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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8일(화요일)

19.나주 문평면 오룡리

거북선을 설계한 나대용 장군 탄생지 500년 역사 생가 남아
고려 무신 라유는 여몽연합군의 왜 정벌 때 戰船 400척 만들어
2019. 05.08(수) 15:38확대축소
나대용장군 생가
광주-목포간 고속화 도로를 달리다 고막원역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문평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은 광주-무안공항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국도 1호선인 광-목간 도로의 통행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과거에는 광주에서 영암·강진·해남·완도·진도로 가거나 함평·무안·목포로 갈 때는 어김없이 지나야 하는 길이다.

고막원에서 북서쪽으로 2㎞ 남짓 달리면 문평 면소재지가 나오는데 지금은 광주-무안간 고속도로 문평 IC를 통해 나오면 쉽게 면소재지로 갈 수 있다. 여하튼 고막원에서 문평으로 가는 길목에는 나란히 고막천이 흐르는데 이 고막천이 영산강으로 흘러 목포 앞바다에 이른다. 고막천과 영산강이 만나는 지점에 영산강변 나루터 비경의 ‘제 1경’이라는 석관정(石串亭)이 있다,

석관정은 1480년(성종 11년) 함평이씨 이극해(李克諧 1431~1511)가 인수정(仁壽亭)이라는 이름으로 정자를 지었는데 훗날 석관정(石串亭)이라 개칭했다. 석관정은 수운의 요지로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영산강의 대표적 절경이다. 이곳 석관정은 옛날 나라가 변고를 당할 때마다 강 건너 떠나는 낭군들 무사귀환을 바라며 눈물 훔치던 아낙들 처절한 슬픔을 머금었다는 이별바위가 남아 있다.

사설이 길었지만 고막원역에서 2㎞ 남짓 북쪽으로 가다가 문평면소재지 약간 못미쳐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오룡리 오륜골이다. 임란당시 거북선을 설계한 체암(遞庵) 나대용(羅大用,1556~1612)장군의 생가와 위패가 모셔진 소충사(昭忠祠)가 있다. 이곳에서는 과학의 날인 매년 4월 21일 정부 주관으로 제향을 모신다.
오룡리는 백룡산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산의 이름을 본 따 백룡이라고 하고,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복룡이라 부른다. 오륜리는 삼강오륜을 잘 지킨다고 하여 오륜리라고 칭했다고 한다.

소충사는 외삼문인 충용문이 있고 오른쪽에 묘정비가 있다. 사당에는 80호 크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이 영정은 이종상 전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가 그린 것이다. 소충사 앞에는 나대용 장군의 대형 동상이 서 있고 그 곁에 거북선이 함께 하고 있다.
소충사 앞에 있는 나대용 장군 동상


문평면 서원마을에는 송재서원이 있는데 이곳에도 체암 나대용과 그의 선조 송재 나세찬, 금호 임형수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송재(松齋)나세찬(羅世纘, 1498~1551)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두 차례나 장원급제하여 대사헌을 지냈고 금호(錦湖) 임형수(林亨洙, 1514~1547)는 부제학을 지낸 조선중기의 10대 시인이다.

나대용 생가는 전남도 기념물 26호 지정

나대용의 생가는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472번지에 있다. 노인정 바로 뒤편에 있다. 1612년에 건립돼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전라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에 대한 설계도와 제작과정을 연구하고 마을 앞 방죽골에서 첫 시험을 끝내고 1591년에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거북선 제작을 건의하여 거북선 3척이 만들어졌다고 적혀 있다.
나대용 장군 영정


생가의 본채는 남남서향을 하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건물의 전후좌우에 마루를 낸 一자형 집이다. 뒷면이 죽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맞담과 생울타리로 경계를 이룬다. 안방문 위에는 경모당(敬慕堂)이라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다. 묘소는 생가 마을에서 약 3km 떨어진 대도리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대도저수지 둑길을 지나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는데 인가는 없고 그야말로 좌청룡우백호를 거느린 명당으로 알려진다. 묘소는 정부인 이천서씨의 묘와 나란히 모셔져 있으며 오래된 묘비가 역사를 말해준다.

소충사 입구에는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들어 실험했다는 방죽골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논으로 바뀌었다. 나대용이 이곳에서 거북선을 만들어 실험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그 자리다. 문중에서는 이 방죽을 복원하기 위해 거북선 흔적 발굴, 역사적 고증과 부지매입 등 다양한 준비작업이 진행중이다. 2천여평의 논을 모두 사들이는 등 준비가 한창이다.
나대용장군 묘소 정부인 묘


나대용 장군 생가입구 도로에는 금성 나씨의 사우 봉강사(鳳岡祠)와 강당인 영수재가 가 있다. 고려후기의 문신 나문규와 나계종을 배향하기 위해 1912년에 건립되었으나 서원철폐로 없어졌다가 1924년 복설되었다.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94호) 과거에는 춘추로 배향하였으나 근래 들어 매년 음력 3월 1일 제사를 지낸다. 사당의 문 위 벽에는 호랑이와 용의 민화가 그려져 있다. 탱화작업을 하기 전에는 여러 개의 민화가 사당 벽에 그려져 있었으나 훼손이 많아 철거되고 현재는 두 개의 그림만 있다. 강당인 영수재는 1924년에 지어졌으며 금성나씨 종친회가 열리며 마을정자로도 사용한다. 1951년 사방으로 한 칸씩 공간을 마련해 밖에서 보면 2층 누각처럼 보인다.

영서재


송와(松窩) 나문규(羅文奎, 1312~1379)는 나유의 증손으로 1340년(충혜왕 1) 문과에 급제하여 명경박사, 개성참군, 겸통례문지후(兼通禮門祗侯),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 진도현령(珍島縣令)을 역임했다. 그가 죽자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했다고 하니 깊은 신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죽헌(竹軒) 나계종 (1339~1415)은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사헌부시자·전리좌랑, 예문관제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나 공민왕으로부터 사서육경 전질을 하사받기도 했으며 계종(繼從)이라는 이름도 1374년 예문관제학으로 제수되면서 선조 문절공(文節公)의 얼을 계승하여 따르라는 뜻으로 공민왕이 지어준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뒤 권근(權近)이 나계종에게 벼슬에 나오라고 권유하였으나,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거절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저서로는 『죽헌유집(竹軒遺集)』 2책이 있다.
봉강사 현관문위의 호랑이 민화


금성나씨 시조 나총례

금성나씨 시조인 나총례(羅聰禮)의 묘소는 문평 대도리에 있다. 나씨들은 이곳에 시조묘를 설단(設壇)하여 매년 음력 5월 첫째 주 토요일에 제사하고 있다. 시조묘 앞에는 사우인 경모사(敬慕祠)를 건립해 91위를 제향하고 있다. 우리나라 많은 문중들이 역사의 혼란기에서 시조나 조상의 묘소를 찾지 못한 경우가 있는데 금성나씨들도 이런 아픔이 있다.
그래서 1980년대 이곳에 사우를 건립하고 매년 여기에 모여 뿌리를 확인하고 혈족의 정을 나누는 행사는 갖고 있는 것이다. 사방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큰 길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숨겨진 명당으로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금성 나씨는 고려가 건국된 뒤 나총례(羅聰禮)가 고려 정종 때 삼한벽상일등공신(三韓壁上一等功臣)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금성(錦城)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시조 나총례의 아들 라은고(羅恩誥)가 자의대부(資義大夫:고려 때 종2품 의빈품계)로 공빈승을 지내고 금산군에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11세손에 이르기까지 3명의 후손이 대광(大匡:정1품 품계)의 벼슬에 오르고 4명의 부원군(府院君)과 5명이 봉군되어 금성 나씨는 성족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가 말기로 접어들면서 극심한 왕권쟁탈전과 경제적 혼란으로 전국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때를 빌어 지방의 세력들이 농민과 결탁하여 신라의 지배체제에서 이탈하게 되었고 결국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기존의 신라로 후삼국시대가 연출되었다.
봉강사 사우 문위의 민화


그러나 궁예의 후고구려는 멸망하고 궁예의 뒤를 이은 왕건이 즉위하면서 고려가 건국되었다. 왕건은 후백제 견훤과 대결을 벌이다 견훤 및 신라 경순왕의 귀순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는 지방호족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 가운데서 나주는 나총례(羅聰禮)와 오다련(吳多憐)의 역할이 컸다. 나총례는 금성(金城) 나씨의 시조이고, 오다련은 왕건의 장인이자 장화왕후의 아버지이고 혜종의 외조부다.

나총례에 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고려사 104권에 “나유(羅裕)는 나주사람으로 삼한공신이며, 대광(大匡)인 나총례의 10대손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나총례는 나유의 10대조이며 삼한공신으로 대광의 직위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광이란 고려초기의 관제로 삼중대광, 중대광, 대광 등 제 3위 관등으로 2품에 해당되는 높은 관직이다. 삼국이란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삼한공신은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한 공신을 통칭하는 말이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지 4년째인 940년 신흥사에 공신당을 설치하고 삼한공신의 화상을 그려 붙여 숭배했다. 나총례가 삼한공신에 봉해진 것은 그만큼 공이 컸다는 반증이다.
채연석 박사가 고증울 근거로 재현한 거북선


나주는 본래 백제 땅이었다. 통일신라에 복속되었다가 한때 후백제의 땅이 되었고 그러다가 후고구려 궁예의 수중에 들어간 적도 있다. 그러나 나총례가 궁예 밑에 있던 왕건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왕건이 출동하자 그를 도와 공을 세웠다. 왕건이 나주지역을 점령한 것은 903년(天復 3년)으로 당시 금성군 뿐 아니라 10여개의 군현을 점령하고 이름을 나주로 개명했다.
이후 나주는 왕건의 세력기지가 되었고 고려를 건국한 918년까지 상당기간을 나주에서 보냈다. 나주는 왕건에게 있어 정치적 기반지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중심지로 풍부한 물산과 해상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소충사 현판


나주라는 지명이 여기서 탄생하고 왕건이 나주를 세력기반으로 삼은 것은 나총례를 비롯한 나씨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이 지명을 본관으로 하사한 것은 금성 나씨와 상주 상씨 뿐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나씨는 고려 전기에는 큰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으며 무신정권 이후 두각을 나타냈다. 바로 그가 나유(?~ 1292, 충렬왕 18)다. 그는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나총례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낸 나득황(羅得璜)이다.

나득황은 최항 정권 하에서 장흥부사, 전라안찰사를 거쳐 형부상서(정3품)까지 올랐다. 이런 아버지의 덕분에 음보(蔭補)로 장군이 되어 김방경(金方慶)과 진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하는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올랐다. 충렬왕대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종 2품)으로 원나라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 나익희(羅益禧)도 충렬왕 말년에 신호위호군(神號衛護軍)이 되었다가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상의 평리로 금성군이 되었다. 나익희의 아들 나영련(羅英憐)도 공민왕 3년에 금성군에 봉해졌다.
나흥유(羅興儒)는 고려 말에 영달한 인물이다. 공민왕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지도를 편찬했으며 우왕 초에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정3품)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나총례 금성나씨 시조단


고려시대 戰船 건조 책임자 羅裕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나총례의 10대손 가운데 회원대장군 나유(羅裕,?~1292, 충렬왕 18)가 있는데 그가 여몽연합군의 왜 정벌시 전선 400척을 건조했던 책임자라는 사실이다.
‘대한의 7대 불가사의’ (김종호 지음)에 따르면 여몽연합군의 왜 정벌시 고려전선이 모두 생환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것이다. 소위 신풍(迅風)에 몽골배는 거의 수몰되었는데 고려의 전선(戰船)은 대부분은 생환했다는 것. (한국학중앙연구원 간. 향토문화대자전 上. 나대용 인용)

그렇다면 금성 나씨 가문의 나유와 나대용이 배를 만들어 고려와 조선을 구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유는 고려후기의 무신으로 여몽연합군의 왜 정벌시 전선 400척을 건조했던 책임자이며 나대용의 11대조이다. 그는 아버지 나득황의 은덕으로 장군이 되어 1272년 전라도의 삼별초군을 토벌하는데 1,550명의 군사를 동원해 대장군에 올랐다. 이때의 공로로 남녀 노비 2명이 하사되고 원나라로부터 중통보초(中統寶梢)를 받았다.
나유는 1274년 정월 일본정벌에 필요한 300척의 전함을 건조할 때,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징집하는데 힘썼다. 그해 10월 제1차 일본정벌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과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의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종군하였다. 그 뒤 제2차 일본정벌을 위해 합포(合浦: 현재 경남 마산)에 3번이나 출진하였고 목포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 여몽연합군의 사령관을 맡게 된다.
금성나씨 91위를 모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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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년(충렬왕 8) 5월에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288년 5월에는 만호동지밀직사사(萬戶同知密直司事)로 왕의 선두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에 참여하였다. 이후 1등 공신에 책봉되었고 1291년 11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원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다녀왔다. 이때 원나라로부터 삼주호부(三珠虎符)·옥대(玉帶)·은정(銀錠)·궁시(弓矢)·검(劍)·안마(鞍馬) 등을 받고 회원대장군이란 호를 받았다. 예의에 밝고 옥사(獄事)의 판결에도 능했다고 전한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장군

회원대장군 나유의 11세손이자 시조 나총례의 21세손인 체암 나대용이 바로 거북선을 설계한 주인공이다. 1556년(명종 11)에 나주 문평에서 태어났으며, 1583년(선조 16) 훈련원 별시무과에서 병과로 합격하였다.
훈련원 초급간부로 이순신 휘하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32세 때인 1587년(선조 20)에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당시 나주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들로 인해 많은 약탈과 악행을 전해 듣고 의분강개하여 낙향 후 4년여 간 고향집에 칩거하며 거북선 연구에 몰두했다. 낮에는 나무를 베어 다듬고 저녁에는 설계도를 수없이 그렸으며 거북선이 완성되자 방죽골에서 실험을 마쳤다는 것.

임란 한 해 전인 1591년 전라좌수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이 병선제작을 구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종제 나치용과 이순신 장군을 만나 거북선 설계도를 내보인다. 나대용은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감조군관(監造軍官)인 조선장(造船將)으로 임명을 받고 선소에서 전선을 제작하게 된다.
금성나씨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물방개의 노래’ 라는 시문을 보면 나대용이 물방개가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수긍이 간다. 13세손 나갑주 선생(24세)이 제공한 <물방개의 노래>는 이렇다.
나대용함


빙글 빙글 돌아라 / 잘도 돈다 물방개야
비바람 거친 파도 / 걱정일랑 하지마라
크게 싸울 장수 나와 / 낙락장송 다듬어서
너 닮은 거북배 / 바다오적 쓸어낸다.
어허둥둥 좋을시고 /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물방개와 거북선의 모양을 살펴보면 닮은 점이 있다. 당시 일본의 배는 앞으로 진격하기 위한 공격용으로 물밑에 가라앉은 부분이 세모꼴이지만 우리의 거북선은 방어용으로 물방개처럼 자유롭게 회전하면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다.
임란당시의 거북선 설계도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훗날 설계된 거북선 가운데 원형과 가장 가까운 것을 보면 물방개의 모습과 흡사해 물방개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얘기에도 수긍이 간다.
거북선 연구가 채연석 박사는 ‘함포의 배치를 중심으로 본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연구’를 통해 거북선 설계도를 재현해냈다, 그는 거북선의 구조와 특징을 알 수 있는 사료들을 분석해 만든 것이다. 사료는 ▲선조임금에게 올린 장계 ▲이분(李芬)의 이순신 장군의 행록 ▲선조 25년에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의 거북선 설명 ▲이순장 장군 종가에 소장된 2장의 거북선 그림 ▲이충무공전서에 있는 ‘권수도설’에 있는 귀선도(龜船圖) 그림 설명과 ‘전라좌수영귀선도’ 설명 등 5개다. 채연석 박사는 이 자료를 토대로 거북선의 특징을 찾아내 설계도를 완성하였다.<자료 참조>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나와 있는 거북선 설계도 가운데서는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거북선을 처음 만든 곳은 여수 본영 선소

나대용이 맨 처음 배를 만든 선소는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다. 현재 파리바케트 여수 중앙점 자리다. 현재 이 자리에는 여수시가 제작해 부착해놓은 선소유적지 표지판이 있다.
장생포 선소는 당시 순천부 선소였고, 군내리 선소는 방답진 선소였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직접 지휘하기 쉬운 본영 선소(현재의 진남관 앞)에서 거북선 3쌍을 처음으로 제작해 진수했다. 이러한 사실은 『충무공전서』,『난중일기』,『나주읍지』,『호남동순록』,『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뒷받침하고 있다.

또 이순신 장군은 1592년(선조 25) 3월 27일 소포(종포)의 거북선에 올라 대포 쏘는 연습을 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나대용은 이곳에서 1년여 동안 조선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과 함께 거북선을 제작하였다.
나대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발포만호진(고흥)의 군관이 되었고, 거북선을 타고 당포해전에 처음 출전하여 대승을 거두는데 공헌했다. 옥포해전에서는 유군장(遊軍將)을 맡아 적선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는 삼도 수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순신은 나대용을 장하게 여겨 조정에 아뢰기를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니 나대용의 공이 가장 으뜸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594년(선조 27)에 공이 인정되어 강진(康津)현감으로 임명되고, 이후 금구(金溝)·고성(固城)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후 나대용은 선조의 윤허를 받아 거북선의 단점을 보완해 창선을 만들게 된다. 1610년(광해군 2)에는 남해(南海)현령에 제수되어 성능이 우수하고 쾌속선인 해추선(海鰍船)을 만들기도 했다. 이듬해인 1611년에는 경기도 수군을 관장하는 교동수사(喬桐水使)에 제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입은 부상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 1월 29일 57세로 별세했다.
이순신은 나대용이 만든 거북선을 이용해 왜와의 전투에서 큰 승전고를 올렸다. 특히 사천해전의 일등공신은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이 적의 진중을 헤집고 다니면서 총통을 쏘고 왜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순신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는 거북선의 활약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 하더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는데, 이번 전투에는 돌격장이 타고 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들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천·지·현·황 등 각종 대포를 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대용의 공적은 매우 크다. 그러나 만약 이순신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거북선이 탄생할 수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대용은 파란이 많은 조선 중기의 수군장으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조선 기술자로 평가할 수 있다.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도원수 권율은 “이순신은 나대용이 없었던들 그와 같은 무공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나대용은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큰 이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권율은 나대용의 업적을 높이 평가 한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1592년 3월 27일과 4월12일에 거북선에서 대포 시험 발사를 한 기록이 있다. ‘3월 27일 날씨가 맑고 바람조차 없었다.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해 보았다. 4월 12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이 같은 기록으로 모아 거북선이 정확히 1592년 3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좌수영에서 만들어진 거북선은 3척이었다 한다. 이 3척 이외에도 많은 배를 만들었을 것이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3척 뿐이다.
여수 망마산 아래 선소에서 만들어진 ‘본영 거북선’, 고흥 방답진에서 만든 ‘방답 거북선’ 그리고 순천에서 만든 ‘순천 거북선’이 그것이다. 그리고 1595년 초에는 거북선은 5척이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7~8척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거북선의 원형이나 설계도는 전하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년이 지난 정조 19년(1795년), 정조임금은 이충무공에 대한 전집인 ‘이충무공 전서’에 거북선 설계도가 나오는데 임진왜란 당시와는 사뭇 다르다.

창선과 해추선도 만들어

나대용이 배를 만든 최고의 과학자였다는 사실은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조실록 206, 선조 36년 12월12일 무오록’에 실린 상소문(신호열 역)에는 그가 이순신의 막하에서 전선을 감조(監造)하고 옥포, 사천, 선창, 당항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이후 여러 고을 현감을 지내고 부모상을 치르고 물러나 있으면서도 오직 더 좋은 배를 만드는 계책을 연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신(臣)은 항상 노젓는 병사가 덜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던 바 기해년(1599년) 일찍이 순찰사 신(臣)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전선 25척을 별도로 만들었고, 감조할 때 판옥선도 아니요 거북선도 아닌 특별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칼과 창을 총총히 꽂아 이름을 ‘창선 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젓는 병사 42명을 나누어 싣고 시험 삼아 바다 가운데로 저어나가 보니 그 빠른 품이 나는 것 같사옵고 화살 쏘는 편의도 역시 판옥선보다 나았습니다.

그 후에는 태평한 세상이 와서 한 번도 싸움에서 써보지 못하고 여러 해를 버려두어 낡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뒤로는 신분이 천하고 말도 미미한 처지라 사람들이 취실(娶室. 신용)해주지 아니함으로 다시 계속하여 만들지 아니하였고 그 만드는 법조차 버렸으니 만약 다시 창선을 만들어서 대(大) 소(小) 여러 장수들에게 각각 한척씩 맡겨준다면 배의 수는 전보다 배가 될 것이고, 사격도 더 배정하지 아니하더라도 될 것이며 자연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 연해의 각 수령들에게는 사격병들과 노 젓는 병사들을 전부 창선에 옮겨 싣도록 하고 각 고을 수령이 수하에 있는 군대는 강어구에 정돈시켜 변을 기다리게 함이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변을 들으면 즉시로 전쟁터에 달려가게 하고 그 중의 계급이 높은 수령을 조장방(助防長)이라 칭호하여 점검하고 감독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후략>

이 상소문을 보면 나대용이 얼마나 배를 만드는데 골몰했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나이 들어 물러나 있으면서도 나라와 임금을 생각하는 충성심이 절절히 느껴지기도 한다. ‘배를 연구하느라 끼니마저 거르는 것이 일쑤였다.’ 거나 ‘방죽골에서 실험을 했다’는 얘기가 결코 지어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장보고급 잠수함 나대용 함 진수

정부는 거북선을 제조한 나대용 장군을 기리기 위해 1998년 국내의 기술로 진수된 잠수함을 나대용 함으로 명명한 바 있다. 나대용함은 우리 해군의 장보고급 잠수함으로 하푼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으며 어뢰와 기뢰도 탑재할 수 있다. SS-068 이순신, SS-069 나대용, SS-071 이억기함은 8문의 어뢰관 중 4문에서 하푼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으며, 6발을 재장전하여 모두 10발의 하푼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나대용함은 환태평양군사훈련인 림팩(RIMPAC)2002에 참가하여 총 10척 10만 톤의 함정을 가상 격침했다. 또한 대한민국 해군 최초로 하푼잠대함 미사일을 발사하여 60km 떨어진 곳에 있는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등 1998년 취역 후 20년동안 무사고 운항을 자랑하며 최강의 잠수함으로써 많은 전과를 올린 바 있다.

나대용장군이 설계한 거북선은 2016년 미국해군연구소에서 인류역사상 전과를 중심으로 세계 7대 전함을 선정한 바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그리고 나머지 6개전함이 모두 1900년도 이후의 전함인 반면 거북선은 유일하게 1500년대에 제작된 전함으로 선정되었다는 큰 의미가 있다. 이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조선업을 시작하며 그리스 선박왕에게 첫 수주를 받을 당시 화폐속의 거북선으로 역사적 조선강국임을 설명하고 오늘의 현대중공업을 창업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이 전세계의 조선강국으로 우뚝설 수 있는 것도 거북선 정신과 유전자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왜구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한 거북선은 우리 민족에게 위기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며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도전 정신을 심어주고 있어 대한민국 심장부인 광화문은 물론이고 역사박물관, KBS공개홀등 주요 국가시설에는 예외없이 거북선의 조형물과 이름등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거북선은 미국 해군연구소(USNI)에 의해 ‘제7대군함’중 하나로 선정된바 있다. 다른 6개의 군함은 190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지만 거북선은 1500년대에 제작돼 가장 오래된 군함자리를 차지했다.

오늘날 한국이 조선(造船)강국이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며 거북선을 만든 위대한 민족의 DNA가 조선 산업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주장에 충분한 일리가 있다.

나승렬·나승옥 회장 위선사업 큰 업적

어느 문중이나 문중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에 의해 위선사업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꼭 돈이 많아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조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이를 후손들에게 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금성나씨 집안에서서는 나승렬(33세) 전 거평그룹 회장과 대광실업 나승옥 회장(33세)이 큰일을 많이 이뤄냈다, 나승렬 회장은 30여년 전 시조단과 경모사를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나승옥 회장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거북선을 만든 사람이 모두 이순신 장군으로 알고 있을 때 거북선을 실제로 설계하고 만든 사람이 나대용 장군임을 찾아내 현창했다. 그는 나주 다도면 도래출신으로 일찍이 사업에 뛰어들어 섬유회사인 대광실업을 크게 일으켰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나대용 장군의 사우 건립위원회(위원장 이은상)를 조직, 현충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소충사(昭忠祠)라는 이름은 이은상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건립계획을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이 직접 지어준 것이다.
부지를 매입하고 지금도 매년 4월 1일에는 나대용함의 함장과 진해 해군군악대가 소충사를 방문해 추모의식에 참여하고 있다. 소충사 현충사업은 라승옥의 대를 이어 나종주(34세, 바이오엑츠 대표)가 대를 이어 현창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바이오엑츠는 다양한 색소 기술을 이용하여 의료 진단용과 바이오산업의 중요한 소재를 개발.생산하는 획기적 첨단산업으로 국가적 관심을 받고 있는 기업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무석(31세) 금성라씨 대종회장은 “나승렬회장과 나승옥-종주 부자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이룰 수 없는 큰 업적”이라면서 “후손들이 훌륭한 조상을 섬기는 것은 물론 그분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근현대 많은 인물 배출

금성 나씨는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한말의병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다. 또 정계과 관계, 교육계 등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해 명문거족으로 성장했다. 그 가운데서도 한말의병과 독립운동에 몸 바친 사람들만해도 여럿이다. 광복군 5지대장을 지낸 나월환 장군(31세), 일제 때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의사와 독립선언서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나용환, 나인협 등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2018년 현재 우리나라의 150여 성씨 중에 금성나씨는 44,000여명으로 인구별 성씨 순위 100권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셈이다.

이는 위기의 후삼국을 통일한 왕권을 도와 구국의 충신(나총례시조)으로 시작되어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이순신장군을 도와 나라를 구한 나대용 장군등 국가적 위기 때마다 오직 나라에 대한 애국심으로 최선을 다해온 가문의 DNA를 엿 볼 수 있다.

주변 가볼만한 곳
고막천 석교

고막원에서 함평쪽으로 500m쯤 가다보면 오른쪽에 고막교가 나온다. 독다리, 똑다리라고도 부르는 돌로 만든 석교다. 길이 19.2m, 높이 2.1 m, 너비 3m로 석교로는 결코 짧지 않다. 지방문화재 68호로 지정돼 있다.
이 다리는 700여년 동안 수차례의 홍수가 지고 일제 때 만든 콘크리트 다리가 무너져 내렸음에도 지금껏 그대로다. 순간 강우량 30mm가 넘어 상판까지 완전히 잠겨도 유실되지 않는 ‘내구성’은 현대과학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 다리의 교각은 4개씩 6열로 되어 있는데 크기와 모양은 다르다. 그러나 마찰계수가 큰 돌을 골라 가로 세로로 쌓은 민흘림식으로 되어 있다. 고막교를 조사한 바 있는 손영길씨(전 국립중앙박물관)는 “강폭과 유속(流速)·유량(流量)을 감안, 교통량이 많은 하류 가운데 물살이 완만한 지역에 설치하고 중앙교각을 유선형(流線型)으로 깎은 것이 놀랍다”고 했다. 뱃머리형 교각을 세움으로써 물의 힘을 갈라버리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교각을 지탱하는 바닥을 굵직굵직한 돌로 얽어놓아 흙의 유실을 막고, 화강암 상판 역시 목조식 마루처럼 짜놓고 있어 우마차나 경운기 통행에 따른 과중한 하중을 탄력 있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등 매우 과학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이 다리를 오가며 집산된 물류가 고막천을 통해 하류로 내려갔는가 하면 60년대엔 소금배가 다리 턱밑까지 올라왔다.

한 가지 걱정은 지난 89년부터 시작된 고막천 직강공사로 인해 교각들이 정면으로 물길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조상의 지혜를 후세사람들이 가벼이 여긴 탓이다. 그 후에 다른 쪽으로 물길을 돌리긴 했지만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함평향토문화연구회 측은 “옛 국도 상에 남아있는 다리로서는 남한에서 유일한 고막교는 서울 살곶이 다리(사적 160호)보다 문화적 가치가 높아 시급하게 보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맛집
▲ 청호식당 = 나주시 다시면 무숙로 796-9 / 061-335-4116
나주 반남 벌명당 반남박씨 집안에서 스무 살에 이곳으로 시집와 40년 넘게 식당을 했으니 가히 명인이라 할만하다. 아이 낳아 등에 메고 식당을 시작해 돈을 벌어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지금도 현역이다.
다시는 넓은 들판과 영산강을 끼고 있어 먹을 것이 풍성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산물이 웅어다. 멸칫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뾰족한 칼 모양으로 비늘이 작고 몸빛은 전체가 은백색인데 민물과 짠물이 섞인 곳에서 산다. 가는 가시가 있어 3월~6월까지 회나 무침으로 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웅어는 예로부터 영산강 구진포에서 잡히는 것을 으뜸으로 쳐 조선시대 나주목의 어팔진미(魚八珍味)의 하나로 꼽혔다. 웅어는 맛이 좋아 조선시대부터 임금님이 드시던 귀한 물고기로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영산강 하구언이 생기면서 사라져버려 지금은 멀리 목포에서 사다가 손님을 맞는다.
웅어는 성질이 급하여 그물에 걸리면 금새 죽어버리기 때문에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즉시 내장이나 머리를 떼어내고 얼음에 쟁여 놓는다. 회로 먹으면 살이 연하면서도 씹는 맛이 독특하고 지방질이 풍부하여 고소하다. 뼈째 씹어 먹는다. 단백질, 칼슘, 칼륨 등이 풍부해 채소와 같이 먹으면 부족된 영양을 보충할 수 있다.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며 눈이 침침할 때 회복을 돕는다고 알려지고 있다.
청호식당에서는 제철음식이 웅어나 전어회 외에도 짱뚱어탕, 추어탕, 아구탕 등도 맛볼 수 있다. ▲웅어(대), 전어=40,000원, 중 30,000원 ▲아구탕 (대)40,000원 (중)35,000원 (소)30,000원 ▲짱뚱어탕=1만원, ▲추어탕 7,000원 등이다.

글 : 지형원<문화通 발행인> 사진 : 임철진<사진작가. 편집위원>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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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해남읍 연동15.광산 임곡 너브실
14.장성 맥동·필암마을13.창평 장화리 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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