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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4일(토요일)

20.순천 주암 죽림리·주암리

옥천 조씨 동족마을 겸천서원 상호정 등 유적 많아
‘生死進退 無愧義字’ 종훈 새겨 ‘충절의 피’ 면면히
2019. 08.12(월) 13:43확대축소
겸천서원 전경
광주 밖으로 나가면 5월이 눈부시다. 신록과 꽃이 어우러져 꽃가지 꺾어들고 화전놀이라도 할까보다. 오늘은 함평천지로 시작하는 호남가 한 대목 ‘태인(泰仁)하신 우리 성군 영학을 장흥(長興)하니 삼태육경은 순천심(順天心)이요’를 읊조린다. 동광주 나들목을 빠져 담양을 지나면서는 ‘백리 담양(潭陽)에 나리는 물은 구비구비 만경(萬頃)이요’를 몇 차례 따라 부르다보니 순천 주암이 눈앞이다.

옥천(玉川) 조씨(趙氏)들의 세거지인 순천 주암면 죽림·주암리는 남해고속도로 주암 나들목을 빠져나가 면소재지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돌면 야트막한 산아래 대나무 숲에 어련히 모습을 드러낸다. 죽림리는 말 그대로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흐르고 뒤로는 대나무숲이 우거진 마을이다. 한국의 100대 명당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닌 것 같다.
죽림리 일대는 현재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70%가량이 옥천 조씨다. 지금은 상당수가 빠져나가 그 수가 많지 않지만 마을에는 상호정, 겸천서당, 겸천사, 정려 등 옥천 조씨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집안이 벌족했음을 말해준다.
상호정


옥천 조씨의 시조는 조장(趙璋)

옥천 조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문신으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문하시중을 지낸 조장(趙璋)이다. 조장의 증손 조원길(趙元吉)이 공양왕 때 대광보국광록대부(大匡輔國匡祿大夫)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겸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옥천을 본관으로 했다. 옥천은 순창의 옛 이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씨들은 옥천과 순창을 병기(倂記)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대종회의 명칭도 옥천(순창)조씨 대종회로 표기하고 있다.

조장의 원래 이름은 조준(趙俊) 또는 조준장(趙俊璋)이다. 『순창 군지』에 조장과 아들 판서 조홍규(趙弘圭)와 손자 옥천군(玉川君) 조전(趙佺)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이들 3대가 순창에 살았고, 그들의 후손들이 세거해 오면서 처음에는 본관을 순창으로 써 오다 1890년(고종27) 간행된 『경인보(庚寅譜)』에서부터 본관을 옥천으로 바꿨다.
『순창 군지』에 “고려 중엽 조장이 음사로 검교 대장군에 임명됨[高麗中葉趙璋以蔭仕官檢校大將軍]”이라고 씌어 조장의 득관(得貫)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재의 순천 주암에 거주하고 있는 옥천 조씨들은 원길의 둘째 아들 5세 유(瑜.1346-1428)가 말년에 순천 부유현 겸천에 입향한 뒤 번창하게 된다. 조장의 아들 판서군(判書君) 홍규(洪珪)는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식량 관련 업무를 맡은 기관장)를 지냈고, 손자 전(佺)은 삼한벽상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증손자인 4세 원길이 옥천 조씨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1389년(창왕 2년) 정몽주, 설장수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고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을 옥천으로 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고려 충목왕 1년(1345)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국무총리)을 지냈다. 농은(農隱) 조원길은 공양왕 때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학전(學田)을 설치해 인재를 양성하고 청렴 공평한 사람을 어사로 삼아 밝은 자를 높여야 하며 곡식을 저축하여 군사를 양성해 외침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상호정 현판
영모재 현판


그러나 원길은 고려가 망하자 가족을 이끌고 송경(지금의 개경)에서 옥천(순창)으로 물러나 여생을 보냈다. 이후 고려에 절의를 지키기 위해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농은 조원길은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도은(陶隱) 이숭인, 야은(冶隱) 길재와 함께 5은(隱)으로 불린다. 농은이 송경을 떠날 때 포은과 목은이 시를 지어 송별했는데 목은이 지어준 시가 월정 윤근수의 ‘월정집’에 전하고 있다.

농은이 낙향하여 지내면서 후손들에게 전한 말이 ‘생사진퇴(生死進退) 무괴의자(無愧義字)’다. ‘죽고살고 나가고 물러남에 의(義)자를 부끄럽게 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녀들에게 들려준 가훈이었지만 하나의 종훈(宗訓)으로 이어져 옥천 조씨들의 가슴에 면면히 700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忠義의 정신 면면히 이어져

그래서 옥천 조씨 가문에는 유달리 충신과 의사, 열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단종 복위운동에서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구한말의 의병활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인재들이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농은은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두 아들이 불사이군의 자세로 조선의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조유의 두 아들과 손자(철산)가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해 참화를 당했다. 또한 조선 숙종 때 삼도통제사를 지낸 조이중(趙爾重)은 정론을 펴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앞장섰다. 그는 숙종 때인 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도총부 도사·내금위장, 전라좌수사·경상수사, 경기수사 등을 거쳐 삼도통제사 춘천부사 등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문장과 지식이 훌륭하고 논의가 확실하여 국가의 대사와 사림의 시비를 결정함이 확고했다.

그는 나라를 위해서는 강한 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론(正論)을 폈으며 반대당으로부터 모함과 탄핵을 입기도 했지만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에 기록되었다.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 묘가 있으며 그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과 홍주익(洪柱翼)이 지은 『성인전(成仁傳)』, 『호남절의록』에도 보인다.
또 한말의 의병장 조규하(趙圭夏)는 승주지방 의병장으로서 승주·곡성·보성·여수 등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항일의병활동 ‘12의사’로 면암 최익현과 함께 했던 조우식(趙遇植)과 조영선(趙泳善) 등도 있다.
조보훈 옥천(순창)조씨 대종회장은 “이 같은 충절의 정신은 농은 원길(元吉) 할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지금까지 밖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은 것도 조상들로부터 배운 겸양 때문”이라 말한다.
겸천서원 입구에 새겨진 안내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1박2일의 역사기행을 시작한다.

農隱 조원길의 둘째 瑜가 순천으로 입향

원길은 영(瑛) 유(瑜) 근(瑾) 염(琰) 숙() 등 5형제를 두었다. 장남 요재공(樂齋公) 영은 고려조 천문과 역수를 담당하는 서운과부정과 전공판서를 지냈고 유는 고려조 전농시부정을 지냈다. 영은 조선개국 후 태종이 이조판서와 세자 사부로, 유에게는 한성부 판윤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이라는 절의로 끝내 나가지 않았다.
현재 순창군 적성면 내월리 내적마을에 살고 있는 옥천 조씨들이 요재공파 후손들이다. 그의 후손인 모충재(慕忠齋) 조여관(趙汝寬)은 적성면 운림리 임동마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둘째 부정공(副正公) 유가 지금의 주암의 입향조로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사람이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고려가 망하자 시골에 은거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태종(太宗)은 이들 3부자를 가리켜 부자삼현(父子三賢)이라 칭송했다고 전한다.

셋째 광양공(光陽公) 근은 과거에 나가 광양현감으로 일하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손위의 두 형에게 “저는 고려조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새 세상인 조선에서 벼슬을 해 뜻을 이루겠다.”며 과거에 나가 단번에 급제한다. 그러나 벼슬을 오래하지는 않았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죽은 후에 조정으로부터 병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었다.

넷째 절제공(節制公) 염은 과거에 급제해 보공장군 절제절도위 겸 북도함성 만호장을 지냈다. 다섯째 숙은 후손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기록이 없다.
옥천 조씨 4세 원길과 아들 5형제는 여말선초 격동의 시대에 고려조에 대한 절의와 새 왕조인 조선의 부름 사이에 끊임없이 얼마나 많이 고뇌했을까?

두문동 72현의 한분인 조유

부정공 조유는 절의와 효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고려 말 진사로 문과에 급제해 중현대부 전농시부정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입향조 조유의 네아들을 상징하는 네기둥

태조가 여러 차례 영광군사 자헌대부 검교한성윤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특히 그는 부모상을 당해 몸소 흙을 져다 봉분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해 삼강행실에 전하고 있다. 당시의 풍속은 부모상을 당하면 대부분 100일 탈상을 했으나 조유는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가 그랬던 것처럼 3년 상을 치른 것이다. 그리고 말년에 순천 부유현 겸천(지금의 주암면 죽림리)으로 옮겨와 살았다. 주암으로 이거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으나 박중림. 박팽년 부자 등 순천 박씨와 교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죽자 세종대왕은 육관을 보내 일품의 장사를 지내게 하고 ‘효자부정조유지여(孝子副正趙瑜之閭’란 정려를 하사했다. 또한 세종은 어제시(御製詩) 18구를 직접 내려 보내기도 했으며 하사한 정려는 상호정 담장 안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세종대왕 어제시(御製詩).

聖朝不屈忠臣節 (성조에서 충신의 절개 꺾지 않으니)
小子微衷在述事 (소자의 적은 충정으로 일을 기술하네)
淵明號猶晉處士 (도연명은 오히려 진나라처사로 자처하고)
子陵官非漢諫議 (엄자릉(嚴子陵)도 한나라 간의 대부 사양했네)
前朝雪月暎金石 (전 조정의 흰 달은 금석에 비추고)
孝子丹心書庸識 (효자의 붉은 마음 빗돌에 새겼네)
先生忠節本於孝 (선생의 충절은 효도에 근본하고)
事親餘誠殉國志 (부모 섬긴 정성으로 순국의 뜻 두었네)
淸標伯夷採薇山 (맑은 지조 지닌 백이는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고)
至行高柴泣血淚 (지극한 행실 지닌 고시는 피눈물 흘렸다)
先朝好爵不移操 (전 조정의 좋은 벼슬에도 지조 굽히지 않고)
君子貞心松柏翠 (군자의 곧은 마음 송백처럼 푸르르네)
南州古宅考槃處 (남쪽지방 거처하던 옛 집에)
旌孝彛章嘉乃意 (효자정려 내린 아름다운 뜻)
淸芬尙鼠百行源 (맑은 향기는 백가지 행실을 끌어 당기고)
美蹟將垂三尺誌 (아름다운 행적은 석자 지석(誌石)에 새겼네)
新天爵祿示若雀 (새 조정의 벼슬과 녹봉 모욕으로 여겼으니)
炳日丹忠知不二 (해처럼 밝은 충성 두마음 몰랐네)
因其舊啣表其閭 (그 옛 직함으로 정려를 내렸으니)
特志王章恩禮異 (특별히 내린 나라의 은혜 우악하네)
之仁之德豈二心 (인과 덕이 어찌 두 가지 마음이랴)
惟孝惟忠同一致 (효와 충은 다 일치한 것)
人間公以故國臣 (인간인 공은 고국의 신하요)
葬亦銘旌副正字 (죽어서의 명정도 부정자였네)
孤臣素節石可語 (외로운 신하의 깨끗한 절개 돌에 새기니)
也應忠魂欣不寐 (충성그런 넋 기뻐 잠 못 이루리)
高風推憶冶隱家 (높은 풍성의 야은가를 생각하니)
注書前啣兩無愧 (주서와 부정 둘 다 부끄럼 없네)
斯人斯孝表章地 (이분의 그 효도를 표장한 마당에)
石面官啣何以記 (빗돌의 관직울 무어라 기록하랴)
生前表志沒後願 (생전에 들어낸 뜻 죽어서도 원하리니)
豈曰違之意可遂 (어찌 그 뜻을 어길 수 있으랴)
君親大義視無間 (임금과 어버이의 사이 두지 않음은 )
臣子彛倫賴不墜 (신하의 떳떳한 도리 떨어뜨리지 않네)
移忠恨未作我臣 (그 충성 옮겨 우리 신하 안 됨 한스러워)
紂望金烏興感思 (서럽게 금오산 바라보니 감회 무한하네)

그의 묘소는 주암면 주암리 장군봉 오공혈에 있다. 무학대사가 잡아 준 2개의 터 가운데 하나인데 천하의 명당이 따로 없다. 좌청룡우백호가 여러 겹으로 감싸 안고 힘차게 흘러가는 지세가 힘차고 당당하다. 지리산을 지나 백운산을 거쳐 내려온 혈맥이다. 산소 입구에 제각인 정헌재가 있다.
조유의 묘


무학대사가 잡아주었다는 또 하나의 묘터가 전북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산86-14번지에 있는 옥천 부원군 조원길의 묘다(전라북도 기념물 제124호) 조원길과 옥천군 부인을 함께 장사한 봉토분으로 묘역의 형태와 배치가 고려 시대 능묘와 매우 유사하다. 묘비는 1391년 조원길 당시 아들 조유가 세운 것으로 마멸이 심해 비문을 식별하기 어려우나 정밀 탁본을 통해 42자의 글씨를 밝혀냈다고 한다. 비문 내용은 “1391년(홍무 24) 신미 신축 삭 삼십 일 임오에 전공 판서 조원길과 옥천군 부인 조씨를 함께 장사한 묘이며, 효자(부모의 제사 때 자식을 가리키는 말) 전 부정 조유 찬 서자”로 되어 있다. 고려 시대 묘역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신도비는 면암 최익현이 썼으며 최익현 문집 25권에 실려 있다.

6세 사문·숭문, 7세 철산 참화를 당하다

조유는 참의공(參議公) 사문(斯文.1398~1483) 절민공(節愍公) 숭문(崇文, ?~1456) 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형제는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해 화를 당한다. 그리고 숭문의 아들 교관공(敎官公) 철산(哲山, ?~1456)도 단종 복위와 관련해 세조 2년(1456년)에 참화를 당했다.

큰아들 사문은 수의부위 좌군사정을, 둘째 숭문은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지냈는데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했다. 사문은 집안의 대를 이으라는 동생의 간곡한 읍소에 못 이겨 도중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결국은 순천에서 체포되어 개경으로 압송 중에 전주에서 처참하게 처형당했다. 숭문이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것은 그가 성삼문의 고숙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조숭문 교시


숭문의 아들 철산도 조선초기의 지사로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고신(告身)을 환수당하고 원지에 유배되어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당시 7살이던 철산의 아들 경(瓊)은 강화도로 보내져 외롭게 살았는데 훗날에야 복권이 이뤄졌다. 그러나 충의의 피는 면면히 흘러 원길의 후손 정(挺)이 장남 경눌(敬訥)과 차남 응눌(應訥), 그리고 종질 효원(孝元)을 데리고 식솔 700여 명과 함께 고경명 장군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벼슬에 나갔던 20명의 조씨들이 관직을 버리고 동참하자 여수 순천 보성 곡성에 있던 관리 50여명이 여기에 가담하고 이들을 따르는 사람까지 무려 2천여 명이 금산전투에 합류하게 된다.
특히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할 만한 일이 있다. 이들이 의병으로 나갈 때 ‘옥천인’이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금산전투에 참가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씨들은 부유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잘 보살펴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의병을 창의할 때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고 ‘옥천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조정(趙挺)은 금산전투에서 숱한 공을 세웠으며 9척 장신의 왜장의 풍운검을 빼앗아 아들 경눌에게 주었는데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정의 종증손 조한중이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또 조정(趙挺)과 금산전투에 참가했던 조정(趙玎), 조식(趙軾) 조철(趙轍) 조여관(助汝寬) 조헌(趙憲) 조엄(趙嚴) 조간(趙侃) 등이 있다. 특히 조정(趙玎)은 금산전투에서 죽어간 의병들의 원한을 풀기위해 부산포해전 의병으로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모아 참전했던 조원개(趙元凱) 조유(趙非), 정유재란의 조정의(趙廷義) 조경남(趙慶男), 그리고 병자호란 때는 조정의 손자이자 조경눌의 아들인 조득신(趙得信).조익겸(趙益謙) 조원겸, 조시술, 조시일, 조시성, 조의길 등 무수히 많다.

이처럼 옥천 조씨 가문에서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과 재산을 기꺼이 바쳤으나 오래도록 이런 일들을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아 숨겨져 왔다.
한편, 조유의 큰아들 조사문은 지산(첨추공) 지곤(정읍공) 지륜(찰방공) 지강(참판공)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이들 후손들은 순천시 덕월동 승주읍(쌍암), 곡성 죽곡, 주암 황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7세 지산은 무과에 급제해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 그리고 숭문은 1779년(정조 3년) 송시열의 현손인 송덕상의 상계에 따라 주암면 죽림리에 정려가 건립되고, 1791년에 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형제의 깊은 우의를 말해주는 相好亭

상호정은 조유(趙瑜)의 큰아들 사문(斯文)의 아들 지산(智山)이 지곤(智崑), 지륜(智崙), 지강(智崗) 등 동생들과 함께 지은 정자다. 이들 형제는 아침저녁 정자에서 만나 형제의 정을 나누고 낮에는 음악과 시문(詩文)을, 밤에는 고금의 역사와 학문을 토론했다 해서 ‘상호(相好)’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곳 죽림리는 조사문이 죽기 전 초야에 묻혀 지내며 후학들을 양성하며 지내던 곳이다. 상호정이란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상호정은 500여 년 전인 성종 5년(1474년)에 건립된 정자로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에 ㄱ자형으로 팔작지붕이다. 원래는 넓은 하나의 경역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겸천사와 영모재, 상호정 영역으로 나누어졌고 관리하는 건물과 대문(충효문, 경모문), 창고(경장각) 등이 있다,

상호정은 건립 이후 정조 8년(1784)후손 병겸이 중수했고 헌종 2년(1836) 복순, 기순 등이. 한말에는 재기, 재완이, 이후에는 문식, 동근의 중수도 여러 차례 있었다. 1981년의 수해 때 정자가 물에 잠겼으나 형태는 바꾸지 않았다.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9호(1984년 2월 29일)로 지정되었다. 상호정에는 네 아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돌기둥이 남아 그날의 우애를 말해준다.
그래서 조유-사문을 거쳐 그의 아들 지산, 지곤, 지륜 지강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참의공(상호정)파라고 하고 조유-숭문을 거쳐 후대로 이어지는 손들을 절민공파라고 부른다. 참의공(상호정)파와 절민공파는 한 할아버지 자손으로서 매년 상호정과 영모재를 오가며 함께 제를 모시며 우의를 나누고 있다.

옥천조씨 3부자를 기리는 겸천서원

역시 죽림리에 있는 겸천서원은 조유, 조사문, 조숭문, 조철산 등 옥천조씨 3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06년(숙종 32) 호남사림이 발의해 1711년(숙종 37) 건립한 사당이다.
언제부터인가 순천을 관향으로 하고,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된 김종서(金宗瑞 1390~1453), 박중림(朴仲林 ?~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도 함께 배향되고 있다.

겸천서원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20년 복설하였으며, 1955년 중건했는데 이때 이름을 겸천서원(謙川書院)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1975년 한 차례 더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겸천사(謙川祠)는 현종 2년(1661년) 순창에 있던 사문, 숭문의 부친인 조 유(趙 瑜)의 정려비를 이건하고 조사문(趙斯文) 조숭문(趙崇文) 김종서(金宗瑞) 박중림(朴仲林) 박팽년(朴彭年) 조철산(趙哲山)을 제사하는 옥천 조씨들의 사우이다.
영모재는 조유가 은거하던 곳으로 조숭문과 그의 아들 조철산이 세조 2년(1456) 에 화를 당하자 조숭문의 손자가 추념하기 위하여 숙종 32년(1706년) 건립한 것이다. 이곳에는 매계 조위, 관찰사 안심, 사촌 장경세, 면암 최익현, 은진 송병순, 부사 이거 등 무수한 당대의 면인 인사들이 들려 시를 남기고 갔다. 영모정 경내에는 2개의 충신각이 있다. 충신각 현판에는 헌종 9년이라고 씌어 있다.

350년 역사의 절민공파 종가

구산리에 있는 조승훈(趙昇勳) 가옥은 옥천조씨 절민공파 종가로 조선 숙종 2년(1676)에 조치형(1642 1754)이 지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약 550여 년 전에 조지곤이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친족 간에 화목과 우애를 돈독히 하는 담락재가 남아있고 귀두정과 경운각이 있다.
조승훈 가옥


조승훈 가옥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 곳간, 제실, 아래채, 중문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이 있던 자리에는 주춧돌만 남아 그날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이 집에는 조선시대의 교지·영지·전령·고서 등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또 식기류와 교지통, 생활 집기류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하다.(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178호)
근대 학문의 요람[搖籃] 조순탁 가옥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된 주암리 조순탁(趙淳卓)가옥은 1855년(철종 6)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조병익이 건립한 옥천조씨 상호정파 지륜의 종가로 1934년에 지어졌다. 대지 면적이 2, 651㎡(803평)이나 되는 넓은 반가(班家)로 솟을대문이 남아 있다. 행랑채를 지나면 행랑마당이 있고 이 행랑마당과 사랑채가 기와 담장으로 구획되어 위치한다. 사랑채 뒷쪽 중문을 지나면 넓은 안마당과 안채가 있다. 안채의 옆에 옆 마당과 별채가 있다.
조순탁 가옥 솟을 대문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에 전·후·좌측에 마루를 둔 一자형의 건물이다. 방의 배치는 왼쪽부터 정재와 정재방, 큰방, 웃방, 대청, 갓방, 공루의 순서이다. 공루의 아래쪽에 지하실을 두었다.

사랑채는 ‘용전정사(龍田精舍)’란 당호가 붙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문간은 솟을대문이 있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가운데 칸은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2칸은 청지기의 기거용 방으로, 또한 나머지 2칸은 마구간으로 썼던 곳이다.
이 집터에서는 수많은 박사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순탁(물리학) 조순승(정치학) 조권국 조권중 조선영 등이다. 조순탁 조순승은 형제이고 권국. 권중은 순탁의 아들이고, 선영은 권국의 딸이다.

근·현대 많은 인물 배출

옥천조씨 집안에서는 우리역사에서 걸죽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특히 옥천 조씨들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충(忠)을 다했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했던 가문이다.
앞에 거론되었던 고려말과 조선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충을 다했던 인물들 말고도 근·현대 들어서도 독립운동가로, 의병장으로, 또 정계와 학계, 재계 등에서 걸죽한 인물을 배출했다.

조경한은 독립운동가로 가문을 빛냈다. 1944년 4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개설할 때, 국무위원으로 선임됐고 8.15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조규하(趙圭夏 1877~1908)는 1906년 임실군수로 재직 중 최익현(崔益鉉)의 창의문(倡義文)에 동조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승주·보성·곡성 등지에서 의병모집과 무기·군자금 조달 활동을 했다.

1908년 승주지방 의병장으로서 승주·곡성·보성·여수 등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곡성 선주산(仙住山) 전투에서 전사, 목사동 중학교 뒷산에 묻혔다. 목사동중 학생들이 ‘조대장 묘’를 오랫동안 벌초를 해오다 20여년전 가족들에게 알려졌다. 여기에 6.25.전쟁 영웅 조달진(22세, 趙達珍, 1928~2008)도 빠뜨릴 수 없다. 지륜의 후손인 그는 육군 일등병 소총수로 6.25때 육탄으로 적 전차를 파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공로를 인정받아 군 일등병에서 이등중사로 특진하고 을지무공훈장, 미동성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여받아 육군소위로 특진했다. 순천 제7391부대 5대대는‘조달진 대대’ 부대명을 제정했으며 그의 고향길을 조달진로로, 또 주암면 구산리 산 64-1 소공원에 그의 흉상을 세워 탱크잡는 영웅을 기리고 있다.

옥천 조씨들은 사문(斯文)의 네아들 지산(智山) 지곤(智崑), 지륜(智崙), 지강(智崗)을 첨추공, 정읍공. 찰방공, 참판공으로 부르며 파를 나누기도 하지만 크게는 사문을 파조로하는 참의공(상호정)파, 숭문을 파조로하는 절민공파로 나눈다.
참의공(상호정)파로는 조경한(21세, 趙擎韓 1900~1993) 임정국무위원, 조옥현(21세, 趙玉鉉 1903~?) 제헌 국회의원, 조연하(22세, 趙淵夏, 1924~2006) 전 국회부의장, 조순승(22세, 趙淳昇, 1929년~) 13, 14, 15대 국회의원, 조순용(22세, 趙淳容, 1951~ )전 청와대 정무수석, 조보훈(24세, 趙寶勳, 1946~) 옥천조씨 대종회장, 전 전남부지사, 조재환(24세, 趙在煥, 1949~) 전 국회의원 등이다.

조순탁(1925~)은 일본교토대학과 서울대학교를 거쳐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통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교수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원장 한국물리학계의 거장이다.
또 사문의 동생 숭문은 아들 철산과 함께 참화를 당했으나 손자 두문공(杜門公) 경(瓊)을 두어 후대를 잇는다. 절민공 후손들은 주암과 쌍암 황전 송광 등에서 번창한다.

절민공 후손으로는 조동회(23세, 趙東會1945~) 전 옥천조씨 대종회장, 조규정(23세, 趙圭政, 1948~) 전 검사장, 조한규(23세, 趙翰圭, 1955~) 전 세계일보사장, 조충훈(24세, 趙忠勳1953~) 전 순천시장, 조홍규(25세, 趙弘圭, 1942~2015) 전 국회의원, 조은석(25세) 법무부 사법연수원장, 조용철(26세, 趙鎔澈, 정치학박사) 전 호남대 신방과 교수가 있으며, 기독교 유입초기 오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한 조상학(趙相學, 1876~1950)이 기독교사에 남아 있다.
조준영(26세, 趙晙詠) 옥천(순창)조씨대종회 사무국장은 “지금까지는 가문의 역사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후손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문중소장의 각종 교지나 고문서 등을 정리하고 새로 발굴된 역사적 사실을 덧붙여 전자족보를 제작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조씨는 풍양·한양·옥천 등 10개가 大本

여기서 잠시 한국의 조씨들에 대해 알아보자. 조씨는 조선조에서 세도가문으로 손꼽히는 명문(名門)이다. 조씨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본관이 30여 본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 풍양(豊壤)·한양(漢陽)·양주(楊州)·임천(林川)·배천(白川)·함안(咸安)·옥천(玉川)·횡성(橫城)·평양(平壤)·김제(金堤)·직산(稷山) 등 10여 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양주·평양·임천·배천 등은 송대(宋代)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양주 조씨의 세보에 의하면 송태조(宋太祖:趙代)의 7대손에 익(翼)·기(冀)·이(裏)·광(廣)의 4형제가 있었는데, 셋째와 넷째가 고려에 귀화해 평양과 임천 조씨의 원조(遠祖)가 되었다 한다. 또 익(翼)의 아들 4형제 지린(之璘)·지수(之壽)·지청(之淸)·지말(之末)이 고려 의종 때 고려에 건너와 각각 배천·한양·풍양·양주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에는 배천 조씨가 송(宋) 태조의 장자(長子)의 익의 후예 (一說에는 趙子龍의 후예), 임천조씨는 차자(次子) 기의 후예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평양 조씨의 시조 춘(椿)은 남송(南宋)의 상장군(上將軍)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풍양·한양 측에서는 양주세보의 기록을 부인한다. 풍양 조씨 화수회에 의하면, 풍양의 시조 조맹(趙孟)은 본래 성이 없었고 이름을 ‘바우(巖)’라 하였는데, 고려 태조(왕건)를 도와 고려의 건국에 공을 세워 조성(趙姓)을 하사받고 이름도 맹(孟)으로 고쳤으므로, 한국 조씨 중에서는 역사가 가장 깊다고 한다.

고려 태조의 사성(賜姓)에 의하여 고려 혁명 4공신인 홍술(弘述) 백옥삼(白玉衫) 삼능산(三能山) 사귀(沙貴) 등이 각각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으로 창씨(創氏)를 한 사실로 미루어 풍양 조씨 측의 주장은 사실(史實)에 충실한 고증으로 보인다.
조씨는 고려 중기 이후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도덕, 문장, 벼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조씨는 조선 개국공신 40여명 가운데 8명으로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602명, 상신 19명, 문형(양관대제학) 10명, 왕비 3명, 청백리 6명과 판서급 수십 명을 배출하였다.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87만 7, 050명에 가구수 20만 7, 895가구로 274성 중 역시 제7위로 나타났다.

글 : 지형원<문화通 발행인> 사진 : 임철진<사진작가. 편집위원>


맛집

▲ 또백이 식당 = 순천시 주암면 주석로 4-1
(061-754-9859/010-9213-9859)
주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맛집이다. 여수에서 시집온 안주인이 30년 가까이 운영하면서 자식들을 키우고 교육시켰다. 명절날도 쉬지 않는 식당, 잰피가 들어간 김치로도 유명한 곳이다.
주암댐 아래 있어 민물매운탕과 민물찜, 참게탕, 다슬기탕과 다슬기 회무침이 주 메뉴다. 보험회사 다니던 바깥주인이 아예 거둬치우고 멀리 쏘가리나 메기 등 민물고기를 직접 잡아오고 참게는 멀리 거제도까지 원정 간다. 그래서 적어도 이집에서 먹는 민물고기탕은 자연산이 맞다.
이 집에는 묵은 김치가 없다. 그때그때 계절에 나오는 채소를 뜯어다가 막 무쳐 낸다. 여기에 잰피를 넣은 김치가 제일의 자랑이다. 젠피는 나무 열매로 비린내를 없애주고 항암효과가 뛰어나다는 식물이다. 민물고기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낙지나 오리고기, 삼겹살 등의 메뉴도 맛볼 수 있다.
▲참게탕 = 17, 000원 ▲쏘가리탕 =17, 000원 ▲빠가탕 =15, 000원 ▲메기탕 =12, 000원 ▲잡탕 =10, 000원 ▲참게장백반 =12, 000원 ▲다슬기백반 = 10, 000원 ▲다슬기탕 = 50, 000원(대) / 40, 000원(중) / 30, 000원(소) ▲다슬기초무침 = 50, 000(대) / 40, 000원(중) / 30, 000원(소) 등이며 흑돼지 삼결살, 흑돼지 주물럭, 낚지볶음 등의 메뉴도 있다.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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