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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0일(화요일)

34.함평 학교면 두동·장동

함평노씨 600년 세거지…육영재·세효각 등 문화유산 남아
충효의 가문으로 교육에 힘써 법조·의료계 많은 인재 배출
2023. 03.28(화) 15:35확대축소
두동 마을에 있는 육영재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기상학자들에 따르면 ‘알페리오(Afelio) 현상’ 때문이라고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약 5광년, 대략 9만km인데 이 알페리오 현상으로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무려 15만2천km까지 멀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약 66%나 멀리 떨어져 있여 추울 수밖에 없고 우리 몸은 이 온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체감 온도가 훨씬 낮다고 한다.

이달에 찾아가는 전남의 마을은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 두동과 장동마을이다.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을 따라가다가 그 유명한 고막원 독다리(古幕石橋)쪽으로 우회전하여 2km남짓 들어가는 마을이다. 광주-목포간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고막석교는 700여년 동안 수차례의 홍수가 지고 일제 강점기에 만든 콘크리트 다리가 무너졌을 때도 끄덕하지 않은 신비의 다리다. 지방문화재 68호로 지정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바닥에 작은 돌들을 쌓아 하천 바닥이 깎이는 것을 막고 교각을 유선형으로 세워 물의 압력을 최소화시킨 과학적 설계라는 연구결과가 내려진 바 있다.

학교면은 조선시대 금동면(金洞面) 좌촌면(左村面) 진례면(進禮面) 등 3개 면으로 나눠져 무안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학교면으로 통합되었다. 금동면은 복천리 고막리 마산리 월송리 백호리 금곡리 상옥리 등 7개 마을, 좌촌면은 학교리 월산리 사거리 죽정리 등 4개 마을, 진례면은 곡창리 월호리 금송리 석정리 등 4개 마을이다.
두동마을 600년 노거수


복천리에는 무안박씨, 함평노씨, 함평이씨 등 3개 성씨가 집성촌을 이뤄 살아왔는데 이들 성씨가 입촌하기 이전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복천리 마을지(2022년 이계선 저)에 따르면 함평노씨(咸平魯氏) 12세 성지(誠之)가 1433년경에 월야면 월악리에서 복천리 내동마을로 입촌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함평노씨 600년 세거지로 볼 수 있다. 내동마을은 두동·장동과 지척에 있어 한마을이나 다름 없다.

여기서 잠시 함평노씨(咸平魯氏)들의 족보를 들여다보자, 문헌상 본관은 강화·함평·밀양·개성(開城)·양주·수원 등 여러 본이 있으나, 모두 동조(同祖)·동원(同源)으로 알려진다. 본래 노씨는 중국 주(周)나라 때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이 노후(魯侯)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노(魯)를 성으로 삼았다 한다. 강화노씨의 시조는 주(周)나라 때의 노중련(魯仲連)이며, 그의 손자인 계(啓)가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을 하여 강화군(江華君)에 봉해짐으로써 시작되었다 한다.

함평노씨는 강화노씨의 후예로 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에 오르고 함풍(咸豊:지금의 함평)군(君)에 봉해진 노목(魯穆)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시조 노목은 고려 인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삼가현감(三嘉縣監)이 되어 이자겸(李資謙)을 축출하는 데 공을 세워 문하시중에 올라 가수군(嘉樹君)에 봉해졌다가 함풍군(咸豊君)에 가봉되었다.
묘소는 경남 합천군 대병면 성리 악견산(岳堅山) 기슭에 모셔져 있으며 매년 양력 3월 넷째 토요일에 묘제로 봉사(奉祀)한다. 묘역 암석에는 가수군노공유적지(嘉樹君魯公遺蹟地)와 독락대(獨樂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문평의 거평사, 무안 해제 학산사, 영암 관봉사, 광주광역시 무광사, 파주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어 있다.
함평 입향조 무열공 노 신의 단


함평 입향조는 7세 무열공 노신
함평 입향조는 7세 노신(魯愼,1336~1397)이다. 호는 악은(岳隱), 시호는 무열공(武烈公)이다. 개성에서 태어나 12세 때 경서에 능통했으며 1359년 (고려공민왕 8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안우경 등과 싸워 일등훈을 세웠다. 1364년 김용(金鏞)의 난 때도 이성계와 함께 난을 평정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벼슬이 정3품 정윤상호군(正尹上護軍)에 이르고 함풍군(함평)에 봉해졌다.

그 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40명의 동지와 함께 보봉산(寶奉山)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스스로를 귀은(歸隱)으로 칭하였다, 그 뒤 함평 월야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했다. 신종여시(愼終如始)란 뜻으로 이름을 신(愼)으로 개명하고 송악산(松岳山)을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호를 악은(岳隱)으로 바꿨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악은집이 남아 있다.

매년 음력 초하루에는 마을 뒷산에 올라 송악을 바라보며 눈물의 사배(四拜)를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산을 월망산(月望山)이라고 불렀는데 현재의 월악산이다.
타계 후 조정에서 무열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내동마을 뒤에 단이 마련돼 있다, 멀리 불갑산 연실봉과 월야의 넓은 뜰이 눈아래 펼쳐진다. 매년 양력 4월 첫 토요일 제사를 지낸다.
위패는 개성 두문사(杜門祠), 장성 경현사(景賢祠), 문평 거평사(居平祠), 무안 학산사(鶴山祠), 영암 관봉사(冠峯祠) 파주시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에 배향되어 있다.

노신의 아들 대에서 나주, 무안, 함평파로 갈라져
함평노씨는 7세 노신(魯愼)의 아들 대에서 3개 파로 갈라진다. 장자 노성안(魯成顔)은 나주파(羅州派), 둘째 노희안(魯希顔)은 무안파(務安派), 막내인 노유안(魯有顔)은 함평파(咸平派)로 분파되었다. 나주파를 현감공파, 무안파를 진사공파, 함평파를 한림공파로 부른다.

그러니까 함평노씨는 월야에서 나주문평과 무안 해제로 이거하여 세를 형성하였으며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 두동·장동 노씨는 무안피에 속한다. 무안파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 학교면이 무안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함평노씨 가운데서는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에서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여 함평노씨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다.
두동마을 전경


나주파는 현감공 노성안이 개성에서 살다가 나주로 왔고 그의 아들 9세 노세기가 처가인 문평으로 이거하면서 세거지를 형성하게 된다. 나주파에서 경북 성주, 영암, 영광 등으로 갈라진다. 11세 둔은(遯隱) 노종주(魯宗周), 금계공 노인, 금계공의 4촌형 노의(魯義) 등이 현감공 후손들이다.

무안파의 두동·장동쪽 입향조는 12세 성지(誠之)다. 1433년경에 월야면 월악리에서 학교면 복천리 내동마을로 입촌한 것이 처음이다. 성지의 후손 16세 대성(大成) 대임(大任) 형제가 장동으로 입촌했고 20세 길(區)이 1728년경 두동마을로 입촌함으로써 두동·장동이 노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동과 장동은 이웃마을로 100여 호가 살았는데 두 마을에는 타 성씨가 별로 없고 함평노씨들의 자작일촌(自作一村)이다.

함평파는 8세조 노유안이 함평 월야를 중심으로 13세까지 살다가 일부가 순천시 주암면(승주) 갈마리로 이거했다. 16세 관암공 노홍은 함평파의 후손으로 주암에서 태어났다.
무안 해제의 함평노씨들도 함평파 후손으로 해제 입향조는 17세 무민당 노덕원(1564~1636)이다. 노덕원은 조헌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창의했다. 금산에 이르렀는데 이미 패한 상황이라 의병을 이끌고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한산대첩과 노량해전에서 활약했다. 그는 1627년 추천으로 이조 좌랑을 지냈다. 노년에 이르러 함평 월야에서 해제로 이거해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뤘다

두동·장동 쪽 입향조는 12세 성지
두동은 동·서·북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이 출입구이다. 두동이란 마을의 이름은 형국이 곡식을 재는 말과 같다고 하여 두(斗)자를 썼다.
두동마을에는 곡수와 샘물이 있다. 두동마을의 샘물은 말곡식(斗穀) 밑 암반에서 흘러내린 곡수(穀水)로 부와 장수의 생명수로 알려진다. 두동마을에서는 풍수지리에 따라 옛날부터 마을 안에 샘을 파지 못하도록 했는데 공교롭게도 마을 샘은 곡통 밑 암반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온다. 마을의 50여 호가 이 샘물 하나로 식수를 해결했다고 하니 샘물의 양을 짐작할 수 있다.

복천리 입촌조는 12세 성지(誠之)로 1433년께 학교면 복천리 내동마을로 이거한 것이 처음이다. 후손들이 마당실 명당터를 잡고 무안파조 희안의 제실인 영사재(永思齋)와 진사공 이하 9세 세인(世人), 10세 인호(仁浩), 11세 흥의(興義) 흥도(興道) 흥예(興禮) 흥지(興智) 4형제와 4세 7위의 단소를 마련하고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 세일제로 봉사한다. 또한 마당실에는 12세 성지의 묘소가 있어 매년 음력 10월 10일 시향을 지낸다. 영사재 현판은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다. 내동마을 뒤에는 16세 대용(大容), 17세 현(玹), 18세 일유(一儒), 19세 문국(文國), 광국(光國), 20세 징(徵)의 묘소와 제실 존경각(存敬閣)이 있다.

두동(斗洞)에는 교육을 시행한 육영재(育英齋)와 효행을 표상하는 세효각(世孝閣)이 남아 있다. 육영재는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1799년 22세 노태신(魯泰臣,1752~1828)이 문중의 후손과 향리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마을 서쪽 언덕에 세운 강학소다. 그의 호가 육영재이기도 하다. 초·중·고등반과 대학반을 두었는데 인근은 물론 다시면과 문평면에서도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세효각 현판


두동마을에는 효행을 표상하는 세효각과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하고 화목하게 살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한 체화재(닉花齋), 농계처사노공유적비(聾溪處士魯公遺蹟碑)가 남아 있다.
학문과 효행으로 유명한 두동마을에서는 현인과 효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서도 27세 노승행(魯勝行)과 아들 혁준(赫俊) 딸 정연(禎姸) 3부자녀가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한 마을이다.또 육영재를 세운 노태신의 후손 가운데 3대(代)의 효자를 배출했다. 23세 묵담공 노봉채(1782~1845), 24세 죽계공 노영수(魯榮璹,1806~1887), 25세 노재홍(魯在弘, 1839~1884) 등이 그들이다.
두동마을에는 약 600년 수령의 느타나무(함평군 보호수지정)가 있다. 매년 당산제를 지내오다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폐지되엇다.
세효각 기


16세 때 내동에서 장동으로 이거
장동은 복천리 2리에 속하며 석천동·장동·신동 3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인 1580년께 함평노씨가 입촌하여 살기 시작했고 30년 후 함평이씨들이 들어와 살다가 동학혁명 이후 함평이씨들이 타지로 이거하여 함평노씨 집성촌이 되었다.

장동은 고막천 상류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나주시 문평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죽정리 호암, 북쪽으로는 두동·외치동 복산, 남쪽으로는 고막리 원고막과 인접해 있다.
함평노씨 장동 입향조는 16세 대성(大成)대(代)로 추정된다. 선조들이 살던 내동은 터가 좁아 훗날을 위해 장동에 새로운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동마을에 있는 영모재(永慕齋)는 13세 회명(懷明), 14세 몽호(夢虎), 15세 홍(弘) 등 3위를 배향하고 있다.

장동마을 출신으로 13세 노회명(魯懷明)은 12세 성지의 3남으로 조선왕실 내금위보공장군부사과(內禁衛保功將軍副司果, 현, 청와대경호실 차장)을 지냈으며 왕실보위 공로를 인정받아 임야 45만평을 하사받았는데 함평노씨 문중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묘는 장동에 있다. 회명의 손자인 노대성은 광릉참봉을 지냈으며 석천 노영훈(魯榮勳,1807~1858)은 생전 효행이 뛰어나 1890년 왕실에서 정려를 건립하고 교지를 내렸다.노근후(魯根厚,1909~?)는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1971년 국민훈장 독백장을 받았다.

장동마을 입구에는 함평노씨 제실인 귀후재(歸厚齋)가 있었는데 최근 노후되어 철거되었다, 귀후재는 1950년 창건되었으며 14세 몽호 성균관 진사, 17세 현(玹)을 추모하는 제실이다.
장동마을에는 석천 노영훈 효행비와 왕실에서 내린 교지를 돌에 새겨 비긴 효자각이 있으며 석천공 묘갈명, 27세 노득수의 부인 평강채씨 효열비, 을산 노근후 선생 숭덕비가 남아 있다.
학교면 마산리 청수원에도 함평노씨 집성촌이 있는데 두동·장동에서 이거한 후손들이다.

나주파 금계 노인선생 유명
나주파는 현감공 노성안의 아들 9세 노세기가 처가인 문평으로 이거하면서 세거지를 형성하게 된다. 나주파 가운데서는 16세 금계공(錦溪公) 노인(魯認, 1566∼1622)이 유명하다. 문평면 명하마을 출신으로 160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수원부사(水原府使), 황해수사(黃海水使)를 지내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칭병하고 귀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을 따라 이치(梨峙)·행주·의령 등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적탄에 맞아 일본 사츠마번(가고시마)에 포로로 잡혀가 3년간 억류되어 있던 중 명나라 복건 차관(差官)으로 온 임진혁(林震齊)의 배편으로 동료 기효순(奇孝淳)과 함께 명나라로 탈출하였다.
금계공 노인 영정


그 뒤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강론할 때 해동부자(海東夫子)란 칭호를 들었으며 신종(神宗)으로부터 말 1필을 하사받고 1599년 귀국하였다. 1604년 진용교위(進勇校尉)로 있을 때 당포(唐浦)에 남아 있는 왜적을 격파해 선조로부터 「당포승전도(唐浦勝戰圖)」를 하사받았다. 저술로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을 때 지은 「피부동고록(被첮同苦錄)」·「거왜수록(居倭隨錄)」·「왜국지도(倭國地圖)」가 있으며,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 6권 2책이 있다.

특히 보물 311호로 지정된 금계일기는 일본의 포로가 된 1599년(선조 32년) 2월 22일부터 탈출기와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그 나라의 제도와 풍속, 학자들과 논의했던 내용을 일기와 시로 쓴 책이다. 선생이 중국에 도착해서 장관(將官)의 요청으로 지은 절구 두 수가 전한다.
보물 제 311호로 지정된 금계일기


오서채증흠차수병장관 손계작
(浯嶼寨贈欽差水兵將官 孫繼爵) 二絶
(오서채에서 흠차수병장관 손계작에게 주다)

一葦遠放扶桑下 일위원방부상하
便到中華日來旬 편도중화일래순
鼓角軒門問號令 고각헌문문호령
浮人喜見泰平春 부인희견태평춘
한 쪽배 멀리 동해로 갔다가
중국으로 일순도 못되어 왔도다
헌문에 고각일고 호령이 드문데
잡현도 사람도 태평의 봄을 맞는구나

雨過汀洲物色新 우과정주물색신
楊花如雪覆靑 양화여설복청빈
樓船閒拏那樹 누선한라기나수
士卒爭稱李牧人 사졸쟁칭이목인
비 지난 물가에 풍경이 새로우니
버들꽃 눈과 같아 푸른 물풀을 덮었다
누선이 떠서 한가롭게 일이 없으니
사졸들은 서로 이목(조의 명장)의 인자함을 말하도다.

선생은 44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금계정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묘소가 나주군 노안면 유곡리에 부인 양씨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나주 문평면의 도로명 가운데 금계로는 금계 노인 선생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선생을 모시는 사당인 금계사가 1789년 창건되었다가 훼철된 뒤 1814년 거평사(居平祠)로 개칭하여 복원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선생의 위패는 이곳 거평사와 무안군 해제면 학산사(鶴山祠), 순천시 서남면 모금제(慕錦齊), 금산사, 봉산사, 관봉사, 광주 무광사 등에 배향되었다. 거평사는 나주시 문평면 동원리 무학산 기슭에 있다. 원래는 노인의 호를 따서 금계사라 했는데 노인의 9대조 노신과 ‘당포해전 승첩도’를 하사받은 관암공 노홍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거평사로 고쳤다. 2007년부터는 문충공 노목 시조도 함께 봉안하고 있다.
거평사


거평사는 입구의 무학문(舞鶴門) 경의재(經義齋) 충의문(忠義門)을 지나 맨 위에 있는 사당이다. 거평사에는 시조인 문충공 노목의 위패가 중앙에 있고 오른쪽에 금계 노인, 왼편에 임란공신 관암공 노홍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금계의 위패 뒷면에 대형 초상화도 있다.

현감공의 후손들로는 11세 둔은(遯隱) 노종주(魯宗周), 금계공의 4촌형 노의(魯義), 17세 노대련 등이 있다. 둔은은 문평에서 영암으로 이거한 입향조로 단종복위 운동에 실패하고 은적산 장복동에 은둔하였다.
16세 노의(魯義, 호 주촌)는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 휘하에서 행주대첩에 참여했으며 정유재란 때 이복남 휘하에서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다가 순국했다. 묘는 영광 묘랑 매자정에 있다.
17세 노대련(?~?)은 정유 의병장 노대중의 아들로 무과급제 후 훈련원 주부를 지냈으며 신경정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진압한 1등 공신으로 묘가 무안군 몽탄 화산에 있다.

한편 영암군 서호면 영풍리에는 관봉사(冠峯祠)라는 함평노씨 사당이 있다. 악은(岳隱) 노신(魯愼), 둔은(遯隱) 노종주(魯宗周), 금계(錦溪) 노인(魯認)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악은과 금계는 이미 소개되었고 둔은 노종주(문평)는 문무를 겸비해 일찍이 세종의 지우(知遇)를 받았는데 단종 복위운동 실패 후 영암 은적산 장복동에 은둔하였다. 이들 세 분은 충성과 절개, 지조와 의리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재실인 술유재(述裕齋)는 선조의 위업을 계승하고 훌륭한 자손이 이어지길 바라는 공간으로 술선유후(述先裕後) 수유후곤(垂裕後昆) 등 《서경》에서 유래하였다. 재실 주련의 전가대의(傳家大義) 세이고풍(洗耳高風) 등은 의를 숭상하고 청렴을 강조하는 글들이다. 제향일은 음력 2월말 토요일이다.
영암 관봉사


무안 해제 한림공파 슬산 종가 보존
한림공파는 17세 무민당 노덕원(1564~1636)이 무안 해제로 입향하면서 세거지를 이룬다. 노덕원은 조헌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의했으며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한산과 명량해전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노년에 이르러 함평 월야에서 이곳으로 이거해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뤘다. 지금의 해제면 대사(大士)리 신사마을로 그의 무덤과 비, 그리고 제각인 영수재가 학암 마을에 있다.

무안해제에 있는 봉대산 자락에는 풍수지리에서 하늘의 옥녀가 비파를 타는 형국이라는 옥녀탄금 명당에 자리한 슬산마을이 있다. 한때 군비 저장고가 있던 이 마을에 장춘오헌(長春塢軒)을 짓고 때론 북벌을 상소하고 서당을 열어 계몽에 앞장서 온 가문이 함평노씨다.
무안 슬산 종택 장춘오헌
해제의 함평노씨 집성촌은 대사 1리 신사마을이다. 신사라는 마을의 지명은 원래 흰새가 들어오는 의미의 ’흰새래‘라 불러오다가 노유성이라는 선비가 새로 이룬 마을이라 해서 새로울 신(新) 선비 사(士) 올 래(來) 자를 써서 신사래로 불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來’ 자를 빼고 신사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해제 8명당 중의 하나인 백학귀소(白鶴歸巢)의 명당지로 꼽힌다.

이 마을은 백학산 줄기인 제재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제재봉은 주민들이 분산등이라 부르기도 한다. 함평노씨와 슬산마을의 함평이씨 소유의 산으로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낸 봉우리가 있다.
해제면에서는 함평노씨가 대성(大姓)으로 백학산의 일부와 학송리 농지의 대부분이 노씨 소유다. 고시합격자 3명을 포함하여 학계·재계 등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윤성민 전 국방장관의 고향이기도 하다. 무안에서 기독교가 가장 빨리 들어온 곳이 해제여서 목사가 10여명 이상 배출되기도 했다.

봉대산 일주로에서 슬산마을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돌면 마을 입구 안산 밑에 관란재와 학산사(무안군 향토유산 제8호)가 나란히 있다.
해제 학산사
건물 사이에는 1934년에 세운 ‘관란선생노공망곡단비’가 있다. 관란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2개의 정려가 모셔져 있으며 4개의 현판이 있다. 마당에는 두 그루의 아름드리의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다. 학산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나주군 문평면 원리에 세워져 있었는데 당시에는 노신의 호를 따서 악은사(岳隱祠)라 불렸다.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16년 25세 노연백(魯淵白)이 이곳에 다시 세웠다. 배향된 분은 악은 노신, 금계 노인, 관암 노홍, 경당 노일상, 관란재 노연백 등 다섯 분이다. 학산사란 현판은 석촌(石村) 윤영구(尹永九, 1853~1939))가 썼다.


악은 노신과 금계 노인은 앞에서 기술한 바 있고 관암 노홍(1561~1619)은 임란공신이며 경당 노일상(1842~1912)은 구한말 위정척사를 주장하였다. 관란재 노연백(1849~1920)은 충절로 유명하다. ‘관란선생노공망곡단비’는 1934년에 후손들이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노연백(魯淵白, 1849~1920)은 해제의 높은 선비로 존경을 받았다.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여 주경야독으로 글공부를 하였으며 근검절약하여 마을에 서당을 짓고 훌륭한 스승을 맞이하는 등 후세교육에 이바지하였다.
관란선생 망곡단비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914년 관란재라는 정자를 건립하여 호서·호남의 선비들에게 강학을 실시했다. 노연백은 1895년 의병 활동을 하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편 고종이 승하했을 때 불편한 몸을 이끌고 뒷산 제재봉에 올라가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학산사 밑에는 제를 지낼 때 음식을 준비하는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정절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9월 중정일에 제를 모신다.

이 마을에는 100여 년 전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동계책과 계책(1915년에 작성)이 남아 있다. 하지만 관란재가 잘 관리되지 않아 안타깝다. 특히 나라로부터 받은 2개의 정려가 쓰러져가는 정자 안에 모셔져 있어 아쉽다. 마을에는 해사 노병전 선생의 교은비와 노병순 효행비가 있다.
해제에는 슬산 종택 장춘오헌(무안군 향토문화유산 제20호)을 보존하고 있으며 의관이었던 호정 노병희 선생이 쓴 황명유운·호정유고 등 임란 이후 기록자료 1천여점을 잘 보존하고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충효의 얼 빛난 가문
함평노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문과 노극명(魯克明) 노성탁(魯聖鐸) 노연령(魯延齡), 무과 노귀인(魯貴仁) 노명달(魯明達) 노문혁(魯文赫) 노선(魯選) 노선남(魯先男) 노승운(魯承云) 노얼쇠(魯於里金) 노유생(魯有生) 노종주(魯宗周) 노흥문(魯興文) 등이다.
특히 충효의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4세 노관도는 수문전 태학사를 지내고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7세 무열공 노신(1336~?) 고려 충신으로 홍건적을 격퇴하고, 김용의 난에 개성을 수복한 공을 세웠다.
앞서 기술한 16세 금계 노인은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해 수원부사, 황해수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권율 장군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당포승첩도’에 참전한 28장수에 올랐다 ,정유재란 때는 적정을 살피다가 중국으로 탈출해 당대 일본·중국의 풍물을 ‘금계일기’(보물 제311호)에 담았다.

16세 노홍(1561~1619, 호는 관암, 시호는 충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진, 위대기와 함께 금산 이치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장군 휘하의 부정(副正)으로 활약해 선무원종 이등공신에 녹훈됐다. 남도포만호, 임치진첨사, 훈련부정을 역임했으며 1604년 당포 앞바다에 출몰한 왜의 무장선단을 나포해 승전고를 울리고 선조로부터 ‘당포전양승첩지도’(전남유형문화재 제25호)를 하사받았다. 그는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명·후금 전쟁에 파병됐다가 1619년 만주의 부차전투에서 순국해 순충적덕보작공신에 올랐다. 나주 거평사에서 추모한다.
17세 노덕원(1564~1636, 호는 무민당)은 중봉 조헌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창의해 금산에 이르렀는데 이미 패한 상황이라 의병을 이끌고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한산과 노량해전에서 활약해 승전에 기여했다. 그는 1627년 추천으로 이조좌랑을 지냈다.

무민당의 세 아들이 노사성·노신성·노유성이다. 이들 3형제는 병자호란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셋째 아들 18세 서은 노유성(魯有聖, 1621-1698)은 효종 때 북벌을 위한 병량을 납입하여 도우니 임금이 중림찰방(역참을 돌보던 외관6품)을 제수하게 된다. 기사환국(1689년)으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이곳 슬산으로 돌아와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26세 경당 노일상(1842-1912)은 조선 후기 연재 송병선의 문인으로 사례요람·채기신편·송록정요를 남겼으며 구한말 위정척사를 주장하였다. 27세 노병희(魯炳熹, 1850~1918, 호는 호정)는 최익현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의관으로서 정 3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최익현과 창의를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은 등 한말의병으로 활약하며 곡성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대마도에 끌려가 단식으로 병을 얻은 스승 최익현을 치료하였으며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손자 노진룡(魯鎭龍, 29세)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근현대 인물 다수 배출
함평노씨 가문에서는 일찍이 장학재단을 설립해 장래가 촉망되는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성공한 인사들이 많아 후세들을 위해 장학금을 조성한 것이지만 장학혜택을 받은 이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함평노씨는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사들을 배출했다. 8,9대 국회의원을 지낸 노진환(魯璡煥, 29세), 전 광주시장 노인환(魯麟煥), 29세) 노승행(魯勝行, 27세) 제34대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 광주지법 목포지원장을 지낸 노영대(魯榮大, 27세) 변호사,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낸 노인수 변호사 (27세), 노상균 전 광주지검 순천지검 부장검사(28세), 노재관 전 서울지법 판사 (변호사, 30세) 전 서울중앙지법부장판사 노만경(魯萬景, 29세) 변호사 등 고시 출신의 법조인이 많다.

특히 노승행 변호사는 아들과 딸이 나란히 사시에 합격해 딸 노정연(魯禎姸, 28세)은 현 부산고검검사장, 아들 노혁준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28세)이다. 노진홍 변호사(29세)는 행시와 사시에 합격했으며 노영대 전 광주지법 목포지원장(변호사, 27세)의 아들 노준선(魯俊銑, 28세)도 법학전문대학원을 거쳐 법무법인 법가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함평노씨 법조인은 노병건 전 광주고법부장판사(27세), 노병준 전 광주고법 부장판사(27세), 노지은 변호사(28세), 노지현 변호사(28세), 노강규 변호사(28세), 노승민 변호사(30세), 노승은 변호사(30세), 노진영 변호사(30세), 노사욱 변호사(30세), 노 신 변호사 (31세) 등이다.

의료계는 노영일 조선대병원(27세) 노방수 내과원장(27세) 노준화 광주기독병원(28세) 노동규 연합외과원장(28세) 노혁재 병원장(28세) 노윤규 조선대병원(28세) 노은후 조선대병원(28세) 노창석 내과원장(28세) 노현경 의사 (28세) 노준성 미국 하버드대교수(28세) 노보근 구례서울안과원장(28세) 노두영 내과원장(29세) 노종찬 담양연세의원장 (29세) 노영선 치과원장(29세) 노경준의원원장(29세) 노사봉 의사(29세) 노경선 서울 수산병원(29세) 노광을 성형외과원장(30세) 노재혁 전남대치대병원(30세) 노승영 고려대병원(29세) 노혜원 바른유병원 원장(29세) 노용성 여수전남병원(29세) 노경 성형외과원장(31세) 노현진 호주 신경외과원장(30세) 노성용 미국의사(30세) 노미리비 연세대 병원(30세) 노사라 독일의사(31세) 등이다.

교육계는 노진영 전 목포대총장(28세) 노병환 전 동방대학원교수(27세) 노성희 건국대교수(27세) 노일숙 전 전남부교육감(28세) 노희천 순천대교수 (28세) 노희정 광주교대교수(28세) 노봉오 전 조선대교수 (29세) 노만진 광주대교수(29세) 노송완 단국대교수 (30세) 노도영 광주과학기술원교수(30세) 등이다.

경제계의 노동일 민코회장(31세) 노경수 삼영상사 대표회장(27세) 노영삼 대한건설 대표이사(27세) 노대숙 대성화학 회장(28세) 등이며 관계의 노병설 광주지검 사무처장(27세) 노승길 전남농업진흥원장(27세) 노병해 전 남원세무서장( 27세) 노승기 전 소방청장(28세) 노근안 전 국정원 부이사관(28세) 노주영 시흥경찰서장(29세) 노길준 노동부 부이사관(31세) 노경희 육군 준장(29세) 노재호 전 순천경찰서장(29세), 노대영 전 광주시의원(30세), 문화예술계 노창수 한국문협부이사장(27세) 한국화가 노경상(28세) 씨 등이다.

본 취재 자문을 맡아주신 분은 노학수 함평노씨 대종회장(28세), 노광숙 전 함평노씨 대종회장(28세) 노점석 전 부림종합건설 대표이사(29세), 노기욱(魯起旭) 호남의병연구소장(30세) 노학봉 영암 관봉사 대표(30세) 등이다.

글 지형원<문화通 발행인> 임철진<사진작가>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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