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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8일(화요일)

16 .해남읍 연동

500년 역사의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 한국 宗家文化 모델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등 많은 인물 배출…근현대로 이어져
2018. 06.20(수) 17:38확대축소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 전경사진
내 벗이 몇 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떠오르니 더욱 반갑구나./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맑다 하나 검기를 자주한다./바람 소리 맑다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맑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찌하여 푸르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음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 서리를 모르느냐
/땅 속의 뿌리 곧을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저렇게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해남읍 연동의 해남윤씨 어초은 종가 고택 녹우당을 향하면서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를 읊어본다. 이 시는 윤선도가 56세 때 유배지에서 돌아와 해남 금쇄동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6수의 연시조다. 제1수는 서시의 성격으로 水石과 松竹, 달(月)을 거명했고 2수부터는 하나하나를 예찬했다. 물의 불변성, 돌의 덕성, 소나무와 대나무의 지조와 절개, 달의 광명과 과묵함을 예찬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전통 시이다.
정치일선에 있다가 20년간의 유배생활을 했고 고향땅으로 돌아와 지내노라니 친구들도 멀어져 외롭고 고독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자신을 늘 곁에서 위로해주는 친구가 수석과 송죽이요, 하루도 거름 없이 밤하늘을 비춰주는 달이라고 애써 예찬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이가 들어 물러앉으면 친구도 떠나고 찾는 이가 줄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더욱이 한때나마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가 낙향하여 홀로 지냈음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연동마을은 해남읍에서 대흥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승용차로 2,3분 거리다. 마을이름이 연동이라고 한 것은 덕음산 봉오리가 커다란 연(蓮)의 형국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은 송나라의 학자 주돈이(1017~1073)가 그의 시 애련설(愛蓮說)」에서 군자의 꽃이라 하여, 고결한 선비의 삶을 상징하는 꽃이다. 그러고 보면 윤선도는 연과 매우 관련이 깊다. 태어난 곳이 서울 동부의 연화방(蓮花坊)으로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蓮池洞)이다. 살던 곳이 이곳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이며, 완도 보길도도 부용동(芙蓉洞)이라 하여 연으로 이어진다.
고산 윤선도 기념관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국보급 유물 소장

연동에 들어서면 맨 처음 만나는 것이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이다. 조선 국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尹善道)를 비롯해 실용적인 학문과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혁신적인 그림을 세계를 펼친 공재(恭齋) 윤두서 ( 1668~1715,尹斗緖) 등의 유물 1,7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500년 역사 녹우당은 4,600여점을 간직하고 있는데 나머지 2,900여점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위탁 보관중이다.
대표적인 유물은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을 비롯 윤선도의 <산중신곡집(보물482호)> <금쇄동기> <금쇄동집고> 등과 또 공재의 <일본여도> <동국여지지도>, 그리고 개인의 노비문서로는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노비문서 등이다. 또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어부사시사>를 비롯해 공재의 유명한 <말그림>과 윤덕희(尹德熙,1685~1776)- 윤용(尹愹, 1708~1740)으로 이어지는 3대 화맥의 <가전고화첩>, 그리고 해남윤씨 가문으로 시집으로 와서 며칠 만에 남편을 여의고 가문을 지켜낸 광주(廣州)이씨 ‘한실할머니’의 <규한록>등 많은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이 유물전시관은 1992년에 처음 문을 열었으나 규모가 작고 낡아 지난 2010년 재개관했다. 이 많은 유물들이 남겨진 데는 해남윤씨 종부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다. 수많은 난리가 있을 때마다 귀한 선조의 유물들을 항아리에 담아 대밭에 숨겨서 보관해 온 것. 생사가 갈리고 먹고사는 일이 눈앞의 숙제였을 그때에 체온이 느껴지는 육필의 원고와 그림을 남겨준 종부들의 헌신에 머리가 숙여진다.
유물전시관을 나오면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와 500년 비자림(榧子林, 천연기념물 241호)이 있고 바로 곁에 해남윤씨 종가고택 녹우당(綠雨堂)이다. 원래 녹우당은 종가의 사랑채로 효종이 윤선도에게 내려준 경기도 수원의 가옥 일부를 현종 9년(1668)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푸른 비자나무 이파리가 떨어지는 것이 마치 푸른비와 같다고 하여 녹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녹우당이란 현판은 동국진체의 원조로 알려진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가 썼는데 공재 윤두서와 가까운 사이다. 이서는 성호(星湖) 이익(1681~?李瀷)의 형이다.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이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종택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가 태어나 자리며 학문과 예술의 혼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촬영장소로 사용된 바 있다.
해남 윤씨 녹우당 건물은 윤선도의 4대조인 12세 어초은 윤효정이 지은 16세기 초 건물이다. 원래 녹우단(綠雨壇)으로 불렀는데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인상을 주는데다 녹우당과도 혼돈이 돼 최근 문화재청이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1968년 사적 제 167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전남지방에 현존하는 주택 중 가장 크다. 해남윤씨 가문에서는 어초은 파에서 16세 윤선도, 19세 윤두서 등 조선시대 큰 인물을 배출, 학문적, 경제적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종가의 배치는 서향집이며 동4택 (東四宅-안방, 대문, 부엌이 북쪽, 동쪽, 남동쪽, 남동쪽 방향)에 속한다. 집터 뒤에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 안산(案山)으로 벼루봉과 그 바른쪽에 필봉이 있는 명당이다.
사랑채는 침방·사랑방·대청이 一자로 늘어서고 전면에 차양을 달았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고, 안채가 ㄷ자형평면을 이루면서 자리 잡고 있다.
안채 뒤 동쪽 담장 밖에 따로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과 고산사당(孤山祠堂), 그리고 어초은 제각인 추원당이 있다, 어초은 사당과 고산사당은 불천위(不遷位· 4대 봉제사가 끝난 후에도 집안에서 제사하는 신위)로 받들고 있다. 추원당은 윤정현(1882~1950)이 1950년 발의하여 세운 제각이다. 해남윤씨 제사상에 오르는 대표적인 음식이 이곳 비자열매로 만든 ‘비자강정’과 ‘감단자’ 이다.
어초은 윤효정은 강진 덕정동에 살다가 해남에 학문의 길을 열었던 금남 최부( 1454~1504, 표해록의 저자)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 해남으로 왔다. 유희춘의 아버지이자 최부의 사위인 유계린(1478~1528)에게도 학문을 익혔다. 이후 이곳 백련동에 터를 잡아 향족인 초계 정씨(당시 해남정씨)와 혼인하여 6자녀 가운데 윤구, 윤행, 윤복 등 세 아들을 문과에 급제시키는 등 해남윤씨 가를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세 아들 가운데서는 4남인 복이 안동대도호부사를 지내 도암면 용산리 묘소 앞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어초은의 묘소 아래 있는 또 하나의 묘소가 해남윤씨들이 ‘한실 할머니’로 추앙하는 24대 종부 광주(광주)이씨의 묘다. 광주이씨는 오늘의 해남윤씨 가문을 일으킨 영부(英婦)로 ‘규한록(閨恨錄)’이란 육필수기집을 남겼다. 이씨는 24세 광호(1805~1822, 光浩)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하루 만에 재행(再行)을 왔다가 돌아간 뒤 병석에 누워 죽고 말았던 것. 더욱이 병인(病因)이 아무 죄도 없이 강진의 원님에게 매를 맞은 것이라니 통곡소리가 하늘에 닿았다.
“원수의 임오년 설화를 기록하려니 궂은 눈물이 앞을 가리고 속이 믹믹거리니, 천지를 뚫을 듯이 생각해본들 어찌 세상에 머물 뜻이 있겠습니까?”
임오년은 광주이씨가 시집온 해다. 그는 규한록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일을 마치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표현하고 있다.
“ 내 그날 얼굴이라도 한번 볼 것을. 이태도록 살아오는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이곳에 시집와 살아온 내 팔자가 하 기구하여 생각하면 할수록 원통하기만 하구나.”
남편의 장례를 눈물로 치룬 광주이씨는 마침내 남편의 죽음을 따라가려고 곡기를 끊었다. 그러나 시숙부 윤민식이 ‘살다가 못살 것 같으면 자는 듯이 죽은 약을 지어준다’는 말에 절곡을 멈추고 해남 윤씨의 후손을 잇는 일에 나서게 된다. 결국 충남 서천에 사는 윤두서의 5대손인 윤주흥(尹柱興, 25세) 양자로 데려왔다. 윤주흥은 3남 4녀를 낳았고, 선공감의 감역까지 올라 집안을 부흥시켰다.
광주이씨가 남긴 규한록은 1834년 3월 4일 보성의 대곡(보성군 조성면 한실) 친정집에서 해남 연동의 시어머니께 올린 한글궁체의 수기체 편지글이다. 200자 원고지 150매 분량으로 길이가 13m에 이르는데 윤선도 유물관에 보관중이다.

조선 최고의 시인 고산 윤선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뒤로 하고 녹우당을 떠나면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떠올린다. 윤선도(16세)는 서울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왕의 사부,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정치와 행정 방면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남인’이었던 까닭에 늘 ‘서인’에게 늘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처음에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박승종·유희분 등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慶源)과 경남 기장(機張)으로 유배 되었고 1633년 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내가가 이듬해 강석기의 모함으로 성산(星山)의 현감으로 좌천된 뒤 파직됐다. 또 1638년(인조 16)에는 병자호란이 끝났음에도 왕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북 영덕(盈德)으로 귀양을 갔다.
쉰살이 갓 넘어서는 해남의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했고 65세 때는 완도 보길도에서 지냈다. 보길도에서는 그 일대를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격자봉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고 부르고 책을 읽었다. 그가 이처럼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길도에 있는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이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 윤선도는 간척에도 뛰어난 기량이 있어 노화도의 일부를 간척해 섬 주민들이 쌀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노화도에서는 매년 ’괴(고)산제‘라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고산을 기리는 제사로 알려지고 있다.
윤선도는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고금영(古今詠)’ ‘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으며 1651년(효종 2)에는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孝宗)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됐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의 고산(孤山)에 은거했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효종 8)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송시열(宋時烈)과 맞서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무렵에도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로 서인과 맞서다가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1667년 유배에서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어부사시사>는 65세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 10수씩 40수로 하고 있다. 여음을 순우리말로 쉽고 간소하며 구사해 <오우가>와 함께 윤선도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윤선도의 친부는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윤유심(尹唯深)이나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숙부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국보 24호 <자화상>의 윤두서
공재 윤두서 자화상

윤선도가 조선 최고의 시조시인이라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동양의 렘브란트로 불리는 조선 후기 삼재(三齋: 겸재 정선 · 현재 심사정)의 한사람이다. 해남윤씨 19세로 윤선도의 증손이자 정약용(1762~1836,丁若鏞)의 외증조이다. 장남인 윤덕희(尹德熙)와 손자인 윤용(尹忄容))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문을 이루었다
윤선도와 이수광(李睟光)의 영향을 받아 학문이 깊었다, 숙종 때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윤씨집안이 속한 남인 계열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1712년 해남으로 돌아와 학문과 시서화로 보냈다. 그는 새로운 회화의 경향을 연구하기 위해 방대한 중국서적을 읽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조사한 해남윤씨군서목록(海南尹氏群書目錄)』에는 중국의 화보, 서화가의 문집과 이론서 등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는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동물화, 화조화 등 다양한 화목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특히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이는 예리한 관찰력과 필력, 뛰어난 묘사력을 말해준다. 대표작 <자화상>은 현실과 괴리감에서 나오는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과 비장함을 보여준다. 실학적 학문도 깊어『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나 「일본 여도(日本與圖)」중국천하지도(中國天下地圖) 등을 남겼으며 18세기 중·후반 이후의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에게 계승되었으며 조선 말기의 화가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도 해남의 녹우당에 와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전통 화풍을 익혔다. 소치는 추사의 소개로 녹우당에 들르곤 했는데 특히 남화의 개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서 이익과도 영향을 주고받아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창안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 <자화상> <심득경초상> <채애도> <선차도> <노승도> 등이 있다.
한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어머니가 윤소온(尹小溫, 1728~1770) 인데 그는 윤덕렬 딸이자 윤두서의 증손녀다. 그런 까닭에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강진 귤동에서 다산초당을 지어 윤씨의 자녀들을 가르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훗날 항촌 윤서유의 아들 윤영희(윤창모, 1795~1856)에게 딸을 시집보내게 되는데 그의 외손자였던 방산 윤정기가 다산의 학문을 체계화한 주인공이다.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현판


해남 윤씨는 8개파로 나뉘어


해남윤씨 시조는 고려 문종 때의 윤존부(尹存富)다. 그러나 이때 본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6세 환(桓)까지는 남은 기록이 없고 다만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개인적인 기록이 보인 것은 7세 윤녹화(尹綠和)부터이다. 윤씨가 강진으로 내려온 것은 고려 공민왕 때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낸 8세 윤광전(尹光琠)으로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해남 윤씨 8파의 한 파조인 12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1476~1543, 尹孝貞)의 아들인 귤정 윤 구 때부터로 알려진다. 강진 덕동에 살던 윤효정은 해남의 호장인 해남 정씨의 사위가 되었는데 당시 해남의 거부(巨富)로 1남 2녀 집안의 장녀와 결혼,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부를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함으로 훗날 가문을 일으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해남에 한해와 수해가 겹쳤을 때 세곡을 납부하지 못한 주민들이 옥에 갇히자 3회에 걸쳐 창고를 열어 세곡을 대납했다고 한다.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는 이때의 일을 말함이다.
문과에 합격했던 장남 윤 구 때 부친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해남에 사는 윤씨’라는 뜻으로 본을 얻게 되었다. 어초은의 세 아들 윤구, 윤행, 윤복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을 뿐 아니라 윤구의 두 아들 윤홍중(尹弘中) 윤의중(尹毅中) 형제가 문과에 급제해 해남윤씨 가문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다.
해남 윤씨는 8개 파를 형성하고 있는데 맏형 격인 장파(長派)의 파조는 9세조 단봉(丹鳳)이며 10세의 사서(思瑞)가 충남파의 파조, 11세의 종(種)이 죽사동파의 파조다. 종과 형제간이었던 경(耕)은 파조가 되지 못했고 그의 7명의 자녀가운데 5명이 각기 파조를 형성함으로써 8개 파가 되었다. 효인(孝仁)이 지석파, 효의(孝義)가 부춘파, 효례(孝禮)가 항촌파, 효원(孝元)이 용산파, 효정(孝貞)이 어초은파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등 많은 인물들이 어초은파에서 비롯되었다.
행당 윤복 신도비


조선시대 문과 20명, 무과 13명 배출

해남 윤씨는 막대한 부와 학문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0명, 무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다. 또 을묘왜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나라가 외침을 당했을 때 의병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는 등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윤흥중(尹弘中)은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해남 현감 변협과 함께 해남성을 지켜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도 21명이 의병을 일으켜 큰 공훈을 남겼다. 대표적인 인물로 임란 때의 윤 장, 정유재란 때의 윤신을 들 수 있다, 윤 장은 무과에 급제한 뒤 만호 정운장군과 함께 이순신을 한산, 노량해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윤 신은 부장공 륜, 아들 동철, 장조카 치경과 창의 모병하여 강진 병치와 옥천 성산대교 전투에서 수많은 왜군을 무찌르고 장열하게 전사했다.
병자호란 때도 고산 윤선도, 윤 호 등이 크게 활동했는데 윤 호, 윤 후, 윤 증, 윤 경, 윤 전 , 윤지 등 6형제는 남한산성 전투에 참전해 치열하게 싸우다 5형제가 순국하는 아픔을 겪었다. 해남윤씨 문중에서는 왜변과 호란 등에서 큰 공훈을 세운 38명의 충혼탑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또 윤지충과 윤지헌은 형제로 윤지충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로 기록돼 있다. 해남윤씨가는 대대로 성리학을 신봉하고 살아왔는데 윤지충(1759~1791)과 윤지헌(16-764~1801) 형제가 18세기 실학이라는 도도한 흐름 속에서 유교의 경전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때 정약종 정약용 형제와 권철신, 이벽 등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남인 명사들이 천주교에 입교했고 윤지충과 윤지헌은 이들과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천주신자가 되었다, 윤지충은 윤두서의 다섯째 아들인 윤덕렬의 손자다. 정약종 정약용 형제와는 내외종간이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한 뒤 노론이 득세하면서 남인 시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1801년 그 유명한 신유박해 때 이승훈과 정약종 권칠신 등 300여명의 신도와 청나라의 신부가 처형되고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윤지충의 순교는 김대건신부(1821~1846) 보다 55년이나 앞선다.

지금도 해남과 강진지역에 집성촌 형성

해남 윤씨들은 현재도 강진과 해남지역에 많은 집성촌을 형성하고 대대로 살아가고 있다. 현재 확인된 해남윤씨 집성촌은 △해남 옥천면 성산리 △강진읍 춘전리 △해남읍 연동리 △해남 화산면 시목리 △해남 현산면 백포리 △강진 대구면 수동리 △강진 도암면 덕정동, 지석리, 만덕리(귤동,표장), 계라리, 항촌리 △강진 군동면 화방리 △강진 마량면 영동리△해남 북일면 금당리 등이다.
이 가운데 8개 파의 하나인 항촌파가 있는데 강진 도암의 항촌리가 다산 정약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항촌에 남아 있는 명발당(明發堂)은 다산의 부친 정재원(1730~1792)과 훗날 사돈이 된 윤광택(尹光澤, 1732~1804)이 교류했던 곳이다. 다산은 17살 때 화순현감으로 재직하던 아버지를 따라서 해남 백연동의 외갓집에 간 적이 있는데 해가 저물어 윤광택의 사랑방에 묵게 되었다. 윤광택은 정재원을 위해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훗날 그의 아들 윤서유(1764~1821)는 정재원의 소개로 진산 유학길에 오른다. 이후 윤서유와 다산은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고 다산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인 윤영희가 이곳 명발당에서 혼인을 하게 된다. 명발당은 해남윤씨 항촌 문중에서 사들여 종가로 사용하고 있다.
항촌마을 건너 학동에는 다산의 외손자인 방산(舫山)윤정기(尹廷琦,1814~1879)가 고향으로 내려와 문인들과 교류하며 후학들을 가르친 백학루(白鶴樓)가 있다, 윤서유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어 지내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고 결국 다산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던 것. 그의 아들이 윤정기인데 다산의 학통을 이어받은 대학자이자 문장가, 서예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중국의 대학자 주소백(周少伯)이 “동국 제일 문장”이라했다니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
학동마을 입구에는 ‘다산선생 따님의 묘소’라는 입석이 세워져 있고 방산의 집으로 오르는 길목에 따님부부의 묘비가 있다. 그가 살던 집은 서당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서책과 그림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자그마한 집이 남아 있다.
방산은 백학루에서 다산선생의 학문을 논하며 동환록(東寰錄)과 단풍시집 등의 책을 출간하고 글씨를 썼을 것이다. 윤정기의 동환록은 다산의 지리지 ‘대동수경’과 ‘아방강역고’를 이어서 저술한 책으로 1859년 (철종 10년) 찬집이 완료되었다. 동환록은 일제 때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바클리대학에도 천견문고에 필사본으로 소장돼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시경강의속집(詩經講義續集)’ ‘역전익’등을 썼다.
150년 역사의 백학루는 현재 그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백학루에서 동편 들녘을 바라보면 수많은 백학이 노닐었던 황새산이 눈앞에 있다.
이 대목에서 잠시 다산 장약용의 시 매조도(梅鳥圖) 한수를 읊고 가는 것도 좋겠다.
翩翩飛鳥(편편비조) / 息我庭梅(식아정매) / 有烈其芳(유열기방) / 惠然其來(혜연기래) / 爰止爰棲(원지원서) / 樂爾家室(낙이가실) / 華之旣榮(화지기영) /有賁其實(유분기실)
펄펄 나는 저 새가 / 내뜰 매화에 쉬네 / 꽃다운 향기 매워 / 기꺼이 찾아왔지 / 머물러 지내면서 / 집안을 즐겁게 하렴. / 꽃이 활짝 피었으니 / 열매도 많겠구나.

다산의 강진유배 9년째인 1810년, 두릉의 아내 홍씨로부터 한통의 편지와 함께 치마가 배달되었다. 다산은 이렇게 쓰고 있다. “가경 18년 계유년 7월 14일 열수옹 다산 동암에서 썼다. 내가 강진에 귀양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결혼할 때 입었던 여섯폭 치마를 보내왔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색이 바래었다. 잘라서 첩(帖) 4권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이 유명한 매조도는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다산은 아비의 귀양으로 풀죽어 낙담해 있을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말을 적어 ‘하피첩 네 책을 전하게 되는데 훗날 다산연구가 박석무에 의해 ‘유배지에서 온 편지’로 엮어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하피첩(霞帔帖)은 말 그대로 노을빛 치마로 만든 서첩 뜻이다.
다산은 ‘하피첩’을 만들고도 자투리 천이 남아 3년 뒤인 1813년 마침 강진 사는 친구 윤서유의 아들 윤영희에게 시집간 딸을 위해 한 폭의 그림을 그려주는데 바로 그 유명한 매조도(梅鳥圖)이다. 앞마당에 찾아든 두 마리 새를 보면서 딸이 자식을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노비문서 ·목판족보 등 많은 문화유물 간직

900년 역사의 해남윤씨 일가는 연동의 녹우당 이외에도 보길도의 부용동을 비롯 많은 문화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고산윤선도유물기념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보존하고 있는 유물이외에도 각 파조별로 지켜낸 문화유산들이 많다.
이 가운데 보물 483호로 지정된 지정십사년노비문서(至正十四年奴婢文書)는 송광사의 노비첩과 함께 현재 알려진 유일한 고려시대 노비문서다. 고려공민왕 때 사온서직장영동정을 지낸 윤광전이 둘째 아들 소윤공 윤단학에게 노비를 상속해주는 증서다. 소지 6장, 입안 2장 등 모두 8장으로 되어 있다.
해남윤씨 목판족보(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8호)는 1702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족보다. 목판의 매수는 원래는 서문 3매, 1권 51매, 2권 30매, 3권 61매, 4권 50매, 간행 1매, 총 98∼101매가 될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93매(서문 2매, 1권 13매, 2권 8매, 3권 20매, 4권 21매, 불명 29매)이다. 목판의 규격은 내곽 세로가 39㎝, 가로가 25.5㎝이다.
보길도 세연정

이 <해남윤씨족보>에 수록된 내용은 우선 부계친(父系親)과 동일하게 외손도 기록하였고, 남녀 순위가 아닌 출생순위로 되어 있다. 적서(嫡庶)를 그대로 기록하고 외손의 경우 성씨를 기입, 이름만 있는 본손과 구분했다. 조선 후기의 족보 목판이지만 기록방법이나 형태가 조선 전기의 족보양식을 따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해남윤씨 시원지는 강진군 도암면 강정리 덕정동으로 알려진다. 현재 선조가 살던 집터와 글을 가르치던 서당, 해남윤씨 덕정동 제각 추원당(지방문화재 29호)이 있으며 추원당에는 해남윤씨 족보 목판(지방유형문화재 168호)가 있다. 덕정동 추원당은 10세 윤사보(尹思甫)와 그 아들 경(耕)의 제사를 위해 세운 제각이다. 앞면 5칸, 측면 칸의 팔작지붕이다. 추원당은 성산현감으로 있던 윤선도가 중심이 되어 건립했으며 현판은 서예가인 옥동 이서가 써준 것이다..
도선산 한천동은 해남윤씨 시조인 윤존부에서부터 7세까지의 제단과 중시조 8세 윤광전과 그의 아들 윤단봉, 윤단학을 제사한다. 이곳 한천동은 윤유익이 형 윤유겸이 이이첨 등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위도모에 동참하자 3일간 눈물로 간청했음에도 듣지 않자 형제의 의리를 끊고 내려왔던 곳이다. 그는 스스로를 ‘한천처사’라고 이름하고 살았다.
영모당(도 민속자료 28호)은 숙종 13년에 세운 해남윤씨 문중 제각이다. 윤광전 윤단봉 윤단학 등 3부자를 제사하고 있다. 앞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300여년 동안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녹우당 뒤편에 있는 고산사당은 영조 3년(1727년) 불천지위로 지정된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집 건물로 고산의 기제사를 지낸다. 해남읍 해리에 있는 해촌서원은 1689년 해남유림들의 발론으로 해남3년(금남 최부, 석천 임억령, 미암 류희춘)을 제사하다가 1721년 귤정 윤구와 고산 윤선도를 추배하여 오현사가 되었다. 이후 1922년 취죽헌 박백응을 추배하여 6위가 모셔져 있다.
윤두서 고택은 해변인 현산면 백포마을에 있다. 원래 이 고택은 윤선도가 큰아들 윤인미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해 지었으나 해풍 때문에 기거하지 않고 연동에 살았다 건립당시 48칸 규모였다고 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채 13칸, 곳간 3칸 사당과 헛간이 남아 있다. 안채 상량문에 따르면 1670년(현종 11)에 지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1670년은 고산이 타계하기 1년 전이며 공재 윤두서가 3살이 되었을 때다. 이 고택은 훗날 고산의 증손인 공재에게 주어져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활동했다. 공재 윤두서의 묘소는 백포마을 바로 위에 있다.

어부사시사의 산실 ‘보길도’


보길도 부용동(芙蓉洞)은 51세 때부터 85세 때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가량 물렀던 곳이다. 부용동이란 이름은 지형이 “연꽃봉우리가 터져 피는 듯한 형국‘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덕정동 추원당

윤선도는 50세 때이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해남에서 백수 명을 모아 강화도로 갔다. 그러나 강화도는 이미 함락되었고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제주도로 뱃길을 돌리게 된다. 보길도를 지날 무렵 풍랑을 만나 황원포에 머물게 되는데 이곳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격자봉 아래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낙서재(樂書齋)다.
<보길도지>에는 보길도의 자연지리와 함께 고산이 남긴 유적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 책은 고산의 5대손인 윤위(1725~1756)이 직접 답사해 기록한 것이다.
세연정(洗然亭)은 부용동의 중심원림지로 ‘어부사시사’의 산실이다. 계곡 사이에 판석제방을 막아 만원 계곡의 정원이다. 물과 바위와 정자, 대(臺)와 소나무,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공간이다. 세연이란 이름도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다고 하여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하여 붙여졌다. 세연정에는 동서남북에 편액이 걸려 있다. 중앙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樂飢欄), 서쪽에 동하각(洞何閣) , 동쪽에 호광루(呼光樓)가 그것이다.
세연정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판석보가 있다.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윅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 회수담(回水潭)은 네모형태의 연못으로 그 가운데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심었다, 부용동 8경중의 하나이다.
낙서재는 격자봉 중턱에 세운 집으로 독서하면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지은 3칸의 생활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제자들에게 강학을 했다. 고산은 낙서재 바로 뒤에 있는 바위를 소은병(小隱屛)이라 불렀는데 이는 주자의 무이구곡에 있는 대은병(大隱屛)을 빗대어 이름지은 것이다. 낙서재 남쪽에 있는 무민당(無悶堂)은 침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동천석실은 보길도 제1의 절경이다. 낙서재에서 바라보면 해발 100m의 산 중턱에 있는데 고산은 이 아슬아슬한 절벽에 건물을 세우고 바위 사이에서 나오는 석간수를 받아 연지를 만들었다. 이곳에 오르면 부용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1,000여평의 공간에 돌계단과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보길도에는 국내외 문학인들이 머물며 창작할 수 있는 윤선도 문학관과 창작실이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
한편, 고산의 생가터는 서울시 종로구 마로니에 공원에 있다. 생가터에 세워진 비에는 고산의 오우가가 새겨져 있다.

천하절경 금쇄동과 수정동

금쇄동과 수정동 역시 고산의 유적지다.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 181번지 해발 280m에 있다. 금쇄동으로 들어가는 계곡은 병풍산이 동·북쪽으로 길게 가로 놓여 있어 약 4km의 계곡이다. 금쇄동 입구가 수정동이다.
고산은 53세 때 영덕 유배지에서 돌아와 집안일은 큰아들에게 맡기고 수정동으로 들어왔다. 윤선도의 세 아들(仁美, 의미(義美), 예미(禮美)) 가운데 장자인 인미는 부친이 유배 중일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탄핵상소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윤선도는 이듬해 이곳에서 금쇄동을 발견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금쇄동기’를 비롯 ‘산중신곡’을 지었다. 창작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고산은 자물쇠가 잠긴 궤를 얻은 꿈을 꾼 뒤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을 발견했는데 그 하나하나가 꿈속의 풍경과 너무 닮아 금쇄동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이곳 고성(古城) 안에 원림을 조성하고 일일이 지명을 붙인 이름이 <금쇄동기>에 전한다. 고산이 지은 건물터와 연못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산의 정상에 서면 두륜산과 달마산은 물론 멀리 월출산과 서남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산은 이곳 금쇄동에 불훤요, 휘수정, 교의재 등을 짓고 연못을 파서 연꽃과 물고기를 길렀다는 기록이 고산연보에 전한다.
금쇄동에는 고산의 제각과 고산의 묘, 신도비 등이 있다. 고산의 신도비는 미수 허목이 비문을 짓고 현손 윤덕희가 세웠다. 한편, 해남윤씨 가에 전하는 신도비(죽은 사람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로 조선시대 이후에는 정2품 이상의 사람만 세울 수 있었다) 고산의 신도비와 충청도 관찰사 행당 윤복의 신도비, 그리고 죽록 윤호관의 신도비 등 3개가 있다.


대법관 국회의원 등 근현대 인물 많이 배출


해남 윤씨 가문에서는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비롯 사회 각층에 많은 인재들을 배출해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근현대인물은 다음과 같다. 특히 해남윤씨가에서는 종씨들의 화합을 위해 파별구분을 원치 않아 세수(世數) 순으로 기록했다.
독립유공자 윤양하(26세) 윤소하 국회의원 (26세) 윤근환 전 농림부장관(26세) 윤재식 전 대법관(27세) 윤재갑 전 해군소장(27세) 윤재명 전 국회의원(27세) 윤관 전 대법원장(28세) 윤내현 전 단국대 대학원장(28세) 고 윤기석 목사(28세) 윤태현 전 남광병원장(28세), 윤영선 전 국회의원(29세) 윤영달 크라운제과 회장(29세) 윤영일 국회의원(29세) 윤일영 전 대법관(29세) 윤형식 어초은파 종손(30세)


◇주변 가볼만한 곳
▲대흥사=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66번지
두륜산 자락에 있는 신라말의 사찰로 문화재 지정 제 508호 사적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22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 없으며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가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이들이 고려시대 승려이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대흥사는 서산대사(西山大師)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조선시대 배불(排佛)의 강압 속에서도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대흥사에서는 13대종사와 13대 강사 등을 배출한 고찰이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현종 6)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간에 조성된 후불탱화(後佛幀怜)를 비롯해서 감로탱화·삼장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천불전은 보물 제1807호이며 내부에 있는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조성하였다.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의중당 동편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절의 유물(遺物)을 보관하는 서산대사유물관이 있다.

▲다산초당 = 정약용(丁若鏞)이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의 산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돼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던 곳이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謂)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정약용은 7년 동안 제자의 집과 주막을 오가며 지내다가 고성사 보은산방을 거쳐 1808년 봄 해남윤씨 가문의 만덕산 자락 다산초당으로 옮겨 후학들을 가르쳤다. 초당의 동쪽 동암에는 다산이 머물렀고 서쪽 서암은 제자들의 기숙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11년 동안 열여덟 제자를 키우고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서책들을 지었다.

◇ 맛집

▲ 해남 호남식당=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143 (061-534-5500)
여행에서 별미집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별미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잔뜩 기대하고 찾아갔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집은 아니다. 대표메뉴가 버섯탕인데 이 버섯들을 주인할머니가 직접 채취해 말린 것들이다. 식당 벽에는 철따라 나오는 버섯사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고 마음씨 좋은 여류화가가 새로 캐온 버섯들을 모아 커다란 채색화를 그려 놓았다, 이정도 되면 믿어버려도 될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시험 삼아 묻는다. 봄철에는 버섯이 나오지 않고 초여름부터 참나무 버섯과 밤버섯이 나오기 시작하고 그 뒤로 갓버섯, 계란버섯, 총각버섯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참나무 버섯과 밤버섯이 나온 뒤 싸리버섯과 서리버섯(가지버섯) 능이버섯 등이 나오는데 능이버섯은 때로 1킬로에 20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곰팡이 버섯, 강강술래 버섯, 오이꽃버섯, 노루궁뎅이 버섯이라는 것도 있다.
대표메뉴인 버섯탕은 17,8 종류 버섯을 넣고 끓이는데 다른 음식들과는 달리 너무 오래 끓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40년 노하우다. 원래 호남식당은 대흥사 쪽에서 여관과 식당을 겸하다가 30년 전 대흥사 일대를 정비할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안주인의 넉넉함과 바깥양반의 너털웃음이 매력이다. 바깥양반이 운전을 할 때 경상도 진주아가씨를 보쌈(?)해 해남으로 왔는데 40년 동안 금슬 좋게 살면서 자녀들 훌륭하게 잘 키우고 지금은 여유롭게 손님들에게 농담하며 식당일을 한다.
소문이 나면서 주말이면 줄을 서야할 정도인데 그 비밀이 바로 대둔산에서 나오는 자연산 버섯 때문이다. 할머니는 겁도 없이 대나무 지팡이를 치면서 멧돼지 같은 짐승이나 뱀 같은 것을 쫓아가면서 많게는 하루 40킬로의 각종 버섯을 등짐에 지고 내려온다. 그래서 지금은 허리가 굽었다. 이 할머니들이 안계시면 자연산 버섯탕은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다. .
호남식당은 버섯탕 말고도 산채비빔밥과 산채정식도 주 메뉴인데 막 채취한 계절나물과 직접 담은 어리굴젓, 묵은지 등이 입맛을 당긴다. 봄날 처음 먹어본 뽕잎 묻힘이라는 것도 별미다.
▲자연산 버섯탕 60,000원(4인) 45,000원(3인) 34,000원(2인) ▲자연산 능이버섯탕 10만원 ▲ 별미산채정식 120,000원(4인기준) ▲산채비빔밥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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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의 마을 주요기사
22. 영광 군남면 동간리21. 함평 대동면 상옥리 옥동
20.순천 주암 죽림리·주암리19.나주 문평면 오룡리
18.나주봉황 철야마을17.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
16 .해남읍 연동15.광산 임곡 너브실
14.장성 맥동·필암마을13.창평 장화리 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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