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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7일(일요일)

13.창평 장화리 장전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후손들의 집성촌…“장전이씨”마을로
이한기 국무총리·6.25 납북 화학자 이승기 박사의 고향
2017. 09.25(월) 19:23확대축소
담양 창평의 장화리 장전마을을 취재하기 위해 문헌자료를 찾고 향토사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특이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장화리만 하더라도 분명히 전주이씨 후손들인데 장전이씨로 부르고 고씨들도 장흥고씨라 하지 않고 창평고씨로 부른다는 사실이다. 또 창평 박씨와 절산 박씨도 원래는 같은 함양(본)의 4촌간인데 그렇게 부르고 해공리의 류씨들도 문화 류씨라 하지 않고 얼구실 류씨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창평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들 성씨들이 왜 본래의 본이 아닌 창평 고을을 앞세우는 것일까? 향토사학자들은 이들이 한결같이 향토색 내지는 자긍심의 발로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장화리 장전 이씨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노사 기정진의 제자 이최선이 병인양요(1866년)가 일어나자 의병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서양 세력을 막기 위해 ‘종성구국론’을 내세웠다.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기당(箕堂) 이한기(李漢基, 1917~1995) 박사의 고향이자 6.25 당시 납북되었던 고분자화학자 이승기(1905~ 1996) 박사의 탄생지이기도하다.

창평 고씨들은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장군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와 형 고종후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학봉(鶴峯) 고인후(高因厚, 1561~ 1592)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가고 있다. 엄밀히 말해 장흥고씨 학봉파라고 할 수 있는데 후세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창평고씨로 불리우고 있다. 구한말에는 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이 왜군과 싸우다가 구례 연곡사에서 순절했다. 또 다른 후손이었던 고정주(高鼎柱, 1863~1933)는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워 많은 인재를 길렀다.
이달에 찾아간 담양 창평의 장화리 장전마을은 이름에 걸맞게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자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마을이다. 우선 150여년에 이르는 ‘창평 장전이씨 이승기 고택’(전남도 민속자료 제 41호) 이한기 고택, 그리고 한말의 학당이자 애국운동의 산실이었던 문일정(聞一亭), 장전 이씨 제실인 몽한각(夢漢閣) 등이 오랜 세월의 풍랑을 이기고 굳건하게 서 있다.
문일정


‘장전이씨 승기고택’으로 명명된 이집은 장전에 최초로 입촌한 이형정(李衡井, 1682~1752)의 종가이자 이승기 박사의 생가다. 이승기 박사는 세계 최초로 비날론(Vinalon)을 발명한 과학자이자 한국 전쟁시 납북돼 북한에서는 ‘노력영웅’ 칭호까지 얻은 유명한 고분자 화학자이다. 월북자로 분류되면서 가까운 가족들이 어려움을 겼었지만 납북으로 밝혀졌다.
서울에서 나일론을 개발할 당시 연구에 참여한 마경석 국순헌 연구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당동의 여동생집으로 피난을 가다 납북되었다는 것. 월북이 아닌 납북이었음에도 많은 종친과 후손들이 피해를 입고 살아야 했다.

양녕대군의 증손자 이서가 담양으로 유배

장전이씨가 창평에 터를 잡은 내력은 이렇다. 셋째동생 충령대군에게 왕위를 물러준 양녕대군의 증손자 추성수(秋城守) 이서(李緖, 1484~?)가 담양으로 유배를 왔다가 14년 만에 풀려났으나 귀경하지 않고 대덕면 등갈리에 머물었기 때문이다.
이서가 이곳으로 유배를 온 것은 대사성 이과, 하원수 이찬, 병조정랑 윤귀수, 내금위패두 김장·손유 등이 중종을 몰아내고 견성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다가 서얼인 노영손의 고변으로 탄로가 났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이과·이찬·손유는 죽임을 당하고 이찬의 형인 진성수 이면(李綿)은 경상로 초계로, 동생인 이서는 전라도 창평으로 유배되었던 것.

창평의 장화리 장전마을로 향하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주유천하 (周遊天下) 했던 양녕을 다시 떠올렸다. 세상에는 그가 장자로서 왕위를 이어받을만한 위인이 아니고 방탕한 사람으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는 바람둥이가 아니라 그 시대의 로맨티스트였다. 그리고 부모의 마음을 미리 헤아릴 줄도 알고 동생을 위해 비켜설 줄도 아는 넉넉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세종이 훗날 성군으로 칭송받게 된 데는 양녕과 효령의 희생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양녕은 어느 날 세종에게 묘향산 유람을 청해 허락을 받고 길을 떠나게 된다. 세종은 형에게 색향이라 조심하라고 전송하고는 평안감사에게 사람을 보내 참한 기생을 뽑아 양녕을 모시게 하고 궁중으로 보내라고 명한다.
양녕은 길을 나서며 기생은 물론 어떤 여인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이것이 어명이라고 알렸지만 결국 평양감사의 계략(?)에 빠져 정향이란 평양기생과 밀회를 하고 만다.
그리고 묘향산으로 떠나면서 정향의 치마폭에 칠언율시를 써주게 되는데 그 시가 이렇다.
다리 위에 말 세우고 이별 슬퍼 지체하니/ 버드나무 높은 가지 미운 생각 이는구나./여인은 인연이 엷다고 새 원망 품는데/ 사나이는 정이 깊어 뒷날을 기약하네/
복숭아꽃 오얏꽃 만발하는 한식철에/ 자고새 날아드니 해는 이미 지고 있네/ 뜰 앞에 우뚝 솟은 한 그루의 정향수에./억지로 춘심 품어 그 한 가지 꺾었도다.

시대의 로맨티스트 양녕대군

양녕이 묘향산으로 떠난 뒤 정향은 대궐로 올라가게 되는데 세종도 그 미모에 감탄했을 정도다. 묘향산으로 갔던 양녕이 정향을 잊을 수 없어 다시 평양 객사로 돌아오는데 정향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대궐로 돌아와 세종과 마주하니 어느 여인이 양녕을 맞는다.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던 양녕에게 정향이 치마폭에 써준 글씨를 보여주며 정향임을 알린다. 세종은 자기에게 왕위를 물려준 형님을 끝까지 잘 보살폈고 이후에도 기행으로 상소가 빗발치지만 세종은 끝까지 형을 지켰다.
양녕은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적장자다. 그의 기행으로 대신들의 폐세자 상소가 이어졌지만 태종은 왕실의 피바람을 멈추기 위해 장자승계의 원칙을 지키기 노력한다.

어느 날 양녕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마주앉아 충녕대군이 큰 아들이었으면 하는 고민을 듣게 된다. 이후로 더욱 기행을 저질렀다. 상왕인 큰 아버지의 애첩이었던 초궁장을 건드리고 조정대신인 관선의 첩인 어리를 빼앗아 이 일로 결국 폐세자가 되고 만다.
양녕은 효령에게도 부왕의 뜻을 알리게 되고 결국 효령도 왕위를 포기하고 한양을 떠나 절들을 찾아 나선다. 양녕은 폐세자가 되어 유배를 당하지만 곧 양녕의 깊은 뜻을 아는 세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곧바로 형의 유배를 풀어준다.

“나의 후손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라” 유언

양녕대군파의 4세손인 이서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영수(5세)-영(6세)-관(7세)-두현(8세)-석(9세)-형정(10세, 1684~1752)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14세까지는 “나의 자손은 관직에 나가지 말라”는 이서의 유언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고 유가(儒家)의 길을 걸었다.
한기고택 영서당


이씨들이 장전으로 들어온 것은 10세 형정이 1710년께 장전으로 입촌하면서부터다. 이후 동근(11세)으로 이어지다가 큰아들 휘노(12세) 정노로 나뉘는데 휘노의 7대 장손이 승기파이고, 정노의 7대 장손이 한기파다. 휘노는 인용(13세)-규빈·규찬 3형제(14세) -붕선 구선(진사) 준선(정언) 등 6형제(15세)-승민(16세) 현수(17세)-이송 병성(18세, 경기전 참봉)-승기(19세)로 이어진다.
한기파는 정노-세용(13세)-규현·규형 형제(14세)로 이어진다. 규현은 외아들 윤선을 두었으나 규형은 최선·정선·행선(15세) 3형제를 두었는데 이때부터 벼슬길에 나간다. 맨 처음 큰집에서 준선(정언)이 나가고 뒤를 이어 석전공(石田公) 최선(最善)이 벼슬길에 나간다. 15세 구(귀)선이 처음으로 생원시험에 합격한 데 이어 최선이 1854년 감시에 합격하고 준선·최선과 숙항간인 규영이 의금부도사로 나가자 문족들이 문회를 열어 정자건립을 결의한다. 이 정자가 바로 문일정이다.
이후 아들 청고(靑皐) 승학(16세)-손자인 옥산(玉山) 광수(17세) -증손 혁(18세)-고손 한기(19세)로 -종걸(20세) 등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사상가·교육자 이최선

장전 이씨의 여러 인물 가운데 주목해야 할 사람이 석전(石田) 이최선 (李最善.1825~1883)이다. 조선후기의 사상가, 성리학자, 교육자로 나라를 걱정하며 척사위정·애국애족·빈민 구제에 앞장섰고 아들 청고(靑皐) 이승학, 손자 옥산(玉山) 이광수 등이 3대에 걸쳐 의병활동에 참가했다. 최근인 지난 6월 담양 문화원에서 이최선 선생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 바 있다.
석전 이최선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장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선 성리학 6대가 중 하나인 노사 기정진의 애제자이다.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삼정책’을 지어 나라를 바로잡고자 했으며 외세에 맞서 의병을 모아 나라를 지키고자 했고, 가뭄에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도 힘썼다.

이최선이 노사 문하에 들게 된 것은 부친 치고(穉固) 이규형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동학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규형은 아들 최선과 손자 승학을 기노사에게 보내 공부를 하도록 했고 승학의 아들 광수는 기노사의 손자이자 제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 16)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두 집안의 깊은 학연을 헤아릴 수 있다.
실제로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이최선이 종친들과 동의계(同義契)를 조직하고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향할 때 기정진과 이최선이 보여주는 스승과 제자의 돈독한 정은 ‘강화도를 향하여’란 시에 잘 나타나고 있다.

금성의 가을빛 이별 노래 드리우고/ 긴 채찍 주려하나 늙음을 어이하리
종성(宗姓)이니 마땅히 의병을 주창하리/ 빗기는 경과 휘두르는 창 어느 것이 더한지 (金城秋色入離歌 持贈長鞭奈老何 宗姓宜爲編戶倡 橫經孰與揮戈多)

해와 달이 황도에 걸려 있음을 볼 뿐이니/ 남아(男兒)가 어이 푸른 도롱이 입고 누워만 있으니 객중에 날아오는 기러기 만나거든/ 한수가 잠잠해 파도 없다 전해주오
(但看日月麗黃道 焉有男兒臥綠蓑 客裏若逢賓雁 爲傳漢水精無波)

스승 기정진은 이최선이 무사히 돌아올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답시한다.
스산한 서풍에 칼을 잡고 크게 노래하니/ 창황은 국사를 맞이하여 어찌하리오
위기에 처해 성패여부를 내 헤아릴 바 아니오/ 쾌히 죽은 의기남아 얼마나 되었던지(仗劒西風一放歌 蒼黃時事奈如何 臨危成敗非吾度 快死南兒問幾多)

이날에사 비로소 창의조서 받자옵고 / 만년에사 겨우 도롱이를 벗었네
스승께서 별지에 보내주신 은근한 뜻 / 강화에 나아가 배를 댈 것을 흰 물결두고 서약하네( 是日方承催血詔 晩天容易脫漁蓑 師門贈別慇懃意 歸泊江都誓一波)

이최선이 강화도에 도착하였을 때는 프랑스군이 퇴각한 후였다. 그러나 후일 또 다른 침략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을 만나 인재를 얻는 일과 독서를 하는 일에 힘써 백성의 마음에 광명과 화합을 심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이최선은 1825년 석전 이규형과 상산김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세에 글을 알았고, 5세에는 글을 지었다고 한다. 12~13세 때에는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며 15세가 되자 부친 규형이 친구인 노사 기정진(1798~1879)의 문하에 보냈다.
최선은 17세에 어머니를, 27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자 기정진을 부친처럼 모시고 학문에 정진하여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35세(1859)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일시(一詩)’과목에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增廣進士)가 되었다. 50세(1874) 때 왕세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열린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응시했으나 초시에 불합격하자 은장도와 옥거울을 한강물에 던지고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전한다.

최치원의 시 ‘대 지팡이는 산을 나서지 않을 것이며, 붓은 서울로 보내는 편지를 쓰지 않으리( 無出山步 筆絶入京書)’와 두보의 시 ‘돌밭 띠풀집은 푸른 이끼로 황량한데, 다만 원컨대 남은 생애 밥이나 배불리 먹었으면 한다 (石田茅屋荒蒼笞 但願殘年飽喫飯)’를 고향 집에 붙여두고 향촌에 은둔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노사의 대표적인 제자였던 이최선은 스승이 위정척사의 불을 지피자 전주이씨를 중심으로 의병에 나설 것을 호소하게 된다. 위정척사란 조선 후기 정학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기 위해 일어난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기우만 이항로 김평묵 최익현 등 반외세를 주장한 위정척사파는 변인양요 등 외세에 맞서 상소운동을 벌였다. 송사 기우만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결사항쟁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이최선의 사상은 성리학적으로는 기정진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했다. 이를 위해 그는 기정진의 사상이 담긴 <외필(猥筆)>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독외필(讀猥筆)>을 써서 인간 본성 속의 이(理)를 절대적 가치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최선이 살았던 조선 후기는 격심한 변화와 혼돈의 시기였다. 혹세무민의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했고 밖으로는 서양의 진출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거쳐 병자수호조약(1876)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으로 전국에서 이를 규탄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이최선은 비록 지방의 향리였지만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38세 때에 <삼정책>을 지어 “기강의 해이와 염치의 상실은 삼정의 폐단보다 더욱 심하다”고 역설했다. 담양부사에 의해 기각되어 조정에까지 이르지 못했으나 스승인 노사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이최선은 이후 아들 승학과 손자 광수와 함께 문일정에서 책을 읽고 학문을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인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이끄는 장성의병에 가담하였고 아관파천 때 의거한 인물이었다. 성균관의 박사를 지낸 손자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 1873~1953)는 송사의 문인으로 이기(李沂)·윤주찬(尹柱瓚)·민형식(閔衡植) 등과 자신회라는 조직에 가담했으며 을사오적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이최선의 실천론은 3대에 걸쳐 구국의병활동으로 이어져 오늘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한말 애국운동의 산실 문일정

문일정(聞一亭)은 한말 애국운동의 귀중한 산실로 지어진 배경은 이렇다. 오랫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던 장전 이씨 집안에서 구선(진사) 최선(진사)과 준선(정언) 등이 벼슬길에 오르자 대소가 사람들이 종가의 사랑채(매오당)에 모여 잔치를 벌이고 정자건립을 결의했던 것.
정자 건립은 최선이 주도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일정이라는 이름은 스승인 기노사가 문일정과 견일정(見一亭) 가운데 택하도록 해 문일정으로 정했다고 전한다. 현재 문일정에는 기노사가 쓴 문일정기가 전하고 있다.
문일정은 한때 이병성의 주도로 장명학당이 열리기도 했다. 장명학당은 일종의 야학으로 낮에는 종친들의 모임인 화수회가 열리고 저녁에는 학동들에게 신학문을 가 르쳐던 것. 문일정 이외에도 3채의 집이 있었으며 2,000여 평의 운동장과 학당소유의 전답 40여 마지기가 있었다 한다.(이병해 증언)

이병성이 문일정에 장명학당을 개설한 것은 1908년 설립된 창평의숙이 2년 뒤 국가에 기부채납 돼 창평심상소학교로 바뀌자 창흥의숙의 연장선상에서 장명학당을 열었던 것. 이병성은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 1863~1933)가 창평의숙을 만든 뒤 서울에 호남학당을 설립하기 위해 상경하자 줄곧 창평의숙의 운영을 맡기도 했는데 이런 정황이 장명학당을 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문일정 입구 바위에는 “왕실세좌(王室世座)”라고 새겨져 있다.

한새울터에 세워진 몽한각(夢漢閣)
큰새가 알을 떨어뜨린 자리에 세워진 몽한각


담양 대덕면 매산리에 있는 이서의 재실이다. 이서는 양영대군의 증손으로 1507년 이과(李顆)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평으로 유배되었다가 1520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귀경하지 않고 이곳에 남아 후진 교육에 전념한 인물이다.
250여년이 지난 뒤 1803년(순조 3) 후손인 담양부사 이동야(李東野)와 창평현령 이훈휘(李薰徽) 등이 이 지방에서 관직을 지내면서 이서를 추모하고자 건립한 것이 몽한각이다.
‘몽한각’이라는 이름은 이서의 시 구절 “斗縣雲山壯 寒窓歲月多 分明今夜夢 飛渡漢江波(두현운산장 한창세월다 분명금야몽 비도한강파)”에서 ‘몽(夢)’자와 ‘한(漢)’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씨 문중에서는 몽한각이 있는 자리를 ‘한새울터’라고 말한다. 한새울이란 큰새(大鳥洞)를 가리킨다. 몽한각은 만득산에서 시작해 매봉-사자봉-월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가운데 사자봉 아래 자리하고 있다. 큰새가 날다가 알을 떨어뜨린 자리라고 하여 한새울터라고 부르고 몽한각 경내에는 알을 상징하는 동그란 바윗돌이 박혀 있다.
몽한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다. 입구에는 1966년 지은 솟을 대문이 있고 경내에는 이훈휘의 〈몽한각 상량문〉과 기우만(奇宇萬)의 글이 있는 신도비,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서화가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의 친필로 새긴 이서의 유서(遺書)가 있다.

특히 경내에는 이서의 ‘낙지가(樂志歌)’가 새겨진 가사비(歌辭碑)가 있다. ‘뜻을 즐기는 노래’란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귀양살이를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서 기쁨을 찾으려 했다.
낙지가는 전체 152구이며 4·4조로 되어 있다. 줄글체 기사 형식으로 곤륜산 일지맥에서 시작하여 팔도를 돌아 자신이 살고 있는 담양의 초가삼간까지 그렸다. 낙지가는 중국 후한 때 사람 중장통의 〈낙지론〉을 본받아 안빈낙도하면서 살겠다고 한 것으로 그의 문집 〈몽한영고 夢漢零稿〉에 실려 있다. 낙지가는 훗날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송순(宋純, 1493~1582)의 면앙정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서와 송순이 같은 시대의 인물로 두 사람이 창평과 봉산에 머무르고 있어 교분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서의 절개가 느껴지는 매산리 소나무
매산리 소나무

몽한각 입구에는 250년 수령의 소나무와 350년 수령의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두 그루가 전남도기념물 242호로 지정돼 있다. 원래는 3그루가 있었다는데 제일 컸던 나무가 벼락에 맞아 죽고 현재는 두 그루만 남았다.
매산리 소나무 1이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반송형으로 높이 29m, 둘레 416㎝이고 동서로 12m, 남북으로 15m에 이른다. 당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낙락장송으로 몽한각 오른쪽 언덕에서 대덕 들판을 굽어보고 서 있다.
소나무2는 높이가 16m, 가슴이 267㎝나 된다. 한쪽 가지가 끊어져 비스듬히 누워 서 있으나 오랜 풍상을 견딘 넉넉함,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듯한 노송의 미학이 아름답다. 힘든 유배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자적할 줄 알았던 옛 선비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150년 역사의 담양 장전이씨 고택

전남도 민속자료 제 41호로 지정(2008년)된 장전이씨 승기 고택은 이 마을에 최초로 입촌한 이형정의 9대 종손의 집으로 이승기 박사의 생가다. 안채와 사랑채, 곡간채 등이 잘 갖추어진 남도 양반 주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집의 규모는 안채(정면 6칸), 사랑채(정면 5칸), 곡간채(정면 4칸), 뒤주, 헛간(4칸) 등으로 되어 있으며 대지는 546평(1,802㎡) 이승기의 소유로 동생 이 준이 관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네모진 연못이 있고 막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사랑채를 지었다. 이 사랑채의 이름이 매오당(梅吾堂) 이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대문 입구 마당에는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사랑채 서까래가 걸려 있는 종도리에 ‘上之十二年乙亥’의 기록이 있어 고종 12년 을해년(1875년)임을 알 수 있다 올해로 142년이 된 고택이다.
이집은 승기의 조부 송호 이헌수가 종가터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아들인 병성, 병도, 병렬 등을 3자녀를 뜻하는 3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송나무’만 남아 있고 나머지 2그루는 죽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작은 소나무 2그루가 심어져 있다. 이송은 두명의 동생을 두었다는 뜻의 호이고 둘째 동생이 서송, 셋째 동생이 남송으로 불린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중문을 들어서면 정사각형의 작은 건물이 안채를 가리고 지어져 있다. 바깥에서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곡식을 보관하는 뒤주를 넣어두었다고 한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앞뒤에 마루가 있는 큰 팔작 기와집이다. 집의 구성은 왼쪽에 1칸 부엌, 1칸 방 2개, 2칸 대청, 1칸 방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큰 부자는 아니었더라도 부잣집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바로 아랫집이 승기의 종형 정기의 집이다. 그 후에 지은 남송(병렬)의 집이 있는데 동쪽 대문에 안채가 남쪽을 향하고 있다. 5칸 반의 겹집으로 좋은 나무로 지어 보존이 잘 되어 있고 마당을 푸른 잔디로 가꿔 반가의 정취가 전해진다.

이한기 총리서리의 생가 영서당

영서당(迎瑞堂)은 무등산의 옛 이름인 서석산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당호다. 기당(箕堂) 이한기 국무총리 서리의 생가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한기의 고조인 이최선의 생가로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터에 182년 전인 1835년에 지금의 한옥을 지은 것이다. 당시에는 안채보다 사랑채를 중시 여겨 사랑채를 기와로 짓고 안채는 초가지붕이었는데 훗날 기와를 얹었다. 안채가 있던 자리가 좀 더 높았으며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중문과 곡간 등이 있었는데 철거했다. 현재는 19세 종웅·종걸이 관리하고 있다.
영서당은 남쪽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넓은 앞마당이 나오고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일자형(一字型)으로 지어진 독특한 집이다. 앞마당 전체가 잔디로 깔려 있으며 오른쪽에는 여러 그루의 배롱나무가 100일이나 꽃을 피우고 있으니 언제나 아름답다. 특별한 날에만 대문이 열리지만 밖에서도 집안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어 좋다.

이한기(1917~1995)는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유학,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다. 서울대법대교수 로 재직하면서 국제법을 가르쳤다. 1980년대 초 감사원장을 거쳐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6.29 선언에 따른 내각 개편으로 정식 국무총리가 되지 못하고 퇴임했다.
한편 장전이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앞에서 언급한 한국현대사의 화학자 승기(19세) 한기(19세) 이외에도 승기의 동생 정기(19세, 약학자) 진기(19세, 의학자) 종원(20세, 의사) 준한(조대의대 교수) 이종무( 전 군수) 이종빈(20세, 전남대 생물학과 교수) 등이 있다.

또 한기의 부친 이혁(18세, 전남대 교수)을 비롯 종걸(19세, 한국외대교수) 중기(의사), 종욱(20세, 원자력병원 의사). 또 19세의 이방기(전남대교수) 이장기(호남대교수) 이문기(전남대의대교수) 등이 있다.
고(故) 정득기 전남대 총장, 김영인 전 전남대 총장이 이 집안의 사위이고 전호종 전 조선대 총장은 한기의 고종 4촌이다.
또 승기의 4촌 여동생(필기)이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의 아들이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이다.

주변 가볼만한 곳 쫸

▶상월정(上月亭)
언양인 김자수가 세운 상월정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슬로시티 창평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창평에 자주 가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 월봉산 남단 상월정에 올라보는 것도 의미 있는 발길이 될 것이다.
2007년 신안증도, 완도 청산도와 함께 아시아에서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창평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는 마을이다. 삼지천 마을의 고택, 돌담길이 있고 쌀엿만들기 체험, 전통가옥 체험 등 슬로체험이 가능하다.
창평현 문은 마을에 들어서는 관문이다. 동쪽 국수봉과 월봉산을 지나며, 북쪽은 구아산과 금산이 물결친다. 또 월봉산에서 발원한 월봉천과 운암천, 유천 세 갈래 물길이 흘러들어 삼지내(삼지천)마을이라고 불린다. 1888년 옛 창평동헌에 지어진 2층 누각은 1918년 현 위치로 옮겼다. 초기에는 양로정이라 불렸으나, 창평과 교류하던 안동의 선비 학봉 김성원의 후손과 유촌의 학봉 고인후의 후손들이 교유하면서 이상촌을 만들자고 권유해서 그 의지를 담아 남극루로 이름을 바꿨다.
상월정은 월봉산 아랫자락에서 가벼운 비탈길을 따라 20여분 오르게 되는데 숲길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숲속에 움막을 짓고 사는 사람도 있고 명상독서실도 두어 곳 보인다.
상월정의 원주인은 언양인 추재(秋齋) 김자수(金自修,1438~1500)다. 언양 김씨들은 고려 중엽 창평으로 옮겨와 대대로 살았는데 김자수가 1474년(1457년은 오기) 청원사 말사이던 이곳 대자암(大慈庵) 경내에 상월정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이후 함평 이씨로 황해감사를 지낸 사위 이경에게 물러주었고 이 경의 외동딸과 제봉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학봉 고인후가 결혼함으로써 창평고씨 가문으로 넘어왔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지금까지는 이곳 상월정이 창평의숙의 전신인 영학숙(英學塾)을 열었던 곳이라고 알려졌는데 정확히 말하면 약간 다르다는 것이 창평 향토사가 이병해 선생(78)의 주장이다. 옛 문헌에 월봉산 북단(北端, 북쪽끝) 월정에 부곡(釜谷)이 있었고(인촌 김성수 회고록) 이곳에 영학숙을 열어 공부했다는 것이다. 물론 상월정과 영학숙이 있던 월정과는 지척에 있어 서로 오갔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영학숙이 있던 부동정사는 고씨들의 공부방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말 근대교육의 선구자로 규장각 직각(直閣) 벼슬을 지낸 춘강 고정주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시작한 첫 사업이 영학숙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양성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교육사업을 하기 위해서다. 직각은 요즘 국립도서관장으로 고정주는 의친왕 이 강(李堈,1877~1955) 의 비서실장까지 지냈다
영학숙의 첫 학생은 자신의 아들인 고광일·고광준과 사위인 김성수,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다. 얼마 후에는 송진우가 참여했고 무송 현준호, 교사 이표, 백관수가 간간이 출입했다. 김병로는 창흥의숙에 합류했다. 영학숙은 말 그대로 영어를 주로 가르치는 학교로 서울에서 교사를 모셔다놓고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학숙은 이곳에서 7~8개월 동안 문을 열었으며 1908년 창평 객사로 옮겨 창흥의숙으로 발전한다. 창흥의숙의 초창기 학생수는 50여 명이고 초등과는 3년, 고등과는 6개월의 속성이었다. 교과 과목은 한문·국사·영어·일어·산술이었다. (가인 김병로 회고록)
창흥의숙은 훗날 창평학교로 개칭되었다가 창평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창흥의숙은 수업료는 받지 않았고, 오히려 학교에 오는 학생들 점심을 무료로 제공했다고 전한다


민박 쫸

광주 근교인 창평에는 민박집과 펜션이 많은 편이다. 창평면 소재지 인근만 해도 열댓 군데가 되고 인근지역을 포함하면 30여 곳이나 된다. 슬로시티답게 한옥이 많고 세련미 넘치는 펜션도 있다. 장화리 1구 장전마을에는 민박하는 집이 없고 이웃마을인 장화리 2구에 '하심당'이란 민박집이 있다. 평일과 휴일을 구분하지 않고 1인당 2만원이며 집 전체를 빌릴 경우 20만원 선이다. 대부분의 민박들이 아침식사는 제공하지 않으나 이용자들이 직접 요리를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 사랑채 = 창평면 돌담길 15-30
(061-382-8888, 061-382-8888)
▲ 매화나무집 = 창평면 돌담길 88-4
(061-381-7130, 010-7130-3002)
▲ 고택한옥에서 = 창평면 돌담길 88-9
(061-382-3832, 010-3606-1283)
▲ 월봉 = 창평면 돌담길 15-21
(010-9435-9121, 010-9435-9121)
▲ 담양청솔 = 창평면 돌담길 56-30
(010-2536-5578)
▲ 갑을원민박 = 창평면 돌담길 67
(061-382-3669, 010-2682-4653)
▲ 담양한옥 = 창평면 돌담길 72
(061-382-8372, 010-3628-0157)
▲ 친구와 돌담길 = 창평면 돌담길 79
(010-2239-7184)
▲ 삼지천 = 창평면 돌담길 82
(061-383-1039, 010-9086-1039)
▲ 슬로시티 = 창평면 돌담길 88-32
(061-382-8115, 010-2602-8115)
▲ 창평 = 창평면 창평현로 714-42
(061-383-8283, 010-8514-8347)
▲ 담양한옥 = 창평면 창평현로 714-40
(061-383-8283, 010-3637-3300)
▲ 하심당 = 창평면 화양길 79-14(장화리)
(061-382-8260,010-3605-9118)


맛집 쫸

▶갑을원 = 담양 창평면 삼천리 401-2 (061-381-6886)
갑을원
음식을 맛보기 전에 식당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먼저 넋을 잃는다. 5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푸른 잔디가 어우러진 정원이 있고 90여년이 다 된 고택에서는 옛정취가 물씬하다. 더욱이 달이 휘영청 달이 뜨는 만찬을 이곳에서 즐긴다면 더 이상 무엇을 부러워할까?
광주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던 부부가 이곳으로 들어온 지 12년이 되었다. 갑을원의 2대 주인인데 고즈넉한 분위기에 전통요리에 깔끔한 음식맛까지 더해 입맛을 사로잡는다.
이집의 메뉴는 유황오리 코스요리다. 오리불고기, 오리훈제, 오리샤브샤브까지 코스로 즐길 수 있다. 식탁에 앉으면 먼저 샐러드가 나오는데 특별한 소스에 콘프레이크가 뿌려져 바삭바삭하다. 뒤이어 고소한 참기름과 들깨를 듬뿍 넣은 부추무침, 들깨와 마 소스를 넣어 무친 사근사근한 연근도 별미다. 이집에서 사용하는 쌀과 김치, 오리 등이 모두 국산이며 양념으로 사용하는 된장과 간장은 마당에서 있는 장독대에서 안주인이 직접 만든 것이다.
오리훈제 쌈과, 불고기, 산적을 먹고 나면 오리샤브샤브가 나오는데 부추와 쑥갓, 팽이버섯, 느타리버섯을 넣어 끓인 육수에 오리를 살짝 데쳐서 먹고 남은 육수에 우동사리를 넣어 후루룩 들이키면 식사가 모두 끝난다. 후식으로 나오는 잣을 넣은 수정과로 목을 행구고 나면 입안이 개운하다.
1인분에 20,000원, 25,000원 두 가지가 있다. 차량 20여대가 동시주차 가능하다. 가족단위 모임장소로도 좋고 민박도 가능하다. 민박은 2인기준 평일은 6만원, 주말은 7만원이다. 아침식사는 안된다.

글 : 지형원 (문화통 발행인) / 사진 지재주 (사진작가)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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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영광 군남면 동간리21. 함평 대동면 상옥리 옥동
20.순천 주암 죽림리·주암리19.나주 문평면 오룡리
18.나주봉황 철야마을17.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
16 .해남읍 연동15.광산 임곡 너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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