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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7일(일요일)

11. 영암 구림마을

왕인박사·도선국사 탄생한 2,200년 역사의 마을
500년 이어온 구림 대동계 유명…‘호남의 명촌’
2017. 03.27(월) 13:07확대축소
구림마을 전경
묏버들 가려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折楊柳寄與千里)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人爲試向庭前種)
행여 밤비에 새잎이라도 돋아나면
(須知一夜生新葉)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憔悴愁眉是妾身)

조선중기 경성관아의 관기 홍랑(洪娘)의 ‘번방곡(飜方曲)’이란 시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의 이별을 서러워하며 함관령(咸關嶺)에서 길옆에 피어 있는 산버들을 꺾어 주며 읊었던 시다.
고죽 최경창은 영암출신으로 1568년 과거에 급제해 5년 뒤 함경북도 경성지방의 북평도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홍랑과 만나 1년 남짓 부부처럼 살았다. 고죽은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손곡(蓀谷)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자,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렸다.
서울로 올라온 고죽은 홍랑을 잊지 못해 몸져누웠는데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간을 밤낮으로 걸어 재회했다. 고죽은 홍랑의 지극정성으로 점차 회복이 되었으나 이것이 문제가 돼 파직 당했고 홍랑은 양계의 금(兩界禁 : 함경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을 어겼다는 이유로 경성으로 추방되었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相看脈脈贈幽蘭)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此去天涯幾日還)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莫唱咸關舊時曲)
지금도 궂은 비구름에
첩첩 청산이 어둡구나
(至今雲雨暗靑山)

최경창이 홍랑을 다시 떠나보내면서 지어준 ‘송별(送別)’이란 시다. 홍랑이 함관령에서 버들가지 꺾어주며 이별했던 것처럼 고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주면서 애끓는 심정으로 화답했던 것이다. 이후 고죽은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마흔 다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임과의 재회만을 기다리던 홍랑에게는 청천병력이었을 것이다. 몇 날을 슬픔으로 통곡하다 마음을 추슬러 최경창의 묘소를 찾았다. 젊은 여인의 몸으로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단장하지 않은 것은 물론 천하일색의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얼굴을 흉하게 만들었고 숯덩이를 삼켜 벙어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500년 역사의 구림대동계 문서


그의 생각은 삼년동안의 시묘살이를 끝내고 자신도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는 바람에 시묘살이를 포기하고 함경도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홍랑은 7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 해주최씨 문중을 찾아가 최경창의 유묵들을 전한 뒤 무덤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우리가 오늘날 최경창의 시를 다시 보게 된 것은 홍랑의 순애보 때문이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다시 보게 된 것도 해남윤씨 가문에서도 난리 때마다 종부들이 귀한 문헌들을 대밭에 숨겨 지켰기 때문이다.
홍랑이 죽은 뒤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집안사람으로 장사를 지내고, 최경창과 부인 선산 임씨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고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라는 묘비를 세워주었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전생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구림을 찾아 나선 길에 홍랑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최경창(1539~1583)이 구림 출신의 해주 최씨 전한공파 19세손이기 때문이다.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1561년 진사과, 1568년 문과에 급제. 관직은 부사(府使)에 그쳤고, 청백리에 올랐다. 율곡 이이, 귀봉 송익필, 간이 최립 등과 더불어 팔문장이라 불렸으며 송강 정철, 만죽 서익 등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왕인박사·도선국사 별박사 최지몽 탄생지

구림을 찾아 나선 날은 정유년 입춘이 지났지만 ‘버들가지’는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붉은 동백꽃이 봄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구림마을은 영암읍에서 남서쪽으로 약 8㎞ 떨어져 있다. 동쪽에는 월출산이 있고 그 산자락에 도갑사가 자리를 잡았다. 도갑사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구림천을 이뤄 마을 휘감고 돌아나간다.
그 끝자락이 상대포로 백제의 왕인박사가 천자문을 들고 일본으로 떠났다는 상대포이다. 지금 그 상대포에는 호수와 정자가 있고 작은 배도 한 척 띄워 놓았다. 구림마을은 일본 아스카 문화의 시조로 알려진 왕인(王仁)(?~?) 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聖基洞) 이다. 또 한국도기의 유약 시배지이기도 하다.
구림마을은 삼한시대부터 존재해온 2,200년 역사의 마을로 원래는 학림(鶴林), 또는 이림(爾林)이라 하였으며 성기동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성기동이란 이름은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를 비롯해 회미선사, 경보선사, 동진대사, 고려 별박사 최지몽, 조선 수미왕사 등 여러 성현들이 탄생한 데 따른 것이다. 지금도 성천(聖泉) 성천(聖川) 고최씨원(古崔氏園) 등의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상대포


왕인박사는 일본 응신왕(應神王)의 405년 초빙으로 논어 10권과 종요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도공, 와공, 야공, 직공 등 많은 기술자를 데리고 건너가 일본 아스카문화(文首)원조로 추앙받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매년 이곳을 찾아 왕인묘에 참배하고 있는 것이다. 구림일대에는 탄생지인 성기동과 박사가 마셨다고 전해오고 있는 성천이 있으며 월출산 자락에는 박사가 공부를 했다고 전해 오는 책굴 앞에 왕인석상, 문산재, 양사재가 있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난 후 후학들이 인재를 길러낸 곳이다. 또 성기동 남서쪽 동정고개<陶窯址>는 일본으로 떠날 때 동료, 문하생들과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정든 고향을 뒤돌아보았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상대포는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곳으로 당시의 국제무역항이었다. 신라 말에도 최치원, 최승우, 김가기 등이 이곳을 통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역사적 장소다. 현재 이곳은 역사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월출산 주지봉에서 흘러내린 두 줄기의 낮은 구릉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데, 예로부터 ‘두 마리의 용이 품은 마을’이라 하여 명당이라 하였다. 조선후기 지리서인 택리지에는 “월출산 남쪽에는 월남마을이 있고 서쪽에는 큰 마을이 있는데 둘 다 명촌이다.”는 기록이 있다. 또 호남의 3대 명촌 가운데도 영암 구림은 전북 태인, 나주 금안동과 함께 들어 있다. 명촌은 향약의 전통이 잘 지켜지고 좋은 인물을 배출한 곳을 일컫는다.

‘구림(鳩林)’이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전라도 영암군 고적」에서 확인된다. 기록에 따르면 “최씨 성을 가진 신라 사람의 집에 한 자가 넘는 큰 오이 하나가 열려 그 집 딸이 따 먹은 뒤 아이를 낳았다는 것. 아이를 몰래 대숲에 버려두었다가 모정에 겨워 다시 가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보호해 죽지 않고 살아서 있었고 그가 자라서 도선(道詵, 827~898)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마을의 지명으로 구림(鳩林)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에는 최씨 여인이 조암(槽欄)에서 빨래를 하는데 푸른 외가 떠내려 와 이를 먹었더니 임신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후 이 바위를 국사암이라 부르고 근처 마을을 국사암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선각국사 도선은 김씨 또는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전해지고 있으며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중이 되었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 알져져 있다. 그의 저서로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등이 있다.
회사정


내셔날 트러스트 시민유산 지정
대상마을 선정

구림마을은 지난 2006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보전 대상지 시민공모전에서 ‘잘 가꾼 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이 사업은 사단법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유한킴벌리에서 공동 주최하고, 문화관광부가 후원하는 행사로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과 문화유산’을 시민들이 발굴, 선정해 시상하는 제도다.
알려진 대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시민운동이다.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초반 그린벨트 해제 반대운동 등을 폈으며 ‘내셔널 트러스트 법’ 제정이후 ‘강화 매화마름 군락지’, 서울 성북구 ‘최순우 옛집’, ‘동강 제장마을’, ‘나주 도래마을 옛집’, 강원 춘천‘권진규 아틀리에’, ‘연천DMZ 일원 임야’, ‘청주 원흥이 방죽 두꺼비 서식지’ 등이 지정된 바 있다.

쌍취정 북송정 등 12개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구림 마을은 열두 개의 크고 작은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동성동본의 성씨들이 동족 마을을 형성했다. 16세기에는 향안(鄕案)과 동계(洞契)를 조직, 향촌 공동체를 운영했으며 17~18세기에는 문중별로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사하고 있다.
18세기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따르면, 구림 마을의 열두 동네는 쌍취정, 북송정, 남송정, 상서호정, 하서호정, 학암, 죽정, 구림, 국사암, 동송정, 취정, 동정자, 남정자, 동계리, 고산리 등이다.
구림마을의 대표 성씨는 낭주최씨(朗州崔氏), 선산임씨(善山林氏), 함양박씨(咸陽朴氏), 창녕조씨(昌寧曺氏), 해주최씨(海州崔氏), 연주현씨(延州玄氏) 등이다. 이 마을에는 성씨별로 문중과 관련한 유적이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선산 임씨 임구령(林九齡)[1501~1562]이 조성한 지남들 조성 기념비, 함양 박씨 문중이 선조들의 제사를 모시는 죽정서원(竹亭書院), 오한(五恨) 박성건(朴成乾(1418~1487)이 건립한 간죽정(間竹亭), 연주현씨의 정자인 죽림정(竹林亭), 창녕조씨의 문중 사우인 서호사(西湖祠), 낭주최씨의 국암서원, 해주최씨의 동계사 고죽관, 삼락재 등이 있다.
국암서원


낭주최씨가 가장 먼저 정착

구림마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낭주최씨로 영암최씨로도 불린다. 그 연원은 고려건국 때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최지몽(崔知夢, 907~987)에게서 출발한다. 왕건(王建, 877~943)은 고려를 세우기 위해 전라도 서남해역에서 견훤(甄萱, 867~935)과 여러 번 싸웠다. 그 첫 번째 전투지가 지금의 신안군 압해면 고이도다. 왕건은 구림마을에 살던 최지몽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후백제를 손에 넣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영암최씨는 고려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토착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선산 임씨는 본래 해남에서 세거했다. 임우형(林遇亨, 1473~?)은 해남에서 구림 마을음성 박씨와 혼인하여 임천령(林千齡)·임만령(林萬齡)·임억령(林億齡)·임백령(林百齡)·임구령 등 5형제를 낳았다. 막내아들 임구령이 홍주목사와 남원 부사를 지내고 말년에 이곳에 정착해 세를 형성했다. 국사암 주변에 요월당을 건립했는데 지금도 국사암 바위에 임호지지라고 각인되어 있다. 그는 진남제(鎭南堤)라는 제방을 쌓아 1천여 마지기의 농경지(지남들)를 조성, 마을사람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만들었다.
임구령의 장남 임호(林浩, 1522~1592)는 1565년(명종 20)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창립한 구림대동계(鳩林大洞契)의 발기인이다. 구림 대동계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계 조직이다. 차남 임혼(林渾, 1522~ ?) 외손자인 조행립(曺行立,1580~1663), 현 건, 박이충 등이 구림 대동계의 중수자이다. 임진왜란 때 충절공신으로 녹도만호 정운( 鄭運,1543~1592) 장군의 모친도 선산임씨다.
죽정서원 전경


함양 박씨와 박규정

함양박씨의 구림 입향조는 박성건이다. 오한 박성건은 처가인 난포박씨가 오래전부터 살아온 구림 마을로 낙향하여 구림을 대표하는 유력 성씨로 성장했다.
구림에서 함양박씨의 위상을 정립한 인물은 박규정(朴奎精, 1498~1580)이다. 박규정은 임 호 등과 함께 구림대동계를 창설했다.
1479년(성종 10) 간죽정이 세워지게 되는데 함양박씨 문중에서는 박대기(朴大器, 1537~1601)와 박승원(朴承源, 1562~?) 등 다수의 임란 충절인물을 배출했다. 1646년에는 구림대동계의 집회 장소인 회사정(會社亭)을 건립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해주최씨 입향조는 고죽 최경창의 손자인 최석징이다. 고죽이 구림에서 탄생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교유했던 문인들과 손자인 최석징이 이곳에 살았음을 볼 때 영암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많은 후손들이 대를 이어 기거하고 있다. 해주최씨 사우로 동계사가 있다.

창녕조씨 입향조는 태호 조행립이다. 조행립은 학덕이 높고 행실이 뛰어나 마을주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주민들이 옛마을 율정(栗亭)에 구림사를 세워 기렸다.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44년 서호사(西湖祠)란 이름으로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연주현씨는 난포박씨의 사위 현윤명이 처가로 들어오면서 대대로 모여 살게 되었다. 이후 호남은행 창립자인 무송 현준호(1889~1950)의 부친 현기봉(玄基奉)이 구림대동계 책임을 맡으면서 4년제 구림보통학교를 10년 운영하였다. 현준호는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 도평의회원, 호남은행 은행장,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다. 1940년부터 서호강을 막아 660ha의 농경지를 조성하여 지역의 민생고 해결에 큰 공을 세웠다.

500년 역사의 구림 대동계

구림에는 500년 역사의 구림대동계와 회의장소 강수당, 계사유물관, 회사정(會社亭)이 있다. 회사정 앞에는 지금보다 더 큰 노송이 많았으나 일본이 베어가고 수 십 그루만 남아 있다. 동계(洞契)는 조선시대 마을 공동체를 자치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마을계로 구림동계, 또는 서호동계로도 부른다. 조선후기 호남지방 동계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구림 대동계가 조직된 것은 1565년(명종 20)이며 이를 주도한 사람은 함양 박씨인 박규정과 선산 임씨인 임호 등이다. 임호는 아버지가 초안한 4대 덕목을 바탕으로 동계를 조직 운영했으나 정유재란 때 기록이 다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창녕조씨 조행립, 연주현씨 현 건, 박이충, 해주최씨, 낭주최씨가 집성(集姓)으로 참여하였다. 수자가 그리 많지 않은 산성(散姓)으로 전주최씨, 천안전씨, 전주이씨, 함평이씨, 통천최씨, 청주곽씨 등이 함께 활동했으나 함평이씨, 통천최씨 등 일부 성받이는 계원이 사망한 뒤 후임자가 없어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구림대동계는 오랫동안 체계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1609년~1747년 사이에 작성한 구림동헌(鳩林洞憲)과 동계(洞契) 관련 문서 16점이 전남도 지방문화재로 등재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였으며 근대의 교육기관 설립에도 크기 기여하였다. 주요 규약은 도로 보수·산림 보호·교량 건설 등 관혼상제 중점을 두어 마을 운영 전반에 관한 것이다. 또 벌칙으로 마을일을 태만히 하여 마을에서 내쫓는 출동((黜洞)이란 것도 있다.
구림대동계는 정원이 80명이나 현재는 74,5명이 남아 있다. 계원이 되려면 계원 후손으로 계에 단자를 제출하여 가부를 바둑알 투표를 하는데 참가자 3분의 2이상이 찬성해야 회원가입 자격이 규정의 절차를 거쳐 주어진다.

250년 역사의 당산나무

영암 도기박물관 정원에는 250년 수령의 당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가 올려 진다. 원래 이 터는 구림대동계 소유였으며 그곳에 8그루의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오랜 세월을 못 견디어 태풍으로 쓰러지고 현재 2구루만 남아 있다.
구림당산제는 풍년과 마을을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로 전통방식으로 진행된다. 취재진이 찾았던 1월 초순에도 ‘왼새끼’로 꼰 금줄 쳐 있어 신성스런 느낌을 더했다. 구림에서는 이곳 말고도 서너마을에서 당산제가 거행되고 있다.
현재의 영암 도기 박물관 부지는 본래는 구림 대동계의 소유였다. 1907년 근대 교육이 시작될 때 그 땅을 사립보통학교(4년제)에 내주었는데 이후로 구림국민학교와 구림중학교가 세워졌다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1999년 영암도기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이곳에 도기문화센터가 들어선 것은 이화여대박물관 팀이 우리나라 유약 도기의 발상지인 구림리 가마터(사적 제338호)를 발굴한데 따른 것이다.

당시 가마터 발굴에는 나선화 학예실장 (현 문화재청장)이 참여했으며 한국최초의 유약 시배지임이 밝혀져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영암도기는 붉은 황토 특색을 가지고 있다. 다른 흙을 섞지 않고 고열에도 그릇이 잘 조성되는 것이 영암 황토의 특징은 월출산의 맥반석의 영양으로 그릇에 밥풀이 붓지 않는다.
한편 하정웅미술관 옆 연주현씨 종가 입구에도 장엄한 팽나무 2그루가 그 옛날의 당당함을 간직하고 서 있다.

역사에 빛나는 구림 3·1 운동탑

영암도기박물관 부지 한 켠, 회사정 정원에 있는 구림 3·1운동탑은 3.1운동 70주년을 기념하여 구림청년계가 중심이 되어 세운 것이다. 주민들의 성금과 군비 등을 보태 세운 이 탑은 10m 높이로 제작은 조각가 최규철 교수(전남대)가 맡았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뒤 영암에서는 4월 10일 주민 1천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4월 4일 조극환의 주도로 청년지도자 최민섭, 박규상, 정학순, 김민규, 김학용, 김봉규, 김상조 등이 회합을 갖고 10일날 영암과 구림에서 동시 거사키로 결의했다.

10일 오전 8시 징소리가 울러퍼지자 수천의 주민들이 합세했고 9시 정각 박규상이 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리자 ‘대한독립만세’ 외침소리가 구림에 울러 퍼졌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박규상 최민섭 최기준 조병식 정학순 김재홍과 정상조 조희도 박성집 박흔홍 등 25명이 체포되고 옥고를 치렀다.
이에 구림청년계가 중심이 되어 3·1절 기념탑을 세웠고 다시 후손들이 중심이 돼 만세의 기록을 세긴 3·1절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 자랑스런 역사로 간직될 것으로 보인다.

회사정 육유당 국사암 담숙제 등 문화유산 많아

한석봉이 쓴 육우당 현판
구림마을에는 임구령의 시를 비롯해 월당선생이 건립한 요월당에 고재봉, 임석천 등 유명한 시인묵객의 현판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정자가 없어지면서 지금은 사리지고 없다. 그래도 회사정, 육우당, 국사암, 간죽정, 호은정등 12개의 누정(樓亭)과 전통가옥, 돌담, 고목나무 등이 옛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큰 다행이다. 도선국사 관련 유적으로는 국사암, 백암, 도갑사, 월암사지, 도선국사비 등이 있다
회사정(會社亭)은 구림마을의 모든 일이 이루지는 중심이다. 이 정자는 월당 임구령이 낙향하여 진남제와 진남보를 축조한 뒤 누에머리처럼 돌출한 자리에 정자를 짓고 모정(茅亭)이라 이름 하였다. 임구령은 이곳에서 거문고를 타고 중형 석천 임억령은 시를 읊으며 형제의 우의를 나눴는데 이 사실에 조정에 알려져 ‘쌍추정’ 이란 임금의 친필이 사액되었다고 한다. 영산강이 한눈에 보이는 모정은 풍치가 아름다워 고경명, 백광훈, 양응정, 임제 등이 회유하였던 곳이다. 큰 이불을 같이 덥고 밥상도 제비처럼 나란히 앉아 먹었다고 한다.

육우당은 함양박씨 박 정 손자인 박흡(朴洽 ?~1593) 장군 6형제가 한 목침을 베고 잤는데 지금도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여기에 걸린 육우당(六友堂)이란 편액글씨는 2점은 한 호 한석봉이 15세 때 쓴 것으로 전하고 있다.
영암은 어머니와 떡썰기 시합을 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개성출신의 한석봉은 스승 영계 신희남 선생을 따라 영암 덕진면 영보리로 이주해왔고 어머니는 지금의 서호면 아천포구에서 떡장사를 하며 아들을 훈도해 당대의 최고 명필로 길러냈다. 우리나라에는 한석봉의 현판글씨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서호정마을에 있는 낭주최씨 국암서원은 지역유림들의 발의로 창사되었다. 이곳에는 최지몽을 주벽으로 최안우, 최운, 최진하 최몽암을 배향하고 있다. 최지몽의 본 이름은 총진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의 꿈을 해몽한 뒤 태조가 지몽이란 이름을 하사하여 개명했다. 최안우는 성리학에 밝아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교유하였고 최진하는 백가서에 관통하고 효행과 우애가 뛰어나 서울 도봉서원에서 강학을 하였다. 최몽암은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군수와 오위도총부 도총관 공조참판을 지냈다.
구림사(鳩林祠) 창녕조씨 조행립(曺行立)의 학덕과 행실을 기리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1667년 신흥동의 옛마을 율정(栗亭)에 세웠다. 한말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지방 유림들의 발의로 조씨 문중이 옛 육우당 종가를 매입하여 1944년 서호사(西湖祠)로 중건하였다. 현재는 창녕조씨 문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종손 조종수의 종가는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최근 서호사 입구에 창녕조씨 유물관이 완공되었다.

죽정서원(竹亭書院)은 1681년(숙종 7)에 향중유림들의 추천으로 죽정마을이 병건하였다가 1726년(영조 2)에는 서인 노론계였던 귀락당(歸樂堂) 이만성(李晩成,1659~1723)을 원장으로 추대하여 지방 사족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함양박씨의 문중의 박성건(朴成乾)과 그 아들 박권(朴權), 손자 박규정(朴奎精) 현손 박승원(朴承源)과 이만성(李晩成) 등을 배향하고 있다.
박성건은 함양박씨 영암 입향조로 금성교수, 장수현감 등을 지냈으며 구림에 살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특히, 박규정은 구림 대동계의 영암향약을 창설하고 향약을 마련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의 한 명이다. 박성건은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경기체가 <금성별곡(錦城別曲)>을 지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향유(鄕儒)들의 건의로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맞배지붕이며 강당, 조양재 영당과 내삼문, 외삼문이 죽정서원 앞에는 박성건이 구림에 귀향하여 1479년(성종 10)에 세운 간죽정(間竹亭)이 있다.

죽림정(竹林亭)은 연주현씨 정자이다. 현 징이 1678년 학산면 안산 내동리에 있던 취음정이라는 정자를 구림으로 옮겨 건립한 것이다. 현윤명이 구림으로 내려왔고 증손자 현건은 대동계 초대동장을 지냈는데 이순신 장군과 주고받은 서신 일부가 보존돼 있다.
동계사(東溪祠)는 해주최씨 사우로 최충을 주벽으로 5위를 배향하고 있다. 동계사는 고죽 최경창기념관 옆에 있으며 문각인 삼락재(三樂齋)가 있다.
간죽정은 죽정서원 바로 왼쪽에 있다. 장수현감을 지낸 박성건이 구림의 난포박씨 처가에 낙향하여 터를 잡아 은거하면서 1479년 건립하여 학문수양처, 후학양성처, 집회소 등으로 이용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형태의 정자에는 박성건의 ‘금성별곡’ 6장이 편액으로 걸려있으며 ‘간죽정기’ 등이 걸려있다.
최기욱 영암향교 전교이자 향토문화전문가는 “영암 구림은 호남의 명촌이자 우리나라의 명촌”이라면서 “지금도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이 남아 있고 그 유산을 지키고 가꾸려는 사람들이 있어 구림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낭서고택


지방문화재 창녕조씨 종가, 400년 역사의 낭서고택

구림에는 지방민속문화재 35호로 지정된 조종수 가옥과 낭서고택이 있다. 400년 역사의 조종수 가옥은 원래 육우당 종가였으나 창녕조씨가 매입해 오늘에 이른다. 5칸 초가의 문간채와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안채만 남아 있고 사랑채 자리에는 부속채와 창고건물이 있다. 안채는 작은 동산을 등지고 서쪽을 바라보는 서향집으로 정면 5칸, 옆면 1칸 규모로 네면에 마루를 둘렀으며 북쪽에서부터 부엌, 큰방, 대청(2칸) 건너방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낭서고택도 약 4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낭서고택은 언뜻 보면 안채가 오래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작은 집이 고택이다. 낭서고택은 원래 순흥 안씨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죽정서원을 제외하고 모두가 안씨 소유였다. 이후 광산김씨- 안용당 창녕조씨-전주최씨 등으로 소유가 바뀌었으며 현재는 낭서 최관묵씨 후손의 소유로 현재 이곳에서는 민박이 이뤄지고 있다. 지금도 연자방아 소리라 낭낭하다.

옛 부터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대문도 없고 창고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5만평의 넓은 땅을 굳이 울타리를 둘 필요가 없고 많은 길손을 대접하느라 쌓아 놓을 곡식이 없었다는 것. 집 주인의 후한 인심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낭서고택 바로 뒤에는 운치 있는 대나무 숲이 자리에 눈내린 겨울은 더욱 장관이다. 주변은 산책로와 정자, 맑은 저수지 등이 숲과 함께 어우러져 심신을 눕히는데 안성맞춤이다.
낭서고택


민박마을

구림마을은 현재 잘 갖춰진 한옥민박마을로도 유명하다. 한때 96개의 한옥민박집이 있었으나 현재 민박체험을 하는 곳은 10곳 정도다. 특히 농식품부로부터 왕인박사 체험마을로 지정돼 이곳에서 한옥 숙박체험과 더불어 종이공예, 전통혼례, 떡메치기, 짚풀공예, 물고기 잡기, 물놀이 등의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대동누리관과 낭호관 등 2채의 한옥이 있는데 대동누리관에는 세미나실과 방 2개, 사무실이 있고 최근 완공된 낭호관에는 방 2개와 식당이 있다. 민박은 2인기준 7만원이며 1인이 추가마다 1만원이 더해진다.
왕인박사 체험마을 운영책임자인 최남호 위원장은 “전국 어디를 가 봐도 구림만한 마을을 찾지 못했다.”면서 “오랜 역사를 간직한 구림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우리를 지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인박사체험마을 사무실에서는 체험마을 운영 뿐 아니라 고객들의 요구에 맞춰 민박집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전화 061-472-0939
기타 민박집은 다음과 같다.

� 목원당 = 군서면 죽정서원길 13-29 (061-473-7077, 010-8917-7067)
� 운유재 = 군서면 상대포로 150-16(010-5539-6005)
� 월인당 = 군서면 모정리 655, 3실 (010-6648-7916)
� 휴림한옥팬션 = 군서면 왕인로 476(061-471-5868)
� 낭서고택 = 군서면 동구림리 150(061-472-0070, 010-3114-1313)
� 구림전통한옥 = 군서면 죽정길 5-42 (010-5618-4581)
전통혼례체험

가볼만한 곳 쫸

▶도갑사 (영암군 군서명 도갑리) :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대가람이다. 조선시대 세조 때 중창하기 시작해 1473년(성종 4) 완공했다. 이후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해 오늘에 이른다.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깨달음을 얻은 고찰이다.
도갑사에는 국보 50호인 해탈문과 제1134호인 동자상, 보물 제89호인 석불좌상 등이 문화재가 있다. 석불좌상은 높이가 300cm로 얼굴은 비교적 둥근편이며 반쯤 뜬 눈과 넓적한 코, 작은 입 등이 특징이다. 고려초기 철불좌상이나 마애불좌상과 양식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해탈문은 통일신라 선승 도선국가가 창립당시 세운 도갑사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의 단층건물이다. 1960년 5월 해체보수 때 종도리 밑의 장여(長舌)에서 묵서명이 발견돼 중건과 완공시기가 밝혀졌다. 이 문은 사천왕상을 문 앞에 안치하는 사천왕문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현재는 세조 때의 보웅보전이 75평 복원되어 일본에 있는 32웅신 불화를 복원하여 안치하였고 세조대 조성된 삼존불은 6.25이후 서울 조계사로 가져가 이 삼존불이 다시 도갑사로 되돌와 오게 되기를 기대한다.

▶영암하정웅미술관 : 영암출신 재일교포 2세 하정웅 선생이 영암군에 기증한 미술작품 3,700여점과 미술자료 450여점의 미술자료 등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군립미술관이다. 2007년 1월 750점의 미술품을 기증한데 이어 5차에 거쳐 총 3,746점의 미술품을 기증했다. 이 가운데 미술관 소장이 3,417점, 도기박물관 3층 하정웅컬렉션 기념실에 329점이 수장돼 있다.
하정웅 미술관은 부지 6,017㎡ 에 미술관 1,413.91㎡, 게스트하우스 101.52㎡ 이며 주요시설은 수장고(216㎡), 상설전시실(284.4㎡), 기획전시실(216㎡), 무실(86.4㎡), 공용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소장품은 20세기 초 피카소와 교류했던 마리로랑생, 천경자, 벤 샨, 조르주 루오, 헨리밀러, 전화황, 손아유, 무나카타 시코, 다카야마 타츠오 등의 작품이 있다.
문의 : 061-470-6841

▶영암도기박물관 : 통일신라시대에는 한국 최초의 시유도기 생산지로서 한국 도기문화의 중심지였음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도기박물관이다. 이화여대 박물관이 1986년과 1996년 1,2차에 걸쳐 구림도기가마터를 발굴, 그 역사성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영암군이 폐교가 된 구림중학교를 매입, 1999년 개관하였으며 이후 2008년 현재의 건물로 신축하였다. 건축면적 3,027㎡ (916평), 1,2.3층 전시실 1,119㎡ (345평), 공방체험실 311㎡ (94평), 판매장 76㎡ (23평) 등을 갖추고 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월요일 휴관한다.
대표적인 유물은 8~9세기 국가사적 338호 구림도기가마터 출토유물인 통일신라시대의 광구편병 (입넓은 납작병)과 유병(주판알모양유병) 도기인화문골호을 비롯해 5세기 마한의 옹관, 고려시대 도기대호 (물결문), 도기장신호 (음각 버드나무·오리·연잎·대나무문), 조선시대 도기매병 (음각 버드나무·새·물고기문), 영암성풍사지 5층 석탑(보물 1118호)에서 발굴된 고려 청자사리합 및 탑지석 등이 있다.

문의 : 061-470-6851.

맛집

▶목원가든=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677 ( 061-471-0404)
목원가든은 정원이 아름다워 첫인상부터 좋다. 안으로 들어가도 고향집 대청마루 같은 넓은 홀이 손님을 맞는다.
식당 경력 20여년이 넘었는데 간결하면서도 꼭 먹을 것만 나오는 양반집 밥상 같다. 반찬얘기부터 꺼내자면 시지 않은 묵은지와 시원한 물김치, 양파김치, 여기에 맛깔스런 송어젓과 깻잎, 그리고 다른 식당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쑥갓에 두부를 짓이긴 나물과 호박죽, 게 튀김이 깔끔하게 올라온다
대표메뉴는 참게+메기매운탕 오리요리, 장어탕 등이다. 참게 메기탕은 40,000원(2~3인) 45,000원(3~4인) 55,000원(4~5인)이며 오리코스 50,000원, 오리불고기, 오리훈제 , 오리백숙 50,000원, 장어탕 8,000원 등이다.
영암읍에서 군서 쪽으로 가면 면소재지 조금 못 미쳐 도갑사 입구 로터리가 나오는데 직진하면 소재지이고 왼쪽은 도갑사 가는 길, 그리고 우회전하여 300m쯤 가면 들판 가운데 식당 간판이 보인다.
▶하눌타리= 군서면 도갑리 133번지 (061-471-1171)
영암 덕진면 출신 안주인이 10년째 운영하는 식당이다. 도갑사 입구에서 장사를 하다가 이곳으로 옮겼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데다 자신도 음식에 취미가 있어 식당문을 열었는데 두 분 모두 ‘합격점’을 주었다고 한다. 주 메뉴는 닭요리와 오리요리다. 다슬기 닭백숙, 다슬기 오리백숙이다. 다슬기 육수를 내 백숙을 만들 때 사용하는데 닭이나 오리에 단백함울 더해준다. 백숙은 1마리에 65,000원, 닭볶음과 오리볶음은 5만원이다. 시간이 많이 가기 때문에 1시간 전에 예약해야 기다리지 않고 즐길 수 있다.
본 요리의 밑반찬은 계절에 따라 김치와 갓김치 깍두기, 열무 등이 나가며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전식으로 감자샐러드, 톳나물, 묵, 부로콜리 등이 나와 입이 심심치 않다.

글 : 지형원 (문화통 발행인) / 사진 임철진 (사진작가)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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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영광 군남면 동간리21. 함평 대동면 상옥리 옥동
20.순천 주암 죽림리·주암리19.나주 문평면 오룡리
18.나주봉황 철야마을17.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
16 .해남읍 연동15.광산 임곡 너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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