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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7일(일요일)

12.나주 노안 금안동

영암구림, 정읍 신태인과 함께 호남 3대 명촌으로 꼽혀
고려 정가신, 신숙주가 살던 곳…500년 역사의 금안동계 유명
2017. 06.23(금) 09:18확대축소
쌍계정
“무등산에서 떠오른 아침햇살이 금안동의 아침안개 벗겨내니 오릿길이나 되는 숲쟁이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마을 어귀의 천년석주가 웅장하다. 배뱅이골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쌍계정을 휘감아 돌며 노래하고 금성산자락에 노을이 붉게 물들면 나주 시내로 가는 사람들과 시주를 마친 승려들의 귀가행렬이 눈에 선하다.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니 무제봉 아래 반월암에 달빛이 휘영청 하구나”


금안동의 아름다운 8경을 시간대별로 정리한 것인데 그럴 듯하다. 노령산맥은 장성 입암산성을 거쳐 영광, 무안으로 내려선 바깥가지와 금성산에 이른 안가지로 크게 갈라진다. 안가지는 비로소 금성산을 화룡점정하고 영산강에 엎드린다. 금성산은 나주고을 진산이자 금안동의 주산이다. 좋은 땅이라 동네사람들이 금안8경을 노래로 지어 불렀다.

오리임정, 천년석주 등 금안8경 전해

▲1경: 오릿길 잇달은 숲쟁이 오리임정(五里林亭), ▲2경: 금안동 어귀 선돌 천년석주(千年石柱) ▲3경: 영안마을 어귀의 청산골을 돌아 떠도는 나그네의 모습을 그린 산점행인(山店行人) ▲4경: 배뱅이골을 넘어 다보사로 가는 승려들의 풍경 보사귀승 (寶寺歸僧) ▲5경: 무제봉 아래턱 큰 바위에 걸친 반달 반월현암(半月縣岩) ▲6경: 쌍계정 앞을 흐르는 여울물 쌍계명뢰(雙溪鳴瀨) ▲7경: 금성산 자락을 넘어가는 저녁노을 금성홍습(錦城紅濕) ▲8경: 금성산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아지랑이 서석청람(瑞石淸嵐) 등이다.
옛 마을을 취재하다보면 명촌(明村), 명기(明基), 명승(名勝)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1897년 간행된 ‘금성읍지’ 의 명기(明基)에는 나주 노안의 금안동(金鞍洞)이고 다시면 회진(會津), 신북 모산(茅山) 마을과 더불어 설명되어 있다. 명촌이나 명기, 명승 등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문화通이 이달에 찾아간 나주 노안의 금안동은 명촌이자 명기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명기는 좋은 터를 말하는 것으로 큰 인물이 태어난 곳을 일컫는 경향이 짙고 명촌은 향약이 잘 지켜지는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성읍지에 나오는 신북 모산은 약제(約齋) 류상운(柳尙運)과 그의 아들 만암(晩菴) 류봉희(柳鳳輝)부자정승이 태어난 곳이고 회진은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의 탄생지다. 나주 금안동은 두 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한 신숙주(申叔舟, 1417~1475) 가 태어난 곳이다.

나주 회진마을 입구에는 ‘호남제일승경’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일본에 주자학을 전한 수은 강항(姜沆, 1567년~1618년)이 그의 문집에서 ‘승경이 호우(湖右)에서 제일이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회진은 명촌이라기 보다는 명기와 명승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금안동은 명기와 명촌에 해당된다. 금안동은 영암구림, 정읍 신태인과 함께 호남 3대 명촌으로 꼽혀 왔는데 이 마을들은 예부터 향약이 잘 지켜져 오고 있다. 영암구림은 500년 역사의 구림대동계가 유명하고 금안동의 대동계도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져 지금껏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가히 명촌이라 일컬음을 받을 만하다. 여기에 금안8경까지 전하니 명승이란 이름까지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설재 정가신이 ‘금은로 만든 말안장’을 가져온 동네
설재서원


금안동이란 이름은 고려조 충렬왕 때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이 한림학사로서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재상에 이르러 ‘금안수곡(金鞍繡穀)’으로 고국에 돌아와 출입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금으로 만든 말안장을 가져온 동네’라는 뜻이다. 원나라 황제로부터 금안장과 백마 옥대(玉帶)를 하사를 받고 돌아와 이곳에서 지냈다.

마을의 본래 이름은 ‘숲이 우거져 새들의 낙원’이라 하여 금안동(禽安洞)으로 불렸는데 한자를 바꾼 셈이다. 이 마을은 이후 신숙주 탄생과 연계하여 다섯 형제의 탯자리‘ 하여 오룡동(五龍洞)’으로 부르기도 하고 최전(崔田) 선생의 제자 9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구룡동(九龍洞)’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영안마을 윗골에 ‘구룡동굴’이란 땅이름이 남아 있다. 금안동이란 동네이름은 1530년 간행된 ‘신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온다. 정가신의 집터는 금안리에 있다고 하나 정확한 곳은 알 수 없고 신숙주의 집터는 274번지 홍달근의 집과 335번지 홍기상의 집사이 감나무 밭으로 전해진다.(향토문화진흥원 1992년 간)

너뱅이골 등 12개 마을로 구성

금안동은 광주-무안간 고속도로에서 나주IC로 빠져나가 동신대학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있다. 나주에서 가는 옛길로는 831 지방도가 있는데 영광과 장성으로 가는 길목으로 한양가는 길 왼쪽에 있다. 1960년대 말까지 500여 호에 3천여 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300여호 600여명이 살고 있다. 금안동은 모두 12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영안촌(永安村), 북녕촌(北寧村), 송대촌(松臺村), 광곡촌(光谷村), 과원촌(果園村), 수각촌(水閣村), 구축촌(舊丑村), 금곡촌(金谷村), 반촌(盤村), 이내촌(籬內村), 변촌(邊村) 등 12개 동네가 나온다. 1912년 일제가 만든 일반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영안촌, 인천(人川) 천변(川邊) 반송(半松) 광곡 송대(松大) 원당(元堂) 금곡(今谷) 월송(月松) 구축(九丑) 오정(五丁) 어정(於長) 복동(福洞) 등으로 표기돼 있다. 이내천이 인천으로, 과원촌을 월촌으로 썼으며 어장이란 마을이 새로 등장한다.

현재의 노안면은 금안면, 이로면(伊老面), 복룡면(伏龍面)이 합해진 것으로 이로의 (老)자와 금안의 (安)자에서 따왔다. 반송 원당 수각 어장 광곡, 송대, 인천리는 금안리에 속하고 영안촌은 영평리, 구축은 구정리, 월송, 오정, 금곡은 용산리에 속했다.
금안리를 오가는 군내버스에 ‘기말리’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것은 조선시대 때 ‘금(金)’자를 이(李)씨 성의 목(木)보다 앞서기에 김안동으로 부른 것이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향토사학자 정윤국)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나주 목사골을 서울과 견주어 소경(小京) 이라 일컬었고 정도전(1342 ~1398)은 ‘소재동기’에서 금성산을 진산으로 썼다. 고려시인 김극기는 ‘강남락’이라는 사설에서 ‘달밤에는 뭇 신선이 내려오고 하도 높아 하늘과의 거리가 겨우 일악(一握)이라’고 금성산을 노래했다.

소백산맥은 임실 덕치와 순창 휘문산(775m) 자락이 서남쪽으로 내려 노령산맥에 닿는다. 장군봉-용추봉-추월산으로 이어지는 멧발은 담양 병풍산(822m)을 거쳐 불타산(685m), 불대산(602m)으로 뻗어내려 임곡 황룡강에 잠긴다. 추월산에서 빛재로 오른 산가지는 내장산(763m) 입암산(626m)을 이어 서남쪽으로 뻗어 방장산(640m) ~고성산(546m) 을 거쳐 함평 불갑산(516m)에 이른다. 장성 삼계의 고성산~깃재~태청산(593m)을 거친 용은 월야면 월악산(165m)으로 가다가 광산구 내상동에서 대봉(171m)으로 고개를 쳐든다. 여기서 망산(271m) 옥산(335m)을 거쳐 온 힘을 다해 금성산(451m)으로 고개를 쳐든 용은 남쪽으로 내려 영산강물을 마시기 위해 머리를 내민 형국이라는 것이다.

금성산 서쪽기슭 찬샘에서 나선 물길은 배뱅이골 아래 금안동을 적시고 노안천에 이른다. 감곡천과 노안천의 본류는 광주 삼도출장소 대산동 대야마을 윗골인 사한산(獅恨山,184m) 기슭이다. 이 물이 남동쪽으로 15㎞나 흘러 석현동 원림마을 앞에서 영산강과 만난다. 여기가 ‘광탄통곬’이다.

동신대학 삼거리에서 삼도로 가는 길목

동신대학 삼거리통인 ‘밤남쟁이’에서 광산 평동을 거쳐 장성으로 가는 지방도가 한양 가는 지름길이다. 이 밤남쟁이는 다산 정약용과 자산 정약전이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를 갈 때 ‘율정(栗亭)의 이별’이란 시를 남기고 울면서 헤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다산은 영암을 거쳐 강진으로 들어갔고 약전은 목포를 거쳐 흑산도 유배를 떠났다가 그곳에서 죽어서 다시 이 길을 거쳐 고향에 묻힌다.

나주 읍성 북문인 북망문(北望門)을 나서 북쪽으로 가는 길은 영광으로 가는 길이다. 대안동 금안동을 거쳐 광주삼도출장소 삼거동으로 이어진 831번 지방도는 23번 국도와 만나 이곳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영광을 거쳐 법성창에 이른다.
금안동에서 북쪽으로 6㎞를 가면 광산구 송학동 장달이 마을이다. 배를 매어 두었다고 해서 ‘배매’란 별명이 있다. 이곳에 포구가 있었다는 증거는 해현재(海玄堤)라는 저수지에서 찾을 수 있고 삼도남초등학교로 가는 해등잇다리 (海嶝橋), 평림천과 황룡강이 만나는 염해평(鹽害坪)이란 땅이름도 전해온다.
쌍계정


12동네 원래 이름을 되찾았으면…

▲ 광곡 (원래 이름은 12개 동네 가운데 가장 윗골이며 시내 둔덕에 있어 너뱅이골 이라 불렀다. 넓은 곳에 터를 잡아 광곡(廣谷)이라 부르다가 일제 때 양지바른 곳이란 뜻으로 광곡(光谷)으로 표기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증거하는 고인돌 42기가 있다.
▲ 송대는 솔바지, 솔버덩으로 부르다가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송대(松臺)로, 일제 때 송대(宋大)로 바뀌었다.
▲ 수각은 쌍계정과 연결 지어 수각(水閣)으로 부르다가, 개울가에 있는 동네라는 뜻의 수곡( 水谷)으로, 일제 때 수각(水各)으로 변하게 된다.
▲ 반송은 주변에 소나무가 많고 반석같은 형상이 되어 있어 반송(盤松)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반송(半松)으로 불렀다. 특히 마을에는 풍수지리와 연관되어 마을을 배 형국 이라 하여 우물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마을에는 바우배기(큰 바위가 있다 해서 부르는 이름) 사장등(원당과 인천사이에 있는 등성이) 쌍시암거리(샘이 두 개 나란히 있는 들 이름) 숲정이 (금안리 동내 안에 흐르고 있는 냇물이 너무 급하게 동쪽으로 흘러내리니 이 물을 가두고 막기 위해 동내 동쪽으로 팽이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어 ‘숲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들이 늙어 모두 없어지고 두 구루만 남아 있다.
▲ 인천은 금안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숲쟁이 울타리를 삼아 금안 냇물이 흐르는 ‘물섶동네’라는 뜻이다. 호구총수에는 이내촌(籬內村) 변촌(邊村)으로 되어 있으며 1912년 인천리와 천변리로 표기하가다 인천 (仁川)으로 바뀌었다. 마을앞 숲을 울타리 삼아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이내촌(內村)이라 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인천(仁川)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는 금석문으로 효자성와김공실적비(孝子省窩金公實跡碑)와 반환홍선생유허비(盤桓洪先生遺墟碑), 문정공설재선생유허비(文靖公雪齋先生遺墟碑), 효자송산홍공기행비(孝子松山洪公紀行碑)가 있다.
▲ 원당(元堂)은 호구 총수에는 당집이 있던 마을로 당촌으로 적었으나 일제 때는 원당으로 표기했다. 금안동 일대 자연마을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라 하여 원당이라 하는데, 원님 경원공의 별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고도 한다.
▲ 영안(永安)은 풍수가 좋아 평안하고 오래살 수 있는 길지라는 뜻이며 ▲ 구축은 ‘사리실’ ‘사릿골’ ‘사싯골’로 부르는 데 풍수지리에서는 뱀형국의 마을로 본다. 처음에는 구축 (舊丑)으로 표기하다가 일제 때 구축(九丑)으로 바뀌었다.
▲ 월송(月松)은 등머리에 소나무가 있어 ‘등머리’라고 하거나 들판으로 나서는 길 ‘들머리’ 라는 이름이 있으며 월산(月山)과 송정(松亭)에서 첫 자를 따서 월송으로 부른다. 송정은 월송의 작은 동네로 마을사람들은 솔쟁이라로 부른다. 1912년 오정(五丁)으로 바뀌었다. 송산사라는 양성 이씨 제각이 있다.
▲ 금곡은 12동네 중 가장 북쪽에 있다. 매화낙지 형세에 옥녀가 가야금을 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금곡(琴谷)이라 불렀다. 호구총수에는 금곡 (金谷)으로 적혀있어 ‘쇠골’로 볼 수 있으며 일제 때 금곡(今谷)으로 바뀌었다.

금안동을 이룬 씨족들

나주 정씨, 풍산 홍씨, 하동 정씨, 서흥 김씨 등 네 성바지가 많이 살았다. 그 가운데서도 나주 정씨가 가장 먼저 산 것 같다. 정가신의 활동에 힘입어 이름 있는 집안으로 성장했다. 그 뒤로 들어온 고령신씨, 서산정씨, 풍산홍씨, 하동정씨, 서홍김씨 등은 혼인을 통해 직간접으로 혈연이 맺어졌다.

나주 정씨 다음으로 살았던 성씨는 고령 신씨, 서산정씨, 청령 성(成)씨, 여산 송(宋)씨 와 본관을 알 수 없는 이씨 등이다.
정계함, 이수중, 신장(1381~1433)이 정가신의 4대손 초(1346~1423) 유(1359~?) 형제의 사위이고, 성유수(成有守) 송극창(宋克昌)이 초의 손자사위다. 처가살이가 아니라 1670년 이전에는 장자상속제도나 남자우위 상속제도가 아니라 자녀균등상속제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장은 여기서 오래 살지 않고 오형제를 데리고 충청도로 떠났다. 다만 셋째 아들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정계에 나가 나주의 외가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이다. 영의정을 지낼 때 외가의 정식(鄭軾,1407~1443)이 병조판서를 지냈다. 정계함은 금안동에 살 때 풍산 홍씨 홍수와 하동 정씨 정서(鄭鋤, 1410~)를 사위 삼아 12동네에 뿌리 내리게 했다.
동서 사이인 풍산 홍씨와 하동정씨는 긴밀한 유대를 가지며 오늘날 네 성씨 가운데 두 성씨로 성장했다. 풍산 홍씨 홍수는 서흥 김씨 김감(金鑑)을 손자사위로 맞아 열두 동네에 퍼지게 했다.

나주 鄭씨는 정가신을 중시조로 삼고 본을 정해

여기서 잠깐 토성인 나주 정씨에 대해 살펴보자. 고려 중엽 정해(鄭諧)를 시조로 한다. 반성(班姓)에 오른 것은 증손인 정가신(1224~1298)이 고려 고종 때 문과에 올라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가 돼 중시조로 삼고 나주를 본을 정했다. 정씨가 금안동에 살기 시작한 것은 정가신 때부터다. 그는 원래 동강면 시중동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문과에 급제한 뒤로 금안동에 터를 잡다.

슬하에 천이(遷伊), 탁(倬), 전(佺), 경부(景孚), 길(佶), 억(億), 엄(儼) 등 7자녀를 두었다. 큰아들과 넷째 아들은 중이 되고 둘째는 요절했다. 셋째는 대호군(大護軍)파가 되어 함평 나산으로, 여섯째 억은 지론공파 (持論公派)로 함평월야에, 막내 엄은 상서공파(尙書公派) 나주 동강에 산다.

금안동에 가계를 이은 사람은 다섯째 길(吉,1255-1325)이다. 그가 개성소윤을 지내 소윤공파라 한다. 그의 5세손 식(植, 1407-1443)이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식의 할아버지 유(有, 1359~?) 가 신숙주 외할아버지다. 뒷날 영상이 된 신숙주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 집안에서 부사 정상(鄭詳)이 태어났다. 그의 아들 여린(如麟),1564~1640)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큰 공을 세워 경원도호부사에 올랐다. 정씨관련 문화유산으로 설재서원, 귀래정, 수우시정 등이 있다.금안동의 나주 정씨 후손으로는 정성전 공군참모총장, 정판국 전 국회의원(민정) 등이다.

풍산 홍씨는 정계함의 사위 樹가 단종 폐위 때 피신

풍산홍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사람 홍지경(洪之慶)이 124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국학직하에 올랐다. 그가 경북 안동의 풍산에 자리 잡아 살았기에 풍산홍씨가 되었다. 선대는 알 수 없고 조선 정조 때 세도를 누린 홍봉한 홍국영이 이 집안 경파(경파) 자손들이다.

풍산 홍씨가 금안동에 자리를 잡은 것은 7세손 수(樹)다. 수는 경기도 고양에서 살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킬 때 화를 입게 되자 아버지 이(伊)가 남평 현감을 지낸 인연과 처가 (정계함의 사위)이기도 한 금안동에 피신한 것.
그는 하동정씨 금안동 터잡이인 정서와 동서간이다. 슬하에 외아들 귀지(貴枝)를 두었는데 그는 5형제를 낳아 한양, 한의, 한례, 한신은 다른 곳으로 옮겨 살게 하고 넷째 한지에게 가계를 잇게 했다. 김감을 사위로 맞아 서흥김씨가 금안동으로 들어오는 인연을 만들었으며 이웃 다도면 풍산리로 옮겨간 한의는 오늘날 풍산홍씨 일가를 이룬다. 홍씨들은 금안동 가계를 이은 9세손 한지의 두 아들 항(沆, 1522-1593) 과 해(瀣)다. 일제말기 정식과 은식은 일본에 건너가 살면서 많은 돈을 모아 고향을 도왔다고 한다.

하동 정씨는 정지장군의 증손 帿가 일가 이뤄

하동정씨는 본관을 같이하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여러 파가 있다. 금안동 가계인 도정계는 경명왕 7년 후 백제군이 신라를 침범할 때 호장이 되어 항병을 단련, 하동성을 지켰던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한다. 도정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 때 경순왕을 개성까지 호위해 내외성상시 벼슬을 받았고 이어 광평성평장사에 올랐다. 그러나 도정 뒤로는 세계가 없어 고려 때 하동현리를 지낸 정석숭(鄭碩崇)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세웠다. 나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석승의 7세손으로 금성군에 봉해졌던 성(盛) 대로 보인다. 백부 지연은 충렬왕 때 역관이었고 손자 지(地, 1347~1391)는 여러 번 왜구를 물리쳤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 뜻을 같이 하는 등 무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정지 장군의 증손 서(帿, 1410~?) 가 함평 현감을 지낸 뒤 문평에서 금안동으로 옮겨와 금안동 하동정씨 일가를 이뤘다. 그가 먼저 들어온 서산 정씨 정계함의 사위인 것으로 보아 처의 상속에 따라 들어온 듯하며 풍산 홍씨 홍수와 동서 사이다. 터잡이 슬하에는 성(成), 확(穫), 적(積), 수(穗), 개(開)를 두었다. 오형제 가운데 넷째는 일찍 죽고 큰 아들은 광주로, 셋째는 고부로 옮겨가고 다섯째는 남평 현감을 지낸 뒤 동곡에 눌러 살았다. 둘째 확이 무안현감을 지낸 뒤 금안동 가계를 이었다. 그의 14세손 해일(海鎰), 1858~1931)이 천석지주였다고 전한다. 척서정, 경열사, 경신재, 효사재가 있다.

금안동 하동 정씨 후손으로는 정진기 매일경제신문 창업주(20세) 대법원 서기국장을 지낸 정순봉(15세) 정현채 전 경희대 교수(16세) 등이 있다.

서흥 김씨는 김굉필의 조카 감과 건이 정착

서흥 김씨는 김알지의 34세손으로 고려때 금오위정용중랑장 벼슬을 지낸 김보(金寶)를 시조로 한다. 서흥은 황해도에 있다. 김보의 손자 김천록(金千錄)이 상장군으로 일본 징벌에 공을 세워 서흥군에 봉해졌다.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 서흥김씨다.
서흥김씨가 호남과의 인연은 10세손 문경공 한휜당 김굉필의 숙부 김총(金總, 연대미상) 때로 보인다. 조선조 세종때의 명신인 장인 연촌 최덕지(崔德之1384~1455)선생이 남원부사(1448년)를 지낸뒤 처가 마을인 영암군 영보촌으로 낙향할 때 큰아들은 전주에 남겨두고 두 딸 두 아들과 함께 내려 왔다는 전주최씨의 기록으로 보아 1450년을 전후다. 당시 영암지역의 거부였던 장인이 현재 영암 학산면 용산리(영암 군서 곤이시면 가부천)로 분가시켜 호남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금안동 서흥김씨는 김총의 후손들이며 총은 유와 흔 두 아들을 두었다. 장인 최덕지가 임종시 사위들에게 3대이후에는 1백리 밖으로 이거해 살라는 유언에 따라 유의 아들 감과 건은 나주로, 흔의 자손은 전북 진안으로가 살았다.
감은 금안동에 먼저 들어와 살고 있던 홍귀지의 사위로 금안동과 인연을 맺었으며 슬하에 응휜, 응전 두 아들을 두었다.
응휜의 후손은 10여대를 영암에서 살았으나 후손중 일부가 금안동 영안마을에서 잠시 살다 함평을 거처 신안 자은면에 정착했다. 현재 살고 있는 서흥김씨는 대부분 응전의 후손들이다.

감의 동생 건은 사마시에 합격해 왕자 사부가 되었고 예산현감을 지낸 뒤 금안동에 정착하였다. 유적으로는 경현서원, 영수각, 만향정, 어서각 등이 있다. 후손으로는 23세 종섭이 조선조말 천석군 거부였으며 그의 조카 24세 기우 또한 천석군이었다. 기우의 아들 희용(2대 광주은행장), 희용의 아들 재식(기업은행장), 희용의 딸 남윤(바이올리니스트) 등이 있다.

금안동이 낸 역사인물 설재 정가신과 신숙주

설재 정가신은 1259년 문과에 합격해 10년 뒤 진도에 있던 삼별초군 토벌위해 출동한 왕권파 장수인 김방경(金方慶), 1212~1300) 에 종군한다. 충렬왕때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세조의 총애를 받고 뒷날 백마와 금안장을 받고 금안동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가 수각마을에 세운 쌍계정이 남아 있다.
정가신은 동강면 시중동(인동리)에서 항공전사 송소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으며 어머니가 정선이다. 어려서 천기(天琪)를 따라 상경한 뒤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해 1227년 보문각대제가 되다. 1284년 승지에서 밀직학사로 정조사가 되어 원나라에 갔다. 감찰대부, 판밀직지사를 역임하고 1290년 사유(師儒)가 되어 다시 원나라에 갔다. 원나라 세조의 특별대우를 받고 첨의찬성사에 올랐다. 문장에 능하여 천추금경록을 지었으며 벼슬은 1298년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에 이르렀다. 1298년 갑자기 죽어 문정(文靖)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충서와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사우 겸 서원인 설재서원이 있다.

영의정 두 번 지낸 보한재(保閑齋) 신숙주의 탄생지


신숙주는 (1417~1475)는 노안면 금안동 출신으로 아버지 신장(申檣), ~1433)이 이곳에서 생활하다 충청도로 이사를 했다. 고령 신씨인 신장이 이곳에 산 것은 아내 (鄭自新의 누이)가 나주정씨이기 때문으로 숙주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다. 신장의 처남이 정자신이고 그 아들 정식(鄭軾), 1407~1467)과 신숙주와는 내외종간이다.

신장은 금안동에 살면서 맹주(盟舟) 중주(仲舟)) 숙주(叔舟) 말주(末舟) 등 5형제를 낳았다. 이로 인해 금안동을 오룡동이라고 부르기고 한다. 다섯 아들 가운데서는 셋째인 숙주가 가장 뛰어나 영의정을 두 번이나 지냈다.
신숙주는 22세에 진사, 생원시에 합격해 25세 때 집현전부수찬, 27세 때 사헌부장령이 되어 일본통신사 서정관으로 외교사절이 되었다. 그는 일본어 중국어 등에 능했으며 돌아와 집현전수찬이 되었다.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원음을 중국학자 황찬에게 배웠다.
1447년 중시에 합격하여 집현전 응교로 특진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운사로 명나라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이때 개인적 친분이 맺어졌다. 세조가 왕이 되자 3년 만인 1457년 우의정이 되고 59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1460년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야인들을 소탕하고 돌아와 1462년 영의정에 올랐다.

성종 2년인 1471년에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이조예법의 격으로 여기는 예기이결(禮記以訣)과 오례의(五禮儀)를 남겼으며 경국대전, 국조보감 등을 편찬했다. 신숙주의 여덟 아들 중 다섯째인 신준(申浚), 1444~1509)이 중중반정에, 5대손 신경식(申景植)은 인종반정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세종은 아들 문종에게 “집현전 학자 중 문학적 재정과 정치적 경륜을 겸비한 사람은 오직 신숙주뿐이다.”라고 평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신숙주는 세조에 이어 성종 때까지 왕을 보필하며 국정에 참여했다. 세조의 왕위찬탈 때 적극 가담하여 후세 사람들로부터 “신의를 저버린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혁명의 불가피성 등이 거론 되면서 재평가 이뤄지고 있다.
신씨는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가 70%이고 고령 신씨가 20% 가까이 된다. 고령신씨는 시조를 신성용(申成用)으로 삼지만 사실은 7대손 신숙주가 중시조 격이다. 신성용은 고령사람이지만 신숙주의 증조부가 되는 신덕련은 광주로 옮겨와 살았다. 아들 신포시는 옥과에서 살았고 아들 신장은 금안동에서 살면서 신숙주를 낳았다. 신숙주의 묘는 의정부시 고산동에 소재하고 있다. 1985년 9월 2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신숙주의 후손으로 근현대인물은 이렇다. 농림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신각휴(15세)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신석우(16세) 전 국회의원 신관우(16세),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신규식(17세) 전 문공부장관 신범식(17세), 민족운동가 단재 신채호(18세),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신홍식(17세), 2대국회 신정호 의원(18세) 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금안동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반환공(盤桓公) 홍천경(洪千璟, 1553~1633)

홍천경은 예조참판 응복(應福)의 아들로 금안동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고경명(高敬命, 1533~1592) 기대승(奇大升, 1527~ 1572) 문하에 공부했고 율곡(栗谷, 1536~ 1584)에게도 배움을 청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 15 37~1593)을 따라 의병과 군량을 모았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권율의 종사관으로 제주 군량을 운반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세 아들 가운데 두 아들을 잃게 된다. 그는 1601년 4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9년 중광문과에 장원해 전적 벼슬을 하고 나주교수가 되었다. 1789년 나주 월정서원에 정송강, 김한강, 심소남, 박사암과 함께 5위가 배향 돼 있다.

반환공 응복은 평동의 명화리에서 살다가 잠시 금안동으로 이거했을 때 홍천경을 낳았다. 응복은 노년에 명화리로 다시 돌아왔으며 이런 연유로 홍천경과 아들 유예, 손자 제익의 묘소도 명화리에 있다. 금안동 풍산 홍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홍기섭 전 광주KBS총국장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의사, 약사, 교수가 20여명에 이른다.

서원연고를 엮은 김여(金礪, 1681~?)

김여(후에 선조중에 같은 이름이 있어 更(경)으로 개명함)는 1681년 서홍김씨 16세손 김성오의 아들로 태어나다. 숙부 김성원의 양자로 입적했으며 8세부터 글을 익혀 문장에 밝았으나 25세의 나이에 생부와 양부를 잃고 3자녀를 모두 잃는 액운을 당했다. 그는 선조들의 시와 자신의 글을 모아 서원연고 2권을 남기는데 건과 곤이다. 건에는 김중곤, 김굉필 등 선조들의 시를 모았고 곤에는 자신의 글을 담았다. 곤은 공자를 모신 사당에 송시열 송준길을 함께 모시기를 바라는 상소문과 일기 등으로 엮어졌다.

조선시대 누정 쌍계정…대동계 장소로

금안동에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 34호인 쌍계정(雙溪亭)과 설재 정가신을 배향하기 위해 1688년(숙종14)에 세운 설재서원,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흠모하여 1659년(효종10년)에 세운 월정서원, 경렬사 등 20여개의 사원과 정자, 효자비, 열녀비 등이 있다. 12개의 자연마을에는 서원, 정자, 재실이 20여개가 있고 효자비 등 비석이 100여개, 고인돌이 56기가 널려 있다.
쌍계정(雙溪亭)은 금안리 25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이다.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다. 고려 충렬왕 6년에 문정공 정가신이 건립하였다. 금성산에서 내려온 계곡이 양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쌍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밀직학사, 정당문학 등을 지냈는데 문장에 능하고 청렴결백하였다. 당시 쌍계정은 정가신과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 문현공(文顯公) 윤보(尹珤) 등이 모여 학문과 인격을 닦던 곳이어서 삼현당(三賢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세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정서(鄭鋤), 신숙주(申叔舟), 신말주(申末舟), 죽오당(竹梧堂) 김건(金鍵), 홍천경(洪千璟) 등 당시 대표적인 학자들의 학문 연구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쌍계정은 규약을 정하여 미풍양속을 지키도록 행하는 계회(契會)와 시회(詩會)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쌍계정은 방이 없는 대청형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사방이 터져 있는데 주변에 노거수가 우거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때는 1280년이나, 이후 중수하여 처음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건물 안에는 한석봉이 쓴 쌍계정 현판 2개와 쌍계정 중수기, 정가신, 정서, 홍천경이 지은 시가 걸려 있다. 이 쌍계정의 대들보 위에는 창고가 있는데 금안동의 향약이라고 할 수 있는 필사본 서책들이 보존되어 있다.

쌍계정은 대동계 회의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있어 공동체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도 정가신의 후손 나주정씨(羅州鄭氏), 정서의 후손 하동정씨(河東鄭氏), 김감의 후손 서흥김씨(瑞興金氏), 홍천경의 후손 풍산홍씨(豊山洪氏) 등 4개 성씨가 대동계를 하고 있다. 근래에는 이 사성문중(四姓門中)에서 쌍계정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1957년에는 이들이 뜻을 합하여 ‘사성강당(四姓講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오늘날도 여름이면 서당을 열고 음력 4월 20일에는 계원들이 모여 선행한 사람을 가려서 상을 준다. 쌍계정을 노래한 시는 김 여의 시, 김기우의 시, 박순의 시 등이 전해오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수령의 푸조나무가 정자를 에워싸고 있다.

사암 박순을 흠모하기 위해 건립한 월정서원

월정서원(月井書院)은 1659년 박순(1523~1589)의 학덕을 흠모하던 유림들이 논의하고 홍탁(洪閤)이 상소를 올려 허가를 받았으며 1669년 사액이 내려졌다. 원래 지금의 상담비가 있는 곳에 세워졌다가 1868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뜯겼다가 1974년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이 지역 유생 38인과 태학유생의 상소로 김계휘 심의겸 정철 홍천경이 추배돼 5위가 제향되고 있다. 1789년 중수를 거쳐 1796년 강당을 준수하고 1802년 동서재와 삼문을 중수했다. 강당 이름은 월원당(月院堂) 동재는 은구재(隱求齋), 서재는 지숙재(止宿齋), 정문 진덕문(進德門)이라 부른다.

지금의 건물은 1974년 홍천경의 후손인 풍산 홍씨들이 건립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강당,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음력 3월 6일 유림들이 제사한다.

나주 최초의 사액서원을 김굉필 배향하는 경현서원

경현서원(景賢書院)은 영평리 영안마을 589번지 산기슭에 있다.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7호로 지정되었다. 1583년 선조 16년 나주를 중심으로 한 도내 유림들의 상소로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모실 서원건립이 허락되었고 나주 목사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지원으로 완공되었다. 이 서원은 원래 금양(錦陽) 이란 이름으로 나주 서문밖 대곡동에 있었다. 이때의 규모의 희극당, 영인당, 정의당, 시습재, 일신재, 지원문과 10여 칸의 창고가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버려 1608년(광해군 1년) 에 다시 지어져 이듬에 경현이란 이름으로 사액되다.

경현서원은 1589년(선조 22년) 김굉필 외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추배했고 호남명유 김천일, 정개청, 안방준 등을 서원 원장으로 위촉했다. 1693년 (숙조 19년) 기대승, 김성일이 추배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871년 훼철되었다가 1977년 영안마을로 옮겨 지은 것이다. 사당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과 경현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정면 4칸, 측면 1칸 팔작지붕) 내외삼문 구조다. 유적과 유물은 서원철폐때 모두 불타 없으며 서원 복원 때 세운 두 개의 비만 있다. 음력 3월 7일 제사한다.

설재 정가신 배향하는 설재서원

설재서원(雪齋書院)은 영평리 649번지, 전남도 유형문화재 93호다. 설재 정가신을 배향하기 위해 1888년(숙종 14년)에 설재사(雪齋祠)란 이름으로 금안동에 세워졌다. 1639년 설재 선생의 6세손으로 세종 때 효자 정여를 포상 받은 정식(鄭軾, 1407~ 1467)을 추배했다. 그 뒤 1712년(숙종 38년) 여름에 향사우(鄕祠宇)로 승격해 설재서원이 되었다.
경중 유림 33인이 도내에 촌문을 보내 심단(沈壇)을 원장으로 모시고 1723년( 경종 3년)에 옮겨짓다. 이때 강당인 영모재가 지어졌으며 신장(申檣)과 정심(鄭諶, 1520~1602)으로 추배해 4위를 배향한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뜯겼다가 1900년 영모재만 복원했으며 그 뒤 1953년 사론이 일어나 서원을 복설했다. 정상(鄭詳) 정여린(鄭如麟,1564~1640) 정란(鄭瀾, 1583~1656)을, 1988년 정초(鄭初) 정눌(鄭訥)을 추배하여 9명을 제향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강당과 내삼문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사당과 1990년 새로 지은 전사실(典祠室) 등이 있다. 매년 9월 25일 제사한다.

설재서원 뒤편에는 700년 비자나무가 남아 있다. 설재서원 경내에 있는 비자나무는 훗날 심은 것이며 서원 뒤편 언덕너머 계곡에 있는 나무가 700년 노거수다. 이 나무는 나주정씨가 금안동으로 입촌한 연대인 1260년대와 같은 세대로 추정하고 있다. 근세 들어 수차례의 홍수와 풍우가 있었으나 이 나무가 바람을 막아 설제서원(어서각)의 훼손을 막아주었다고 후손들은 믿는다.

경렬사, 만향정 귀래정 수우시정 등 문화유산 남아

경열사(景烈祠)는 금안리 51번지에 있다. 고려말 삼도관찰사를 지낸 경열공(景烈公) 정지(鄭地, 1337~ 1391)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경열사는 원래 1645년(인조 23년) 광주 동명동(편방면)에 세워졌다. 1894년 동학 때 부서지고 서원철폐령으로 뜯겼다. 지금의 건물은 1914년 광주에서 인천마을로 옮겨 지어 1976년 중수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사당과 외삼문.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의 경신재(敬信齋)가 있다.

정지 장군은 나주 문평의 죽곡 출신으로 공민왕 때 전라도안무사를 거쳐 우왕 때 순천병마사가 되었다. 순천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전라도순무사에 올랐다. 이후 남원 남해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우왕 때 문하평리에 올랐다. 시호가 경렬(景烈)이다.

만향정(晩香亭)은 영안마을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1919년 중추원의관을 지낸 김종섭이 지어 여생을 보낸 곳이다. 만향정이란 이름은 그가 늦가을 향기로운 국화향을 기린데서 비롯되었다. 이병수 강준형이 쓴 만향정기 와 나경성 고광선이 지은 시가 전한다.

귀래정(歸來亭)은 1947년 일헌 정심(鄭諶, 1520~1602)을 기리기 위해 후손 정우현 정우명 등이 건립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정자다. 정심은 선조 때 이조정랑 벼슬을 받았으나 늙은 부모 부임하지 않고 계동소와(溪東小窩)란 재를 짓고 살았으며 임진왜란 때 고경명 김천일의 의병에 참여했다.

지금의 정자는 계동소와가 무너져 조금 옮겨 지은 것. 귀거사 뜻에 따른 것. 현재는 인천마을 노인정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우시정(守愚詩亭)은 나주 정씨 문중에서 지은 것으로 귀래정과 같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대청형 구조이며 1948년 중수했다. 김기우 등의 시가 전한다.

척서정(陟西亭)은 경렬사와 나란히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1915년 척서 정해일이 지은 것. 기우만(奇宇萬)의 척서정기와 정해일의 시가 전한다. 서륜당(敍倫堂)은 1921년 풍산홍씨 문중에서 지은 제각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홍씨 문중의 모임이 열리고 있으며 음력 정월 2일 공동세배를 한다.

영사재(永思齋)는 1918년 풍산홍씨 홍수(洪樹)의 시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집 .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형태다.
효사재(孝思齋)는 광곡마을에 있다. 1915년 하동정씨 후손들이 건립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이다. 15세 손 찬수가 지은 현판과 윤항식이 쓴 효사재기 가 있다.

송산사(松山祠)는 용산리 송정마을에 있다. 1974년 양성 이씨 등이 지은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이병수, 나병집, 이민준, 신동욱, 임언규 선생을 모셔 매년 음력 2월 26일 제사한다. 사당 안쪽에 겸산 선생이 거처한 송산정사가 있다. 겸산 이병수의 시가 있다.

500년 역사의 금안동계


금안동이 호남 3대 명촌의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은 향약인 금안동계 때문이다. 영암 구림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500년 이상 대동계가 운영되고 있다. 임진왜란 직후 피폐해진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뜻에서 마을계를 발전시킨 금안동 동계(洞契)는 오늘날 지방자치의 근간을 보여주고 있다.

쌍계정 대들보 다락에 보관중인 ‘쌍계정 문서’ 에는 정가신의 10대손으로 서천군수를 지낸 정상(鄭詳, 1533~1609) 이 쓴 ‘금안동좌목중수서’란 글에 “전에 동네 사람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던 미풍이 있었고 그 규약을 적은 책 등 문건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의 난리 통에 없어져 다시 이를 적어 후인들에게 전한다.”고 되어 있어 구림 대동계와 비슷한 시기로 보인다.

동중 규약의 자세한 내용은 1635년 ‘동중약규’ 에 나오는데 15개 항목으로 된 규약이다. 동중좌수를 연령순에 따라 4~5명, 장의 1명, 상·하유사 각 1명씩 돌아가면서 정한다고 되어 있다. 선과 악을 기록하는 장부, 상례, 매장일에 쌀과 술 과일 보내고 자녀결혼에 닭, 물고기, 과일, 채소, 쌀, 베 등을 자기의 힘에 따라 부의한다고 되어 있다. 명령을 어기는 자에 대한 벌칙도 있다. 가장 큰 벌은 술 한동이와 안주까지, 중간벌은 술 2병과 안주 2가지 등으로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이 동중규약은 1681년 ‘향약상계안’ 이란 이름으로 변하며 미풍양속의 진작에 중점을 두고 48개 벌칙을 규정, 바른 행동을 하도록 합의하고 있다. 동약, 향약 이란 이름은 1712년 대동계입의 (大同契立議)로 바뀐다.
이 동네에는 신규가입비로 하루 품삯 안팎의 적은 돈을 받았으며 숙종 38년에 만들어진 ‘대동계입의’에는 계원 자녀의 상속 가입 때는 벼 한말, 형제 가입 때는 벼 닷말, 타관 전입자는 열 말을 내놓아야 한다고 적어져 있다.
대동계는 동네에 부과되는 고마세(雇馬稅) 등 공동납부기능을 맡았을 뿐 아니라 학업권장의 일도 맡았다. 또 산림보호 규정도 들어 있다.

초창기 기록에 금안동좌목중수서에 올라 있는 사람은 모두 117명이다. 본관은 성씨별로 구분하면 나주정씨 25명, 풍산 홍씨 21명, 하동 정씨 8명, 서홍 김씨 3명, 기타 60명으로 동네에 터를 잡아 혈연관계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구성원이 금안동 12동네 안에 사는 지연과 혈연 중심이지만 일반 향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족친 서열보다는 나이를 앞세워 윤리와 질서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시대로 넘어오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즉 마을의 규약보다 나라에서 정한 것만 지키도록 강요한 데 따른 것. 또 1917년 쌍계정에 걸린 현판을 중심으로 시비가 일었고 씨족중심의 경쟁이 붙어 화목이 깨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에 1937년 6월 18일 네 성씨 대표들이 쌍계정에 모여 어느 특정 문중이 아니라 금안동에 사는 네 성씨의 것으로 화평의 상징으로 삼자고 결의하게 되었으며 1957년 쌍계정에 사성강당(四姓講堂)을 현판 내걸었다.

1943년 네 성씨 모임인 명신계의 재산은 집터 294평, 논 828평, 산 22정보로 기록돼 있으며 현재는 산을 팔아 밭을 1,407평, 논 9,458평으로 늘려놓았다. 논과 밭은 가난한 집에서 경작하고 논 200평에서 벼 1섬씩을 내놓아 행사에 사용하고 효자표창, 노인당 건립 등을 하기도 했다. 매년 동계일은 음력 4월 20일 대동계 강신소인 쌍계정에서 열리며 결산보고 갑사보고, 기타 토의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특히 금안동은 나주시나 광주시와 가까이 위치하면서 마을마다 동계를 조직하여 오랫동안 유지함으로써 촌락공동체의 성격이 잔존하는 마을이다. 그러나 해방이후 빠른 속도로 농촌이 변화되면서 농촌인구가 급감하고 자급자족에서 상품생산으로, 촌락공동체 성격이 약해지면서 금성산신제, 기우제, 줄당기기 등의 공동제 의식도 사라지고 말았다. 금안동계는 자연부락 단위의 동계와 수리계, 대동계가 있다.

금안동 권역 단위 종합정비사업 진행


금안동(金鞍洞)은 나주시의 명촌 재건사업의 하나로 금안동권역 단위종합정비사업을 벌이고 있다. 국비와 시비를 합해 모두 53억원이 들어간 1차 사업이 끝나고 10억원을 추가 확보해 2차 사업이 진행 중이다. 마을 입구에서 경렬사와 척서정 주변 등 500여m에 높이 1.52m의 흙돌담을 쌓아, 고풍스런 맛을 전해준다. 센터로 사용할 한옥 2개 동이 준공돼 앞으로 관광체험과 농촌체험, 세미나, 공예, 전래놀이 전승 체험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또 인근 금성산 자락에 한옥행복마을이 조성되고 금성산 숲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생태숲관이 만들어지는 등 명촌 가꾸기 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한옥행복마을은 2015년까지 27세대가 완공돼 입주한 상태이며 6세대 건립부지가 남아 있다. 한옥의 크기는 30~40평 규모이며 이 마을에서 3세대가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권역사업 총괄팀장인 이영희씨는 “센터 건물을 비롯해 하드웨어는 갖춰졌는데 아직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지 않아 체험학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그러나 광주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여건이 좋아 활발한 체험활동이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문화해설사를 겸해 사무장을 맡고 있는 이명신씨는 “500년 역사의 대동계와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깊은 금안 8경 등 앞으로 발전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면서 전남도와 나주시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주변 가볼만한 곳 쫸

▶남천예술인마을 (나주시 금성산길 387-58)

남천예술인 마을은 나주동신대학에서 금안동으로 가다가 태평사라는 절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500m쯤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재일교포 사업가 고 서상록씨가 생전 고향에 세운 서상록 정원 앞을 지나면 바로 연결된다.
향토사업가 남재천사장이 금성산 자락 15,000여평의 부지에 조성한 수목원에 황토집 20여동을 지어 지역의 예술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해 화제가 되었던 예술인촌이다. 이 수목원에 심어진 나무만 1천여 종 10만 그루에 이른다. 굽이굽이에 폭포와 고목나무 숲 등 20여 곳의 사진촬영지까지 섬세하게 조성해놓았다.

남사장이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뭔가 한 가지는 남기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세월이 갈수록 가치를 더해가는 나무심기를 시작했고 아름다운 수목원이 조성되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황토집을 만든 것. 현재 이곳 남천예술인 마을에는 동서양화 작가와 서예가, 공예가, 사진작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이 창작활동을 펴고 있다.
남사장의 소망은 상설 전시장을 만들어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이 수목원을 관람하고 예술작품도 사가도록 함으로써 예술인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를 가꾸기 위해 쉼 없이 새로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입주작가인 서양화가 김수연씨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각기 다른 풍취를 연출해 작품의 좋은 소재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이기도 하다.”면서 작업실을 제공해준 남재천 사장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금성산 생태숲
금안동 광곡마을에서 금성산 자락을 숲길을 따라 쉬엄쉬엄 30분이면 올라갈 수 있는 곳에 자연속의 명소 ‘금성산 생태숲’이 자리하고 있다. 나주시가 지난해 개장한 생태숲은 총 57만㎡ 규모로 여기에는 숲속교실·놀이터·탐방로·교육관·생태습지 등이 조성돼 교육과 힐링의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건강숲길 1.7㎞, 계류보전 170m, 전망대 1개소, 숲관찰데크 1개소, 전망 데크 4개소가 설치돼 있으며, 테마별로 숲속교실, 숲속쉼터, 잔디광장, 생태습지원, 숲놀이터, 향기원, 관목원, 유실수원 등이 들어서 있다. 앞으로 테마별 식물원을 보완하고 목공예 체험관도 갖춘다는 계획이다.

특히 이곳에는 숲 해설가와 숲 유치원 전문인력이 상주하고 있어 유치원, 초·중고 학생들에게 숲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어른들에게도 산림휴양 서비스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휴일 없이 운영되고 있으며 단체의 경우 사전예약하면 공휴일에도 생태관 이용이 가능하다. 문의처는 나주시청 산림공원과(061- 339-7212)

민박
▶희락정 (나주시 노안 3도로 407-194, 010-3601-6501)
금안동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박집이다. 한옥행복마을 내에 있으며 40평 규모의 한옥과 별채(20평)까지 있어 많은 인원을 소화할 수 있다. 희락정은 구들방으로 되어 있으며 황토, 참숯, 한지로 만든 친환경 한옥이다. 텔레비전은 물론 에어컨 선풍기 냉장고 와이파이 등의 편의시설과 샤워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바비큐 요리를 할 수 있는 곳도 따로 있다. 호텔식 침구를 제공한다.
이용요금은 2,3인이 사용하는 방은 하룻밤에 7만원, 주말 8만원이며, 성수기(7월 15일~8월 31일, 12월 24일~26일, 1월 1일~3일)에는 1만원씩 더 비싸다. 또 기준을 초과하는 경우 인원수에 따라 1만원씩 더해진다.
아침식사도 미리 주문하면 가능하다. 식재료는 텃밭에서 직접 기른 무농약 바른먹거리를 사용하며 한식조리사인 안주인이 만든 토속밑반찬, 생선구이를 더해 이른바 시골아침밥상 ‘집밥’을 즐길 수 있다. 식사단가는 8천원이다.
자세한 사항은 https://heerakjeong.modoo.at/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들방 (010-3646-0193)
한옥행복마을에 있다. 남아 있는 방 한 칸만 빌려주는데 사용료는 4만원(조식 포함)이다. 직업적으로 하지 않고 찾는 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준다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명촌한옥(성재세가) (나주시 노안면 삼도로 407-146, 010-4824-7077)
한옥 행복마을에 있다. 한옥전체 20평의 거실(세미나실)을 포함해 방 2개를 다 사용하면 20만원, 방 한칸씩 사용하면 8만원이다. 직접 조리할 수 있는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으나 식사는 따로 제공되지 않는다.


맛집

▶목사골식당(노안면 노안로 346, 전화 061-336-7892)
노안면 소재지에 있으며 노안일대에서는 가장 큰 식당이다. 오리한방백숙전문 요리점이다. 물론 메뉴에는 백반도 들어 있어 간단히 식사를 할 수 있다. 민박을 했거나 맛집을 찾는 사람이라면 가볼만한 곳이다.
안주인이 시누이와 둘이서 운영하는데 시골식당치고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안주인이 종가집에서 자라서 기본 미감이 있는데다 15년 노하우가 더해져 사람들의 입맛을 잘 안다.
대표메뉴인 한방오리백숙에는 밤과 대추, 은행, 황귀, 당귀, 감초 등 다양한 한약 재료를 넣고 압력솥에서 4,50분을 끓여낸다. 때문에 기다리지 않고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다. 이 집은 특별히 준비한 밑반찬보다는 신선한 계절요리에 더 비중을 둔다. 계절에 맞춰 여러 가지 나물이나 산채를 곁들여 먹는 오리 요리는 일품이다. 묵은 김치와 게볶음 등도 안주인이 권하는 반찬이다. 입소문이 나면서 노안일대는 물론 나주시내와 혁신도시, 광주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
4인기준 오리한방백숙 45,000원, 백반 6천원이다.

글 : 지형원 (문화통 발행인) / 사진 임철진 (사진작가)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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