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9.24(목) 17:55
문화일반 문학/출판 문화화제 전시 연주 공연 영화 연예 특별기고 예술인동정 이슈
2020년 9월 27일(일요일)

15.광산 임곡 너브실

한국 주자학의 큰봉우리 고봉 기대승 선생의 고향 행주기씨 집성촌
선비의 인품이 ‘氷心雪月’같다고 한 빙월당과 “살아 있는 월봉서원”
2018. 04.24(화) 10:12확대축소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저녁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이 차다. 깊은 산기슭에 아직 잔설이 남은 탓일까? 새해 첫 만월(滿月)은 그야말로 설월(雪月)이다.

광산 임곡 너브실의 월봉서원 빙월당(氷月堂)을 찾아가면서 ‘빙심설월(氷心雪月)’을 떠올린다. 고봉의 마음이 얼마나 맑았으면 정조임금이 ‘눈 내리는 달밤의 얼음같이 맑은 마음’이라 했을까? 빙심설월은 빙호추월(氷壺秋月)과 같은 말이다. 호리병속의 얼음과 가을 달을 가리키니 맑고 깨끗함이 눈에 선하다.

450년 전의 큰 선비,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선생을 만나러 월봉서원으로 향하면서 행주 기씨(幸州 奇氏)가 전라도로 내려온 내력이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도 사화의 아픔이 서려 있다. 기묘사화(1519년) 때 복재(服齋) 기준(奇遵,1492~1521)이 조광조(1482~1519)와 같이 도학정치에 뜻을 두었다가 희생되자 두 형(兄)인 기진과 기원이 화를 피해 광주와 장성에 내려온 것이다. 고봉 기대승이 기진의 아들이며, 노사 기정진은 기원의 후손으로 기원은 장성에, 기진은 임곡에 자리를 잡는다. 한말의 대학자이자 의병장인 송사 기우만은 기정진의 손자다. 이 이야기는 고봉을 만난 뒤 나누기로 하고 먼저 월봉서원으로 향했다.

때가 일러 아직 바람 끝은 차갑지만 선운사 동백꽃 만나고 오는 바람에는 노매(老梅)의 향기가 묻어난다. 연전(年前)에 만났던 빙월당 뒤편 대나무숲 바람소리, 참새소리도 궁금하다.
월봉서원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에 있다. 우리말로는 너브실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50여 가구 중 몇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기씨들이 사는 기씨집성촌이다. 임곡면 소재지에서 황룡강변을 따라 가다보면 상무대와 장성으로 나누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철길 아래 굴다리를 끼어 1km 정도 가다보면 바위에 새겨진 ‘월봉서원’ 안내판과 만날 수 있다.

선비의 마음이 얼마나 맑았으면 氷心雪月일까?

월봉서원의 주인공이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다는 조선의 큰 선비,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 1572년) 선생이고 빙월당은 월봉서원의 강당이다. 월봉서원은 1578년 김계휘 등 지방 유림들이 고봉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광산구 신룡동 고마산 아래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했는데, 망천사는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1646년(인조 24)에 현재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로 이전했다. 망천사가 있었던 자리는 고봉이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지었던 낙암(樂菴)의 터다. 월봉(月峯)으로 사액된 것은 1654년(효종 5)이다.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1510~1560)을 배향하는 장성의 필암서원 보다 8년이 앞선다.

월봉서원은 1671년에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이향(移享)하였으며, 1673년에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38년 행주기씨 문중과 전라남도 유림에 의해 세번째 장소인 현재의 임곡동 광곡마을에 빙월당(氷月堂)이 건립되었다.
월봉서원은 정문인 망천문(望川門)을 들어서면 동재인 명성재와 서재인 존성재가 있고 중앙에 강당인 빙월당이 앉아 있다. 망천문은 마을 앞을 흐르는 황룡강을 바라본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빙월당


빙월당 오른편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 474개가 광주광역시 제19호 무형문화재이고, 빙월당은 광주광역시기념물 제9호이다. 빙월당 뒤편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장판각에는 문집인 고봉집, 경연강론을 모은 논사록, 퇴계 이황과 8년여에 걸쳐 주고받은 이기왕복서 등 목판 474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를 아끼는 문중 사람들의 정성이 지극하다. 새콤 설치는 물론 화재예방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또한 다른 서원들과는 달리 문화해설사 등이 상주하고 있어 을씨년스럽지 않고 따스하다.

퇴계선생과 사단칠정 논쟁 너무 유명

고봉 기대승은 행주 기씨(幸州 奇氏)로 중종 22년 광주시 소고룡리(지금의 신용동)에서 출생했다. 월봉서원과는 2km 남짓 떨어져 있는 곳이다. 독학으로 32세(1558년)에 문과을과에 장원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의 신분으로 58세이던 퇴계를 처음 만났다. 퇴계 이황은 당대의 거유였다. 감히 머리를 들 수 없는 관계였지만 고봉은 자기주장이 분명했고 퇴계는 이러한 고봉를 높이 평가해 학우로 대하였다.

퇴계와 고봉은 이때부터 8년 동안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학문을 논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이다. 그러나 그 논쟁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의 바탕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에서 퇴계의 온화함과 고봉의 예의 바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단이란 仁(측은지심) 義(수오지심) 禮(사양지심) 智(시비지심)으로 선한 마음의 이성(理性)을 가리키고, 인간의 7가지 감정인 칠정(희·노·애·락·애·오·욕)은 인간의 본능을 가리킨다. 퇴계는 사단은 이(理)에서 발생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 이와 기를 서로 혼합시킬 수 없고, 따로 분리시켜 보려는 입장이었다. 이는 理(윤리와 도덕)로서 본능을 억제해 이성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봉은 이와 기를 떼어놓고 볼 수 없다고 보았다. 이성과 감정, 즉 사단(理)과 칠정(氣)은 둘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라는 입장이다. 인심(人心)이 밖으로 발현되지 않은 상태가 성(性)이고, 이미 발현되어진 상태가 정(情)이라고 규정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퇴계가 도덕적 원칙을 고수하는 입장이었다면, 고봉은 감성의 변화를 인정하는 포용적 태도를 보인 셈이다.
또한 고봉은 서슬 퍼런 전제왕권주의 정치 아래서 오직 민의(民意)를 따르고 민리(民利)를 쫓는 민본 왕도정치를 주창했다. “언로(言路)는 국가의 대사이므로 언로가 열리면 국가가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위태롭다.”며 언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말로 시대를 앞서간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고봉은 퇴계가 서울을 떠나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갈 때, 한강가에서 유숙하며 봉은사(奉恩寺)까지 따라가 배웅하고 그 석별의 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漢江滔滔日夜流 先生此去若爲留 沙邊 纜遲徊處 不盡離腸萬斛愁)’

“한강은 도도히 쉼없이 흐르는데 선생의 가심을 어찌 말리랴.
모랫가 머뭇거리며 돛 당기는 곳에서 이별의 슬픔 헤아릴 수도 없네”

또한 퇴계는 고봉을 만나고서 남쪽으로 떠나는 고봉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어제는 뵙고 싶은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조심 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 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황이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고봉은 퇴계가 낙향한 이후에도 퇴계에 대한 선조의 심경과 조정의 분위기를 일일이 편지로 적어 보냈다고 알려진다. 퇴계는 벼슬에서 물러나던 날 “성균관에서 당신을 대신할 선비가 누구냐”는 선조의 물음에 호남의 고봉을 들었다고 선조실록 등에 기록돼 있다. 이렇듯 퇴계와 고봉은 학문으로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가까웠기에 퇴계가 선친의 묘갈명(墓碣名)을 고봉에게 부탁했고 자신의 묘갈명도 고봉이 썼다. 퇴계는 죽기 전 고봉이 자신을 과찬할 것을 염려해 고봉에게는 맡기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은 고봉이 쓰게 된다. 고봉은 묘갈명을 쓰면서 통곡했다고 전한다.
빙월당 현판


퇴계가 세상을 떠난 2년 뒤 고봉은 다시 선조의 명을 받았다.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발탁되었던 것이다. 종계변무란 조선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중국 명나라 ‘대명회전’에 왕조의 조상이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치도록 주청한 일을 일컫는다.
선조의 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상경했던 고봉은 ‘변무소’를 쓰는 것으로 역할을 마감하고, 귀향길에 오른다, 그러나 11월 한양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던 도중 병세가 악화돼 태인에서 쓰러졌고, 결국 며느리의 친정집인 고부의 김 점의 집에서 운명을 하게 된 것이다.

27세손으로 성균관유도회광주본부 교육원장을 맡고 있는 기세규(奇世圭) 원장은 “공자께서 인간이 지녀야 할 실천적 도(道)로서 유교를 세우셨고 송나라 주자께서 우주론적 철학과 심성수양의 의미를 더해 성리학을 탄생시켰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퇴계와 고봉, 율곡 등이 그 중심에 서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고봉은 31세의 나이에 주자의 방대한 저작인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섭렵하여 4권으로 압축한 주자문록(朱子文錄)을 낸 바 있다.

한 해 3만여 명이 찾는 살아 있는 서원

월봉서원은 최근 35억원을 투입해 유물관과 교육관, 관리사 등을 새로 지었다. 또 마을입구에서 서원으로 가는 길가의 담을 돌담으로 교체하는 등 많은 복원작업을 끝마쳤다. 2003년에는 유물관 바로 뒤에 선생의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조순 전 총리가 짓고 글씨는 서예가 학정 이돈흥이 썼다. 올해부터는 184억원을 들여 수련원을 건립한다는 계획으로 세밀한 작업이 이루지고 있다. 수련원이 완성되면 그야말로 청소년교육을 비롯한 심신함양의 터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월봉서원에서는 외형적인 복원 뿐 아니라 이미 10여 년 전부터 고봉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각종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른바 유교아카데미, 비밀의 서원-월봉, 선비의 하루, 살롱 드 월봉, 꼬마철학자 상상학교, 월봉유랑, 도봉다움 고봉다음, 서원음악회, 고봉학술대회 등인데 지난 한해 프로그램 참가자가 9,535명이나 된다, 고봉서원 답사자도 23,000명에 달한다. 이래저래 지난해 월봉서원을 찾은 사람이 32,500여명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원을 찾는 것은 좋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이유도 있지만 봄은 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사시사철의 경치가 방문객의 마음을 붙잡기 때문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에는 수백그루 매화송이가 봄의 향기를 전하고 4월이면 벚꽃이 만개, 봄 속의 겨울을 연상시킨다. 또 여름이면 백우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무더위를 식혀주고 겨울이면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산등성이와 서원의 고즈넉함이 지친 도회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기에 충분하다.
마을입구에서 서원에 이르는 골목길도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새로 쌓은 담장인데다 너무 일률적이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돌담길이 주는 정겨움을 어디서 맛보랴?

또 삐그시 열린 사립문 사이로 보이는 시골집 앞마당도 영락없는 고향집 모습 그대로다.
월봉서원 아래쪽에는 구한말 때 선조들을 제사하기 위해 기씨 문중에서 세운 귀후재(歸厚齋)란 재각(齋閣)이 있다.
“귀후재가 서당이었다는 얘기가 떠돌았던 적이 있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100여 년 전 후손들이 재각으로 지은 것으로 어린 시절 직접 제사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월봉서원 별유사 기규철(27세, 奇奎哲) 씨의 증언이다.
노사 선생 친필


서원을 끼고 멀리 한바퀴 도는
철학자의 길

월봉서원을 끼고 송림이 우거진 길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면 묘소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서원을 한바뀌 도는 코스가 철학자의 길이다. 고봉선생이 이 길을 걸으며 사색했음을 상기하면서 1시간 반 남짓 산책하며 고봉을 생각하는 코스다. 아니 철학자의 길을 걷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길이기도 하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데다 숲길이어서 햇빛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묘소로 향하는 길에 선생이 남긴 600여 편의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시 한편이 시비로 세워져 있다.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가마난
백년(百年)이 못되어 무덤 우희 밧츨가니
하믈며 여나믄 장부(丈夫)야 닐러 무삼하리오.

신릉군은 중국 전국시대 4공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는 위소왕(魏昭王)의 아들이다.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한 한글시 한편을 읽으며 잠시 숨을 돌린 뒤 50여m를 오르면 고봉의 묘소다. 백우산 산자락 월봉서원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이라 시야가 뚝 트인다. 부인 함풍이씨의 묘와 나란히 안장되었다. 묘에는 450년 역사의 문인석과 비석이 서있는데 문인석 뒤쪽 곳곳이 패어 있다. 6.25 당시 미군들이 문인석을 탄착으로 삼아 사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고봉의 묘소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고봉이 청년기에 수양하며 지냈다는 귀전암(歸全庵) 터가 있다. 고봉묘소에서 아래쪽으로 50여m 내려오면 아들인 함재 기효증(涵齋 奇孝曾)의 묘이다. 이 곳 역시 부령김씨 부인과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부령은 오늘날 전라북도 부안으로 장인은 매당 김 점이다. 고봉이 건강이 악화돼 고향으로 돌아올 때 태인의 동헌에서 머물다가 관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며느리의 친정집으로 옮겨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생각이 깨어 있는 사람들은 뭔가가 다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장판각


백우산 자락 3천여평에 자리잡은 愛日堂

너브실의 중심에는 애일당(愛日堂)이라 불리우는 기세훈(1914~2015)고택이 있다. 애일당이란 날마다 부모님을 생각한다는 뜻을 가진 당호다. 고봉의 6대손인 기언복이 숙종 때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5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집터다. 애일당은 현재 고봉학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애일당은 원래 광주시 동구 금남로 교보빌딩 자리에 있었던 건물이다. 1980년대 초 금남로가 확장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건물은 일제시대 지었기 때문에 전통한옥과 일본식이 조합된 건축물이며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애일당 관리사는 남향의 한옥이다.
애일당은 고봉의 13대 후손인 기세훈이 생전 사재를 털어가며 꾸려나갔다. 고봉학술원을 만들어 ‘전통과 현실’을 발간해 고봉정신을 현창하고 우리의 가치를 지키는데 앞장서왔다.

애일당의 전체 대지는 3,000여 평이고 이 가운데 2000여 평이 대숲이어서 고택의 멋을 더해준다. 대숲에서는 사시사철 이름 모를 철새들이 쉬어 놀고 숲에는 아침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죽로차(竹露茶)가 자란다.
특히 애일당에서 사용하는 식수도 대나무 숲을 통과한 자연수다. 그물처럼 촘촘하게 박힌 대나무 뿌리를 통과하면서 자연 정수되는 것이다. 풍수가에서는 기세훈 고택을 해남의 녹우당(윤선도 고택), 구례의 운조루와 함께 대표적인 전남의 양택으로 꼽는다.
집터가 노령산맥의 지맥이 광주 쪽으로 가다가 그 끝에 뭉친 백우산 자락(해발 260m)에 있다.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의 백우산은 옛날에는 청량산(淸凉山) 이라고 불렸는데 얼마 전부터는 백우산으로 부른다.
고봉 기대승 묘소


집 앞으로는 조그만 실개천이 흐른다. 이 실개천이 집의 내당수(內堂水)가 되고 이 내당수는 좌우 양쪽에서 집터를 감아 흐르다가 대문 앞에서 합수되어 황룡강으로 흘러간다. (조용헌 선생)
고택에서는 매년 학술회의가 열려 많은 학자들과 화가, 소설가, 도예가, 사진작가, 국악인, 디자이너, 향토사학자, 조각가, 영화인들도 방문해 고봉의 정신을 되새기고 돌아간다.

고봉학술원의 돌담길 바로 오른쪽에는 칠송정(七松亭)이 남아 있다. 이곳은 고봉의 장남 함재 기효증(涵齋 奇孝曾)가 선친의 3년 시묘살이를 했던 자리다. 칠송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587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함재는 부친의 뜻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대적하였고 의곡 3000석을 모아,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보내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선조임금이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되는데 그는 사양하고 이곳에서 선친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칠송정이란 이름은 후대에 와서 당시 선조임금이 함재의 충의를 높이 평가했다는 말을 듣고 후손들이 정자를 짓고 손수 일곱 그루 소나무를 심어 불변의 지조를 기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곱 그루의 소나무는 남아있지 않다. 칠송정을 내려오면서 지금이라도 일곱 그루 소나무를 다시 심어놓으면 한 일백년쯤 후에는 칠송정이 더욱 빛나리라는 생각도 했다.
고택의 종손이었던 고 기세훈은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광주고보를 거쳐 와세다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사법고시에 합격하고서도 판사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는 판사가 되는 것보다 고봉의 후손인 것으로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후 1969년에 서울고등법원장을 거쳐 초대 사법연수원장을 지냈는데 사법권 독립을 요구하는 사법파동의 주역이 되어 옷을 벗었다. 그 뒤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행주 기씨(幸州 奇氏) 대종회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사재를 털어가며 고봉학술원을 운영했다.

기묘사화 피해 광주와 장성으로 은거

한편, 광주 일대에서 기·고·박이라고 행주 기씨와 창평 고씨 충주 박씨를 명문가로 부른다. 기씨 집안이 명문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고봉 기대승이라는 걸출한 인물 때문이며 고씨 집안에서는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전투에서 삼부자(三父子)가 함께 전사한 의병장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년)을 비롯 많은 인물을 배출해다. 또 박씨 집안에서는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을 날린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년)과 그의 동생인 육봉(六峯) 박우(朴祐, 1476~1547년), 그리고 육봉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년)이 있다.

여기서 잠시 행주기씨 내력에 대해 살펴보자. 행주 기씨는 기자 조선을 세운 기자(箕子)를 선계조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세계(世系)가 전해지지 않아 고려 때 문하평장사를 지낸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로 한다. 1688년(조선 숙종 14) 족보를 개편할 때 이곡(李穀)이 지은 기황후(奇皇后)의 아버지 영안왕(榮安王) 기자오(奇子敖)의 행장(行狀)을 따라서 영안왕의 5대조인 기순우를 1세로 기록한 것.
중흥시조는 시조로부터 10세손인 청백리 기 건을 꼽으며 고봉은 13세손이다. 고봉의 아버지는 5형제인데 형, 원, 괄, 진, 준이다. 막내 준이 기묘사화에 연루돼 참화를 입자 둘째 형 원과 넷째 형 진이 장성과 광주로 내려온 것. 원의 후손이 노사 기정진(24세), 그의 손자 송사 기우만(26), 기 진의 아들이 고봉 기대승(13세)이다.

장성의 맥은 노사- 송사·삼연-산도 등으로 이어져

장성의 손으로는 노사-송사와 기삼연(25세) 식재 기재(奇宰,25세),그 아들 기산도(26세) 등으로 이어지는데 중심에 노사 기정진(1798~1879)이 있다.
노사는 조선 후기의 주자학자로 6대가의 한 사람이다. 철종임금이 “장안의 만목(萬目)이 장성의 일목(一目)만 못하다”는 그 일목(一目)의 주인공이자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이 ‘문장에 있어서 장성만한 곳은 없다(文不如長城)’라 한 것도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7세 때 맷돌을 보고 시를 짓고 9세에 경사에 통했다는 천재다.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강릉참봉,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삼남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임술의책〉을 작성하여 폐단을 지적했고 병인양요 때는 <육조소〉라 불리는 첫번째〈병인소〉를 올려 방비책을 건의했다. 2번째 <병인소>에서는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했다.

노사는 정치사상면에서는 위정척사의 입장에 있었으며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애국우국의식의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정재규 등 한말 의병정신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노사의 저서로는 <납량사의>, 사단칠정 문제를 다룬 <우기>, 태극도설에 있는 정자에 대해 해설한 <정자설> 있다. 또 이이의 이통기국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이통설>, 81세에 저술한 <외필> 등이 있다, 1960년에 노사의 후학들에 의하여 간행된 ‘노사선생 연원록’에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이나 되고 그들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노사학파를 형성하였다. 노사는 80세 되던 해 장성 진원 고산리에 이사하여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교유하다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노사의 정신을 그대로 이은 사람이 손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이다. 한말의 대학자이자 의병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거적자리를 깔고 잠자리에 들었으며, 호남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장성,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의병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대밭 속에 토굴을 파고 들어가 침식을 끊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강학을 일삼아 많은 제자를 길렀다. 선생의 저서에는 문집 27권이 있다.

장성의 기씨 문중에서는 한말 성재 기삼연(25세,1851~1908), 식재 기재(奇宰, 25세),그 아들 기산도(奇山度, 26세) 등 우국열사들이 많다. 기삼연은 기정진의 문인으로 한말 의병장이다. 을미사변 이후 기우만과 의병을 일으키고 1907년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는 등 항일선봉에 섰다가 1908년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 당하고 말았다. 식재(植齋) 기재(1854~1921) 역시 기정진의 문인으로 집안의 형인 기우만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국가의 안녕을 위해 농병정책을 주장했다, 저서로 <식재집> 3책이 있다.
기산도는 의병장 삼연의 종손이자, 재(宰)의 맏아들이다. 의병장 녹천 고광순의 사위이기도 하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자강회’라는 결사대를 조직해 활동했고 1906년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칼로 찌르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노사 기정진, 송사 기우만 등 배향 장성 고산서원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에 있는 고산서원(전남도 기념물 63호)에는 노사 기정진을 비롯 송사 기우만 등 애국지사를 배향하고 있다. 이곳은 노사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담대헌이란 정사를 짓고 강론하던 자리다. 1927년에 후손들이 중수하여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 편액을 건 곳이다.
기정진이 주향(主享)되었으며, 김녹휴·조의곤·정재규·기우만·김석구·정의림·이최선 등의 8인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경내에는 외삼문, 강당, 동재, 서재인 집의재, 내삼문, 사당인 고산사(高山祠)가 제향공간을 이루고 있고, 선생의 문집과 목판 등이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글머리에 언급했던 기 준(1492 152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기묘명횬의 한사람이다. 기묘명현이란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일컫는 말이다.
기준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와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기묘사회로 조광조·김식(金湜)·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고, 어머니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이 터져 유배지에서 교살되었다.
그의 시가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수록되었으며 저서로는 『복재집』·『무인기문(戊寅紀聞)』·『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민주당 국회의원 기동민, 축구선수 기성용 등

근현대 인물 가운데 기세익(27세, 전 광주지방경찰청장), 기연수 27세, 전 한국외국어대학 국제대학원장) 기세훈 ( 27세, 초대 사법연수원장) 기춘석 (28세, 전 한양대의대 내과과장) 기백석 (28세, 전 중앙대 의대 신경정신과교수)은 고봉의 후손들이고 기용주 (전,광주전남지방 병무청장) 기성용(29세, 네덜란드 스완지 시티 AFC 축구선수) 등이 고봉의 형 승지공 대림의 후손들이다.
장성 문중의 후손들로는 기동민(28세, 19대 국회의원) 기보배( 29세,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등이 있다.

주변 가볼만한 곳 쫸

▶용진산(聳珍山) = 해발 349m의 산으로 광주시 광산구 본량과 임곡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들 가운데 있으면서 겹겹으로 포개져있는 높은 산으로 그 안에는 동굴과 폭포가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선생이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다 빼어난 경치에 빠져서 며칠 묵었다고 전한하다. 일제 때는 전국에서도 이름 있는 금광(金鑛)이 있었던 곳이다.
용진산은 그 주봉의 하나인 석봉은 이름 그대로 온산이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붓끝처럼 뾰족하다, 또 하나의 주봉인 토봉은 흙과 숲으로 우거져 있으며 두 주봉을 둘러싼 크고 작은 연봉들이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산행은 임곡면 사호동에서 시작되어 본량면 내왕산 마을에서 끝난다. 광주광역시로 편입된 뒤 광주시민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용진상 북쪽 산허리에 가학정이란 정자가 있다. 가학정은 임진왜란 때 벼슬도 없이 선조임금을 모시고 북행(北行)에 따라가 공을 세운 죽산박씨 중시조 박경을 기리는 정자다. 임금이 시호와 지팡이를 내리고 나라 돈으로 정자를 짓게 했는데 황룡강 맑은 물이 정자 밑으로 길목에는 백년 노송(老松)을 비롯하여 비자나무, 싸리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용진산 남쪽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한 용진정사는 한말의 대학자이며 애국지사이기도 한 후석 오준선 선생이 후진을 가르친 곳이다. 이 정사는 나주 출신의 한말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의병장 면암 최익현선생을 비롯하여 전해산 김태원, 오상렬, 오성술장군 등이 오준선 선생을 찾아 드나들며 항일전략을 세우고 의논한 곳이기도 하였다.
용진산 서쪽 높은 산골짜기에 왕동저수지가 자리하고 있어 도시인들이 하루의 행락을 즐기기에 알맞은 곳이다.
주요 명소로는 여래석불(如來石佛)이 있다. 4백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가학정 가는 길목의 깍아지른 듯한 높은 암벽(岩壁)에 자비(慈悲)로운 미소의 석가모니 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민박 쫸

너브실에는 엄밀한 의미의 민박집은 없다. 도시와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월봉서원의 수제(手製) 교실로 사용하는 다시(茶時)라는 카페가 운영되고 있는데 이 건물의 원래 이름이 이안당(怡安堂) 이다. 민박을 하기 위해 지었는데 방의 크기가 작아 불편하기는 하지만 민박도 가능하다.
이곳 다시는 말 그대로 차를 마시면서 선비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공간이다. 또 뜨개질 같은 간단한 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현재는 매주 수요일~일요일까지 운영하는데 이용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다.


맛집 쫸

월봉서원은 시골마을이기 때문에 식당이 따로 없으나 3,4년전 마을초입에 순도부집 하나가 생겨 간단한 요기가 가능하다. 가마솥순두부(062-372-4124)는 전통기법으로 두부를 만든다. 콩을 물에 불려 8~12시간 담갔다가 맷돌에 갈아 가마솥에서 끓여내 간수를 부어 만든다. 간수는 염전에서 직접 가져와 사용한다. 순두부 백반은 6,000원, 전골(대) 35,000원, 전골(소)20,000원 등이며 두부만 사가는 경우는 5,000원이다.

▶행복한 고기밥상= 광산구 고봉로 797번지 (062-952-3145)
단체손님이나 본격적인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임곡면소재지로 나와야 한다. 승용차로 5분 남짓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행복한 고기밥상’이라는 이름의 식당인데 13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
식당을 오픈한지는 1년 남짓 되었지만 음식경력은 오래 되었다. 교회식당에서 오랫동안 주방봉사를 하다가 손맛이 소문이 나면서 식당을 개업했다. 면소재지에 있어 촌닭백숙, 제육볶음, 갈치조림 등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대표메뉴를 꼽으라면 안주인이 자랑하는 해신탕이다. 해신탕은 촌닭이나 오리에 문어와 전복을 넣은 보양식인데 그 맛이 일품이다. 가격도 4인기준 7만원으로 가장 비싸다.
이 집의 특징은 모든 식재료를 국산으로 사용한다는 것과 날마다 밑반찬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곡성 옥과에서 우렁이 농법으로 키운 친환경 쌀을 사용한다는 것 등이다. 안주인의 손맛은 겉저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봄동이나 채소를 뜯어다가 양념간장을 뿌려주는 정도인데 신선하고 맛있다. 생선조림도 무가 검은색을 띨 때까지 오래도록 졸여서 입에서 설살 녹는다.
촌닭백숙이나 닭볶음(4인)은 45,000원, 갈치조림(대)45,000원, 고등어조림(대) 35,000원이며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쌉밥이나 오리탕은 7,000원이다.

글 : 지형원 (발행인) / 사진 임철진 (사진작가)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이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개)
이 름 비밀번호 이메일
이모티콘
제 목
내 용
전남의 마을 주요기사
24. 화순 한천면 정리 23.장흥 안양면 학송리
22. 영광 군남면 동간리21. 함평 대동면 상옥리 옥동
20.순천 주암 죽림리·주암리19.나주 문평면 오룡리
18.나주봉황 철야마을17.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
16 .해남읍 연동15.광산 임곡 너브실
최신 포토뉴스

작은 레퀴엠 ‘살아…

예술인과 점포, 문…

도시화 시대, 광주…

광주시 무형문화재 …

특집기사 전라도문화수수께끼
통발굴 전남의 마을 1박 2일
인물 해외통신원 리포트
 2020. 9 
12345
6789101112
13141516171819
20212223242526
27282930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일 2일 3일 4일 5일
6일 7일 8일 9일 10일
예술인과 점포, 문화공간이 만든 …
작은 레퀴엠 ‘살아남은 자의 부끄…
광주시 무형문화재 황승옥 보유자 …
도시화 시대, 광주천과 광주 사람…
웰빙 라이프
광주-서울 항공요금 4만 1천원으…
한국공항공사(사장 김석기)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에어부산과 함께 23일부…
광주-제주 저가항공 신규 운항 시…
호남권 최초 저비용항공사인 티웨이항공이 4일 오전 7시 TW901편을 시작으로 …
인사말 | 회사개요 | 회원약관 | 개인보호정책 | 청소년보호정책 | 공지사항 | 광고문의 | 기사제보 |

Copyright ⓒ . 제호 : 문화통. 관리자에게 mhtong@hanmail.net for more information

사단법인 광주문화발전소 발행인 겸 편집인 : 지형원 등록번호 : 광주아 00031 등록일자 : 2008년 12월 31일

주소 : [61475]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196번길 8 오송빌딩 301호 제보 및 각종문의 : 062-226-5511 FAX : 062-226-1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