 공기 따위는 물방울처럼 또는 꽃잎이나 비누방울과 유사한 모양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추상적인 이미지는 화면을 하나로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면 전체를 골고루 덮고 있는 이들 추상적인 이미지로 인해 커다란 화면이 생명의 리듬으로 출렁인다. 추상적인 이미지들은 꽃과 나비처럼 아름다운 축제와 같은 정경을 연출하면서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것이다.
중심적인 이미지를 두지 않는 분산된 이미지의 화면구조는 그의 조형세계 및 세계관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모든 물상은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며 생명체가 살고 있는 우리의 우주 및 자연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주체가 된다는 인식이다. 물상들이 공존함으로써 생동하는 우주, 살아 있는 자연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오방정색을 중심으로 하는 ‘풍수’ 연작은 소재 및 대상이 무엇이든지 사실적인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음양오행사상에 따르는 조형어법 및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된 이미지들이 전개되는 것이다. 조형세계의 연금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작품은 새로운 회화사상 및 형식의 제안이다. 이처럼 그의 ‘풍수’ 연작은 이제까지 누구도 조합해내지 못한 아주 독특한 이미지 및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이상적인 세상 하나를 선물하고 있다. 그의 작품과 마주했을 때 처음에는 형태를 인지하기 앞서 화려한 원색의 향연에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그렇다. 원색을 중심으로 한 화려한 색채가 가지고 있는 시각적인 효과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잠시 후 원색의 향연에 빼앗겼던 시선을 되찾고 나면 비로소 그림 속의 내용이 시야에 들어온다. 즉 그림에 나타나고 있는 형태에 시선이 옮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상의 이미지가 곧바로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물상들은 간명하게 압축된 채로 아주 단순한 단일의 평면적인 이미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물상들은 모두가 같은 방식의 색채이미지로 처리됨으로써 형태구분이 쉽지 않다. 몇 개의 평면으로 분할되는 원색의 바탕색과 그 위에 얹혀지는, 흡사 물방울과 같은 형태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화면을 채우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날짐승과 네 발 짐승 그리고 물고기들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 즉, 공기와 흙과 물이 뚜렷한 경계를 두지 않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우리가 일반적인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현실적인 공간감을 무시한 평면 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장르상으로 보면 ‘풍수’ 연작의 대다수는 풍경화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풍경화의 형식이면서도 실제적인 공간감이 제거됨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이질적인 정서를 드러낸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 및 대상은 분명히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지만 현실적인 존재방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실제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의 풍경화는 애초부터 실제성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음양오행사상이라는 논리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기에 사실적인 감각을 버린 탓이다. 그림세계에 음양오행사상을 대입시키는 것은 시각적인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이상향을 확보하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그러기에 현실적인 풍경으로서 필요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상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
‘풍수’ 연작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자연의 기본적인 조건은 하나의 평균율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현실적인 공간을 구별짓는 전후좌우상하의 방위개념이 구분이 무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현실을 초월한다. 물상의 존재방식에서 높낮이는 물론이려니와 깊이와 두께를 의식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해 물질로 구성된 사물의 체적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풍수’ 연작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은 생략 단순화 과정을 거치면서 약화 또는 도상의 형태로 변환하고 있다. 물상의 형태를 간략히 표현하는 略畵약화라든가 圖像도상은 상징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실제의 모양을 최소한의 형태로 단순화하는 것은 상징적인 언어 기술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표현방법은 당연히 음양오행이 요구하는 조형개념을 만족시키는데 필요하다. 색채의 상징성과 결부됨으로써 형태 또한 상징적인 체계를 갖게 됨은 물론이다. 하늘의 상징적인 동물인 새와, 대지의 상징적인 동물인 네 발 짐승과, 바다의 상징적인 동물인 물고기를 동시에 등장시킴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대자연의 풍경화가 성립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인 풍경화에서 새와 네 발 짐승을 포함하여 물고기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가 하늘 땅 물에 사는 동물을 하나의 화면 속에 동시에 등장시키는 것은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는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하는 풍경화가 아님을 역설하려는 것이 아닐까. 소재라는 면에 한정하면 풍경화로서의 요건은 갖추고 있으나 새와 물고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설정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풍경화와는 다른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풍경화는 이미 현상계의 모습이 아니다. 현상계의 동식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방식은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이다. 현실을 초월한 세계는 초현실 세계이거나 상상의 세계 아니면 이상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림에 등장하는 동식물이 현실적인 공간개념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방식을 갖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이들 동식물이 서로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仙界선계라고 보는 것이 옳은지 모른다. 선계는 기독교의 천당이나 불교의 극락과 같은 개념의 이상세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도교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동양인에게는 선계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대는 천당이나 극락보다 한층 넓다. 우리 나라 전래의 동화와 설화 그리고 전설에서 이상세계가 대부분 仙境선경으로 설정되고 있는데 기인하는 것이리라. 신선이 노니는 곳이 바로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은 이상세계였던 것이다.
도교는 ‘黃帝황제, 老子노자를 교조로 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민중의 세속적 신앙을 뒷받침하는 민간종교로서 기성의 종교의 요소를 가미한 多神的다신적 종교로서, 無爲自然說무위자연설을 주지로 하는 老莊哲學노장철학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을 더하여, 불로장생 자손번영 지위나 재산 등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민간종교이다.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삼는 老莊思想노장사상을 가미한 민간신앙의 형태로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종교이다. 도교는 신비주의와 자연주의를 포괄한다. 그 궁극은 이상세계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영원불멸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 도교의 이상이었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심신수양의 한 방편으로 도술을 받아들였다. 도술은 인간의 정신 및 신체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려 신선의 경지로 올라서는 하나의 증표이기도 했다.
‘풍수’ 연작 중에는 모티브를 전설 및 설화 또는 고대소설에서 가져오는 경우가 있는데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삼국시대의 설화로 전해지는 심청전에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을 모티브로 한 ( )작품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래의 설화 및 전설은 그 자체가 초현실적이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이상세계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상세계를 통해 현실에서 구할 수 없는 꿈과 이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채워주는 기능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가 자연풍경을 이상세계화 하는 것은 각박한 현실에서 구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꿈과 이상을 채워주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풍수’ 연작에는 다툼이 없다. 온갖 물상이 한데 어우러지면서도 전혀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 순기능으로서의 조화로운 아름다움만을 지어낼 뿐이다. 밝고 화사하며 명쾌한 색채와 간단명료하면서도 순화된 형태미가 삶의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형태미에서는 한국적인 線선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흔히 그 구체적인 예로 제시되는 초가집 지붕이나 기와집의 처마, 저고리의 소매 따위에서 볼 수 있는 완만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유연한 곡선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또한 낮은 구릉이 완만하게 펼쳐지는가 하면 갑자기 가파른 곡선을 이루며 하늘로 치솟는 바위산이 지어내는 선의 흐름이 쉽게 연상되는 것이다. 이렇듯 장년의 산세가 가지고 있는 변화무쌍한 곡선이 그의 그림에서 화면을 분할하는 선의 이미지로 패턴화하고 있다. 특히 호남평야와 그 주변의 산들은 불과 100-300m 정도에 그치는 야산들인데 그처럼 완만한 산들이 오르내리면서 만들어내는 유연한 선의 흐름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인 산세 특히 남도지방의 너그러운 이미지의 야산들이 펼쳐놓은 곡선의 아름다움이 그의 그림에 그대로 옮겨지고 있다. 한국의 야산이 가지고 있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산의 이미지는 거의 상승의 곡선을 지향한다. 반면에 산자락이 내려지는 경우 산의 곡선은 하강의 정서를 나타내게 된다. 산의 이미지를 상승의 곡선으로 처리하는 것은 역시 이상세계를 향한 도약 또는 비상을 바라는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물결치듯 가파르게 움직이는 산 그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한국의 산세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이미 일 천년 이전에 양식화한 고구려인의 그 미감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풍수’ 연작에 등장하는 모든 물상의 형태 또한 곡선으로 처리되고 있다. 역시 순화된 감정 및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모든 형태가 곡선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단조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자칫 상처받기 쉬운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있을 따름이다.
‘풍수’ 연작은 본원적인 것, 또는 본질적인 것만을 요약 함축함으로써 감정의 비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편하다는 느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체의 잡사를 제거한 진실한 것, 착한 것,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기에 고뇌가 있을 수 없다. 특히 명백한 색채이미지와 그에 답하는 간명하고 명확한 형태가 조화를 이룸으로써 시각적인 이해가 명쾌하다.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확실하다. 거기에 이미지의 이중성은 없다. 상징적인 색채 및 상징적인 형태만이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 그 자체로서 모든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그림을 보는 사람 또한 거기에서 눈에 보이는 사실 이외의 무엇이 감춰져 있으리라는 호기심이나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다.
티없이 맑고 순수한 세계, 결점이 없는 완벽한 세계, 無原罪무원죄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과 동식물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영원한 조화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바로 음양오행사상이 지향하는 세계이다. ‘풍수’ 연작 가운데 누드라든가, 전통적인 복식의 신부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과 일체가 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오방정색이 우주와 대자연의 섭리를 설명하고 있듯이 화면의 중심에 놓이는 인간은 자연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여성 그리고 여체는 모태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모태는 모든 생물체의 본원인 흙, 즉 대지를 의미한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몸은 고래로부터 다산의 상징이었듯이 그의 작품에서 여성 또는 여체는 풍요와 행복과 사랑과 아름다움과 평화의 상징이다.
여체를 화면 중심에 두는 ‘나부’(1998년)작품에서도 에로틱한 이미지는 소거되고 있다. 어쩌면 지나치게 도덕적이라고 할 정도로 시각적인 자극을 억제하고 있다. 실제로 작품에 따라서는 여체가 깨달은 자, 즉 불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기도 하다. 성적인 이미지로서의 여체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상징으로서의 여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상의 이미지, 심청, 또는 어머니로서의 이미지가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찾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체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순결성 및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름다움이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풍수’ 연작은 소재가 무엇이든지 또는 소재의 배열방식이 어떻든지 간에 지극히 정적이다. 물론 흡사 꽃무늬 또는 물방울과 유사한 둥근 원색 점들이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둥근 원색 점들 중에서 위쪽은 구름과 공기를 상징한다. 아울러 화면 아래쪽의 산 모양의 작은 원색 점들을 흰색으로 감싸고 있는 이미지는 물결을 상징한다. 구름과 공기 그리고 물결은 동적인 이미지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정적인 분위기에 이끌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신이 자연을 마주할 때 정관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선비는 항상 靜中動정중동을 미덕으로 여겼다. 고요한 가운데 행동하는 것, 즉 없는 듯이 존재하는 태도야말로 지성인의 미덕이었다. 그 또한 이와 같은 선비정신으로 자연을 관조하고 있다. 변화무쌍한 현상계인 자연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 즉 본원적이고 이념적인 것을 응시함으로써 영원한 초월적인 가치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게 된 것이다. 그 결과가 음양오행에 따르는 오방정색과 간명한 최소한의 형태를 갖는 평면적인 이미지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작업에서 숨겨지는 이미지는 없다. 모든 것이 명백하고 명확하며 명석하게 그 형태를 드러낸다. 상징적인 색채 및 형태를 통해 제시되는 자연의 물상, 즉 하늘 땅 물 구름 그리고 각종 동식물은 도상이나 부호처럼 극단적으로 간결하게 처리된다. 명암이나 원근이 무시된 단순한 평면적인 이미지로 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의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을 보면 의외로 직관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는 먹으로 작업하는 드로잉을 보면 명백해진다.
그는 어떤 계획된 사실에 따르지 않는다. 물론 어떤 내용을 그릴 것인지는 대강 결정한다. 하지만 일단 붓을 들면 무엇을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지 주저하지 않는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다. 하나 하나의 형태를 채워 가는 동안 서로 다른 이미지들간의 유기적인 조합을 의식하면서 전체적인 조화와 안정을 모색하게 된다.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이끌리듯이 형태를 찾아 움직이는 붓은 그의 미적 감수성에 명석하게 반응한다. 먹물을 머금은 붓은 신기에 취한 듯 신명으로 넘친다. 신명이야말로 경직된 사고 및 감정을 해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그의 그림이 직선 없이 리드미컬한 곡선의 유희로 일관하는 것은 바로 신명으로 구체화되는 감정의 이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미지를 찾아가는 직관력은 즉흥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경우 영감보다는 지적이고 논리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는 30년간 사실주의 미학에 충실해온 결과일 것이다. 오방정색을 사용하여 ‘풍수’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 이전까지 사실주의로 일관해 왔다. 물론 1980년대 후반에는 점묘법에 심취한 일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실상을 보면서 점묘로 재구성했을 따름이다. 점묘법의 작업은 비록 그 형식이나 내용은 다를지언정 어떤 특정의 이미지를 부각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풍수’ 연작의 구성 및 화면구조와 문맥이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야산의 가을볕’ ‘다송화’(1986년) ‘찔레꽃 필 무렵’(1987년) ‘봄빛은 산을 넘고’(1989년) ‘산내리’(1990년) 등의 작품은 점묘법으로 되어 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그림 속에 특정의 이미지를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또한 명제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의 풍경이나 형태에 대한 설명이 아닌 자연현상에 대한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더구나 서정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명제들이다. 명제만으로도 그림의 분위기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이들 작품은 무수한 점들의 집합 및 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거의 일정한 크기의 점들이 무수히 겹쳐지는 가운데 꽃의 이미지가 나타나고 산과 들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점들 가운데서 간신히 구분될 수 있을 정도에 그친다. 특정 물상의 형태를 부각시키지 않고 그 정황 정서를 표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때 이미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에는 신성이 깃들이고 있다는 범신론적인 세계관을 통해 화면 중심을 두지 않는 전면회화 형식에 따른 균등한 분배원칙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화면구조는 ‘풍수’ 연작에서 추상적인 이미지로써 화면을 통일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산내리’에서는 특정의 형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화면 중간 부분에 몇 개의 하얀색들의 모여있는 데서 간신히 ‘산내리’라는 명제가 지시하는 초가마을의 정경을 복원해낼 수 있을 따름이다. 동일색상 계열의 자잘한 색점들이 화면을 거의 균일한 상태로 덮고 있다. 그로부터 구체적인 형태를 찾아내거나 복원해내려는 일은 부질없다. 색점들이 만들어내는 화음과 율동에서 생명의 환희, 자연의 예찬을 음미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는 형태를 숨김으로써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그 이면에 자리한 정서에 공감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풍수’ 연작에서는 여인들이 중요한 이미지로 부각된다. 여인을 그림 속에 등장시키는 것은 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다운 모습에 대한 헌사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시각으로 보면 여인은 인간의 모태이다. 땅이 모든 생명체의 모태라면 여인은 인간의 모태이다. 다시 말해 그는 여인과 땅을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누드의 여인은 대지의 이미지로 그리고 옷을 입은 여인은 한국여성의 정서적인 표상으로서 받아들인다. 따라서 바닷가에서 일하는 해녀들과 어촌 및 농촌의 여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모성과 삶의 의지 및 욕구가 강한 한국여성의 그 힘찬 생활정서를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남해의 볕’(1986년)과 ‘색채여! 천년의 색채여!’(1985년)은 생활정서를 직접적으로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은 강인한 한국여성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서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삶의 어려움에 지친 모습이 아니라 삶 자체를 즐기는 여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시각을 달리해 보면 낭만적인 분위기조차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 그는 아무리 힘겨운 삶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꿈과 사랑이 깃들이는 낭만적인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그림이 전체적으로 밝고 아름다운 것도 삶에 대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사실 이면에 은닉된 인간 감정의 순수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삶에 대한 긍정의 산물인 낭만적인 감정은 그의 그림을 이끌어 가는 중심적인 정서인 셈이다.
‘선녀천’(1986년)과 ‘선녀도’(1989년)는 설화로 전해오는 <선녀와 나무꾼>을 묘사한 작품이다. 3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제작되었으나 구도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인물의 배치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선녀와 나무꾼에 관한 설화는 한국인의 낭만적인 기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천상의 선녀와 노총각인 나무꾼이 사랑을 한다는 내용 자체가 이미 일상성을 뛰어넘는 낭만적인 정서를 반영한다. 고전적인 제재를 택한 것은 역시 그 자신이 낭만적인 정서에 쉽게 동화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동시에 그는 한국적인 제재를 통해 회화적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목욕하는 선녀들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풍수’ 연작에서 등장하는 누드의 여인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체 그 자체에 찬미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의 모태로서의 그 풍요로운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풍수’ 연작에 등장하는 누드의 여인은 선녀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런가 하면 ‘옹성의 겨울’(1979년)은 전형적인 사실화풍의 풍경화인데 ‘풍수’ 연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눈 덮인 초가집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눈에 덮인 초가집은 고유의 곡선과 양감의 원형을 상실한 채 단순화되고 있다. 초가지붕도 눈으로 덮이고 땅도 눈으로 덮임으로써 그 사이에 있는 외벽은 현저히 낮아지고 만다. 위아래로 쌓인 눈이 초가집 외벽의 면적이 줄어들어 난쟁이 모양이 된 것이다. 희화적인 형태가 된 것인데 그는 여기에서 ‘풍수’ 연작에서 표현되는 납작한 모양의 초가집의 형태변형의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이상과 같이 예시된 여러 형태의 사실적인 작업은 그 자체로서 완결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훗날 ‘풍수’ 연작의 조형적인 원형이자 근거가 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수묵을 이용한 크로키작업을 아주 중시한다. 영감을 받아쓰고 그림을 구상하는 수단으로서 활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즉흥적인 표현감정을 형상으로 번역하는 수단으로도 받아들인다. 그러기에 크로키작업은 순도가 높다. 수정이 불가능한 일회적인 운필로 완성되는 수묵의 특성을 살리는 것이다. 수묵 크로키작업은 미적 감수성을 항상 예민한 상태로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대한 그 자신의 감정을 그림이라는 조형언어로 바꾸어내는 감각적인 촉수인 셈이다. 이렇듯이 예민한 촉수를 지님으로써 항상 생기 넘치는 이미지, 즉 생동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재 및 대상을 보고 곧바로 옮기는데 필요한 소묘 및 크로키는 거의 일상적인 작업의 하나였다. 그러나 현실을 취재하기보다는 화실에서 사유하는 시간이 많아진 90년대 초반 이후에도 크로키와 소묘는 계속해 오고 있다. 자연을 관조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을 받아써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영감을 받아쓴다. 이처럼 눈앞에 마주하는 소재 및 대상의 이미지를 옮기는 일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영감이 들이닥칠 때 종이 위에 그 이미지를 확정짓는 일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시간성과 결부된 문제뿐일까. 그렇지 않다. 그에게 크로키와 소묘는 물상의 이미지를 통해 심상을 명확히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또한 마음의 눈이 가지고 있는 정확성을 높이는데 필요한 일이다.
다시 말해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높이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또한 오일작업에서 확정적인 선을 얻는데 필수적이다. 항상 준비된 손, 열린 손으로서의 기능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먹을 사용한 드로잉 작업에서 소묘와 크로키가 어떠한 의미인가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일회적인 선으로 물상의 형태를 명확히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묘(드로잉)작업에서 나타나는 선과 오일작업에서 나타나는 선이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소묘 및 크로키는 오일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먹을 사용하는 그의 선묘작업은 학창 시절 익힌 한자 서예기법과 관련이 있다. 일점 일획으로 완결 짓는 서예를 통해 물상의 실체를 요약 함축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선묘작업은 비록 서예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명료한 인상의 이미지를 확정짓는 과정을 보면 그 근본이 서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그 마음의 평균율은 바로 서예에서 터득한 묘수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작품에는 삶의 환희가 넘친다. 이는 긍정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단순히 색채가 밝고 강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림이 과연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인가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이기에 그렇다. 마주하고 있으면 행복한 감정이 솟아나는 연인과 같은 그림이 되어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그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유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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