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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8일(화요일)

9.화순 능주 월곡·쌍봉 마을/

학포 양팽손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함양했던 달아실
쌍봉에 학포당 짓고 恨서린 삶을 시와 그림으로 달래
2016. 09.10(토) 06:06확대축소
화순 능주의 달아실(月谷)은 이름부터 정겹다. 달아실은 달이 비추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훤한 낮에도 달이 떠있을 것만 같다. 능주읍이나 도곡에서 운주사 쪽으로 가다가 화순CC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건지산 자락 뒤에 조용히 숨어 있다.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아 6.25의 참화 때도 큰 피해가 없었다는 살기 좋은 동네다.

이곳이 바로 조선 초기의 선비이자 문인화가였고 서슬 퍼런 세상에 정암(靜菴) 조광조 (趙光祖, 1482~1519)의 시신을 거둬 제사했다는 절의(節義)의 스승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마을이다. 달아실은 1440년대 중반 학포의 조부인 양담(梁湛)이 이거해 오면서 제주 양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학포의 탄생에 관해서는 월곡이라는 설, 쌍봉이라는 설, 광주 이장(남구 양과리)이라는 설 등이 있다. 월곡과 쌍봉 두 곳 모두 능주현에 있고 20,30년씩을 지낸 곳이라는 점은 맞지만 탄생지에 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학포의 조부와 부친은 광주시 남구 양과리에서 살았음이 확실하고 어린 시절 쌍봉에서 자란 것으로 보아 쌍봉에서 태어났거나 양과리에서 태어나 쌍봉으로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후 월곡으로 이사해 젊은 시절을 지냈으며 4년여의 짧은 벼슬길에서 물러나서는 다시 쌍봉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 현재의 남구 양과리에는 제주 양씨들의 중시조를 배향한 충덕사가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문화通이 특집 시리즈로 계속하고 있는 ‘전남의 마을, 1박2일’ 코너 이번호에서는 학포가 오랫동안 살았던 월곡과 쌍봉을 한마을 스토리로 엮어 답사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쌍봉리에는 학포가 어린 시절 공부한 쌍봉사가 있고 학포가 벼슬길에서 돌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던 학포당, 그리고 조광조의 시신을 운구해 장례한 묘터, 홀로 죽수사를 짓고 제사를 모셨던 증리 서원터와 면암 최익현 친필로 새겨진 ‘정암 조선생 서원유지추모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찾는 이가 없어 초라하다. 서원터가 있는 증리의 ‘조대감 마을’은 한때 40여 호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다섯 가구만 남았다. 여기에 있던 서원은 세월이 지나면서 퇴락했고 훗날 화순 한천으로 옮겨졌다가 훼철되었다. 이후 다시 월곡에 세워졌다가 한양 조씨 주도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정암 조광조와의 각별했던 우정과 절의

월곡이나 쌍봉이나 모두 학포로 인하여 유명해진 마을이니 먼저 학포 양팽손에 대해 알아보자. 본관은 제주다.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라 했는데 호는 스스로 붙인 자호다. 고려 말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77~1392)의 학문과 사상을 흠모하여 ‘포은을 배운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할아버지는 사복시의 으뜸벼슬인 증 사복시정 담(湛)이고, 아버지는 증 승정원 좌승지 이하(以河)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며 집 가까이에 있는 쌍봉사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5세 때 벼락이 쳐도 도망하지 않는 비범함을 보였다. 7살 때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차지해 신동으로 불렸다. 12세 때까지 특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월곡으로 이거한 이듬해인 15세 때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1459-1547)을 만난다.

송흠(宋欽,1459~1547)은 영광출신으로 호남사림의 아버지로 불린다. 지극한 효성과 삼마태수(三馬太守)의 검소함으로 이름이 높다. 학포는 송흠의 조카인 송순(宋純) 나세찬(羅世纘) 등과 함께 송흠 문하에서 공부하며 바른 뜻을 세웠다. 19세 때인 1506, 중종1년) 운명의 조광조를 용인에서 만났고 이듬해 봄 나란히 생원시에 합격했다. 가을 예부시에도 응시했는데 아전이 시제를 전해주며 뇌물을 요구하자 크게 꾸짖고 돌아와 버렸다.

10여년이 지나서 29세 때에야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 성균관 전적, 공조 좌랑, 형조 좌랑, 사관원 정원을 지냈다. 도교의 제사를 지냈던 관청인 소격서(昭格署) 철폐를 주장했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소두란 연명으로 올리는 탄원서의 맨 앞에 서명하는 것을 일컫는다. 기묘사화는 중종 14년 남곤 홍경주 등 훈구파가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류를 숙청한 사건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때의 폐정을 척결하고 새로운 인재를 뽑는 등 개혁적 정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훈구파가 중중반정의 공훈자를 117명이나 선정하자 공이 없는 76명의 재산과 노비를 국가로 귀속시키는 이른바 ‘위훈삭제’ 사건이 발생했다. 훈구파와 신진사류들의 싸움에 환멸과 위협을 느낀 중중은 결국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을 몰아내고 급기야 가시울타리에 가두거나 사약을 내렸다.

이 무슨 운명일까? 학포가 기묘년인 중종 14년 12월 삭직이 되어 능성의 옛집(월곡)으로 돌아와 보니 정암이 능주에 유배되어 관노(官奴) 문후종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광조가 있는 능주읍 남성리와 학포가 있는 월곡리와는 10여리에 불과하다. 때가 12월이라 삭풍이 코끝에 찼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조광조는 큰 위안이 되었다. 이후 거의 매일 만나서 경론을 논하다 25일 만인 1519년 12월 10일 사사(賜死)되는 운명을 맞는다. 정암은 사약을 받고 절명시를 남긴다. 임금사랑과 나라걱정이 절절하다.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 우국약우가(憂國若優家)
백일임하토(白日臨下土) / 소소조단충(昭昭照丹衷)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했도다
맑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니
거짓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

서로 믿고 의지했던 정암의 죽음 앞에 학포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장남 응기(應箕)와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 (梁山甫,1503~1557)와 함께 시신을 거둬 섣달의 매서운 눈보라를 헤치고 60리 먼 길 쌍봉리 뒷산 증리에 가묘를 썼다 이듬해 선영이 있는 용인의 심곡으로 운구했다. 당시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목숨을 내놓는 각오가 있어야 했기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학포가 결행한 것이다 이 일로 장남 응기는 벼슬길이 막혔고 정암의 제자였던 양산보는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소쇄처사를 자처하며 일생을 보냈다. 양산보는 양팽손의 재당질이다.

조광조는 생전 양팽손을 평하기를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 비 개인 뒤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 밝은 달이라, 인욕이 깨끗이 씻어진 사람이다.”고 하였다.
조광조선생 유허비

정암 조광조가 유배 와서 죽음을 맞이한 능주면 남정리에는 사당과 적려유허비(謫廬遺虛碑)와 영정이 걸린 영각, 초가로 된 관로 문후종의 집, 그리고 강당인 애우당(愛憂堂)이 있다. 적려란 유배나 귀양을 일컫는데 적려유허비는 사후 149년이 지나 1667년(헌종 8년)에야 능주목사 민여로가 송시열의 비문을 받아 세웠다.
애우당은 절명시 1.2행에서 따온 것으로 이 곳에는 절명시와 적중거중시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학포는 훗날 기묘사화를 돌이키며 이렇게 썼다.

“이 분(조광조)과 함께 죽어 충암(忠菴 金淨) 같는 분들을 지하에 가서 만나보지 못함이 애석하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평일을 서로 다짐하던 사이라고 하겠느냐”

학포는 정암의 시신을 숨겨 증리 산자락에 장사하고 그 언덕 아래에 죽수사(竹樹祠)란 사당을 지어 홀로 봄·가을에 제사했다. 학포는 2년여 동안 월곡과 쌍봉을 오가다가 학포당이 완성되자 아예 쌍봉으로 이사해 이곳에서 생을 마친다. 학포는 서당에서 먼 곳의 제자들을 받지 않고 집안의 아이들과 동네 아이들에게만 공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정암의 일로 그들이 화를 입을까 염려함이었다.

한편 정암을 추모하기 위한 죽수서원이 선조 3년(1570)에 한천면 모산리에 세워졌으며 그해 죽수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8년(1630년) 학포를 추가로 배향하게 되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71년 능주 유림과 제주양씨 후손들이 월곡에 복원하였던 것을 1983년 한양조씨들의 주도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죽수서원에는 ‘정암조선생 학포양선생 죽수서원 유지추모비’가 남아 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지적한 대로 양팽손과 조광조의 우의는 너무 깊고 조광조가 능성현으로 유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래서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에도 두 분이 나란히 배향되어 있다.

학포 부조묘와 300년 역사의 조선시대 한옥
학포 부조묘
달아실은 지금도 제주양씨들의 자작일촌이다. 지금도 40여호가 살고 있는데 너덧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양씨들이다. 나머지 너덧 집도 외손들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친척인 셈이다. 부근에는 풍산홍씨, 하동정씨, 여흥 민씨가 주로 살고 있다.
달아실에 들어가면 맨 먼저 ‘월곡리(月谷里)’라 새겨진 커다란 돌기둥이 길손을 맞는다. 마을의 형국이 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벼루굴 (성곡) 버드나무골(류곡) 양정마을 등 3개 마을로 이뤄졌다. 마을 형태는 달이요 뒤의 소나무는 구름 같아 동네가 구름에 떠 있는 것 같다.

큰 선비가 살았던 마을답게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400여년 역사의 한옥이 몇 채 있고 효자정문이 남아 있다. 제주양씨 종가 바로 곁에 후손들이 학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부조묘(不蔿廟)가 있다. 부조묘란 방안제사의 위패를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 묘로써 보통 4대가 지나면 산에서 묘제를 지내나 그대로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1631년(인조 9)에 창건되었다가 고종 때 훼철된 것을 1947년 후손들이 복원했고 1990년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되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이며 강당, 경장각은 5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바로 곁에는 양씨 종가가 자리하고 있는데 학포의 16대 종부 문순식(81) 할머니가 지키고 있다.

부조묘 입구에는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양동호 양승수 등 제주 양씨 문중의 가옥이 있어 반촌의 위상을 느끼게 한다. 18세기 말의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로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양동호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52호)은 긴 네모꼴로 담장을 두르고 뒤쪽에 ㄷ자형 안채를 배치하고 앞쪽에 사랑채를 두었다. 안마당과 사랑채는 담장 없이 그대로 이었고 중문 칸을 사랑채 왼쪽에 만들었다. 중문 왼쪽 곁에는 세로로 헛간채를 두어 안마당의 남쪽을 막았다. 그 앞은 중문 밖으로 샘이 있고 담장을 따로 돌렸다.
양동호 가옥


양회두 가옥(화순향토유적 제6호)은 학포의 8대 손인 양명구(1710~1794)]가 1800년대 말 건립했다. 그는 대지주로 양동호·양승수 가옥 등의 건립에도 관여하였다고 전해진다. 안채와 그 전면에 20칸 규모의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행랑 겸 문간채는 솟을 대문이 있는 20칸 규모의 큰 맞배집이다. 살림집에서 잘 볼 수 없는 ‘H’자형의 독특한 안채, 그리고 20여 칸의 긴 행랑채로 구성돼 문화재로 지정된 양동호 가옥, 양승수 가옥 못지않은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양승수 가옥(중요민속자료 154호)은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원래는 양승수 가옥이 안채였고 좌측에 있는 양재국 가옥은 사랑채였다. 현재 두 가옥 사이에는 일부 담장이 둘러져 있어 별개의 가옥이 되었다. 안채인 양승수 가옥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좌·우측 1칸은 반 칸 정도 전후로 돌출된 ‘H자’형으로 되어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을입구에 있는 효자정려는 학포의 현손 위남(渭南)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많은 의병장과 애국지사 배출
양팽손은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그의 행장만으로 보면 선비의 집안인 것은 확인할 수 있으나 권문세족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양씨 문중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양일태 선생(75)은 “할아버지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주로 의병이나 독립운동을 하는 외로운 투쟁의 삶이었다.”면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그러하듯 정계나 경제계 등에서 크게 활약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말한다.

장남 응기(應箕)는 병절교위를 지냈으며 월곡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부친과 함께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차남 응태(應台)는 동래참의와 예조참의를 지냈는데 중국의 사신으로 갔다가 변을 당했다. 모산의 양씨들의 그의 후손이다. 3남 응정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송천집을 남겼으며 나주 박매에 옮겨 살았다.
4남 응필(應畢)은 건원릉 참봉을 지냈는데 학포를 수행하여 학문이 깊었으나 빛을 보지 못했고 후손들이 쌍봉에서 살고 있다. 5남 응덕(應德)은 통덕랑 참봉으로 보성 박실로 이사하여 살았다. 6남 응국(應國)은 참봉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진도에 살고 있다. 7남 응둔(應遯)은 문장과 도덕이 뛰어났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당곡은사(塘谷隱士)라 불렸다. 후손들은 이양면 오류촌에 살고 있다. 8남 응명(應命)의 아들 산숙(山淑)은 진주병사로 임란때 진주 남강에 돌을 안고 투신, 순절했다. 후손의 세거지는 여수 삼일면이다.

여기서 잠시 제주 양(梁)씨에 대해 알아보자. 원래 제주 양씨는 양을라(良乙那) 신화에서 출발한다. 단군과 동시대다. 이후 양탕(梁宕)은 광순사(사신)로 신라에 와서 ‘성주왕자’ 란 칭호를 받고 량(良)을 양(梁)으로 개칭하게 된다. 이후 신라 신문왕 때 한라군을 지낸 순(洵)이 제주 양씨란 관(貫)을 받았다. 그러나 제주양씨 족보상의 1세는 고려 명종 때의 유격장군이었던 양보숭(梁保崇)이고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1488~1545)은 그의 11세손이다.

학포는 강직하고 올곧은 선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 가운데는 의병이나 독립운동가가 많다.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일제치하에서 의병으로 나서거나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3남 양응정의 후손들에게서 뜨거운 절의가 발견된다. 둘째아들 양산룡은 임란의병에 참여했고 정유재란 때 삼향포에서 왜적을 만나자 자결했다. 셋째 양산숙은 임란 때 형제들과 김천일 장군을 도와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강화도에서 김천일장군의 밀서를 가지고 의주의 선조 임금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진주성을 사수하다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과 남강에서 순절했다.

양산숙의 아내 광산이씨는 절개를 지킨 절부(節婦)로 삼향포에서 왜적을 만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종들이 건져냈으나 왜적에 발각되자 자결했는데 시신을 거둘 때 은장도가 그대로 목에 꽂혀 있었다고 전한다.
응정의 넷째 양산축은 임란 때 형들이 의병에 참가하자 부모봉양을 맡았는데 정유재란 때 무안 몽탄 부근의 삼향포에서 어머니 죽산 박씨를 껴안고 자결했다. 응정의 딸은 성균관을 지낸 김광운의 아내로 남편이 강화도에서 전사하자 아들 김두남에게 의병에 나가도록 독려하고 마을 청년 40명을 설득하여 의병에 내보냈다. 피난 중에 왜적의 배를 만나 다른 부녀자들을 구하기 위해 적선에 올라 피난선이 멀리 떠난 뒤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양산축의 부인 장흥고씨도 남편과 시어머니, 두 동서가 물에 몸을 던지자 바다에 뛰어 들기 위해 배에 올랐다. 두 여종이 임신한 몸으로 목숨을 버리면 대가 끊어진다고 만류해 갈대밭에 숨어 있다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왔다. 그가 바로 고경명의 손녀이며 양만용의 어머니다. 양만용은 수은 강항의 제자로 남곽 박동설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과거에 급제해 시강헌설서로 임명돼 소현세자를 가르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옥과 현감 이흥발, 순창 현감 최온 등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을 모아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고하자 어머니 고씨 부인은 “대대로 녹을 먹은 후손으로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고 격려했다.
양만용은 1637년 정월 초사흘 여산 못 미쳐 시산에 도착하여 시를 읊다.

오랑캐를 평정함에 계책이 없고 긴 갓끈만 있어/ 칼을 어루만지며 한밤중에 심기가 편치 않네/ 생각건대 남한산성 머리위의 달은/ 의로운 신하의 한조각 충성을 비추리라

양만용은 이흥발·최온 등과 합세해 의병들과 청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호남에서 올라오는 의병을 막기 위해 충청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는데 양만용은 관군을 제쳐놓고 산골짜기의 청나라군사를 무찔렀다. 그러나 왕자가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합락되고 인조가 항복했다는 급보를 듣고 의병들을 고향으로 보낸 뒤 자신은 필마로 입금께 달려가 피눈물로 대의를 밝혔다. 훗날 사헌부집의를 거쳐 영국원종이등공신이 된다. 이후 삼사 교수제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곳간을 허물어 백성을 구휼하다 54세에 생을 마쳤다.

송천공 응정을 중심으로 3대에 걸친 후손들의 충효열에 의해 광주시 광산구 박산마을 산기슭에 양씨삼강문(광주지방기념물 제 11호)이 세워졌다. 삼강문이란 충신과 효자와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旌門)이다. 충민공 양산숙 장군을 비롯해 제주 양씨 일가 7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635년(인조 13년) 생원 홍탁 등이 상소해 왕명으로 세운 것이다. 삼강문에는 충민공과 효자 두 사람, 열려 두 사람, 절부 두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는 나주 회진 임씨 문중으로 출가한 양산룡의 딸 (임한의 부인)의 위패도 모셨으나 구진포 삼거리에 따로 정려각이 세워진 뒤 옮겨졌다.
넷째 응필의 아들 산욱은 임진왜란때 김천일과 함께 창의하여 본주 유의장으로 의병 500명을 모병, 단양역에서 김장군에게 인계하고 돌아와 비분강개하여 시를 지었다.

총섭요간보인한(摠攝腰間寶肅寒)
참현평수길비난(斬縣平秀吉非難)
공성당각마애석(功成當刻磨崖石)
풍우천년자불만(風雨千年字不漫)
예리한 보검을 허리에 차니
풍신수길 효수하여 평정하기 쉽겠네
공을 마애석에 각하면
천년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으리

또 산욱의 둘째 아들 제용은 양만용과 함께 병자호란때 창의했고 산욱의 장손 지남(砥南)은 스승 안방준이 병자의병에 나서자 서찰과 서책을 요로에 전달한 사람이다. 따라서 산욱-제용-지남으로 이어지는 3대가 모두 창의한 것이다. 한말의 양회일(梁會一, 1856~?)은 그의 직손으로 1906년 최익현의 순절소식을 듣고 울분에 겨워 가산을 처분하여 3천량의 균자금을 만들고 의병을 모았다. 양열묵 (송사 기우만의 제자)과 동지를 모아 창평의 고광순, 장성 김삼연 등과 연합하여 싸웠다.

양회일과 동생 중봉과 함께 형제의병으로 활동했으며 도마치 전투에서 7명이 잡혔는데 회일은 재판에서 ‘이등박문과 오적을 죽이는 것’이라고 항변해 15년형을 받고 지도로 유배된다. 1907년에 풀렸다가 이듬해 다시 헌병대에 의해 구금되자 시를 남기고 죽었다. 양회일의 동지들은 의병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참모장 양열묵은 고광순과 피아골에서 순국했다. 양회일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쌍산의소를 중심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현재 군기제조소지, 의병성지, 막사터 등이 남아 있다. 쌍산의소란 한말의병의 창의소로 이양면 계당산 일대가 쌍산, 쌍봉, 쌍치라 불렸던 데서 연유한다.

지강 양한묵(1862~1919)은 학포의 12대손으로 독립투사다. 능주에 압송된 동학농민군을 구출했으며 윤효정 이준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창립하고 1909년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과 관련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2월 27일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 독립선언식에 참석해 옥고를 치렀다. 33명의 민족 대표 중 유일하게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애국지사 양재해(梁在海, 1855~)는 학포의 13대손으로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항일 12의인결사대를 결성했다. 1906년 순창에서 패전하고 12의인(義人) 전원이 체포돼 헌병대에 끌려가 장형 100대를 맞고 평생 불구로 살았다. 면암이 대마도로 추방되자 슬픔을 가누지 못해 이별시를 남겼다. 유고 화은집 4권이 전한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재빈병지(各在貧病地) / 회소별상다(會少別常多)
우동남관집(偶同南冠楨) / 상망가내하(相望可奈何)
각기 어렵고 빈곤한 처지에서
만남은 잠깐인데 이별은 오래구나
남쪽(고향)을 향해 갓끈을 메어 잡고
서로 어찌할까 바라보네

애국지사 양재홍(1888~1944)은 학포의 13대 손으로 광복단에 입단, 가산을 매각 해외 독립단체에 제공하고 옥중 동지를 구출했다. 1918년 능주 주재 헌병대에 체포돼 12년 징역형을 받고 1927년 가석방되었다. 매하(梅下) 양태승(梁泰承, 1889~1955) 학포의 15대손으로 민족 교육운동가다. 고창고보를 설립,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이승훈이 평안도 오산에 세운 오산고등보통학교와 쌍벽을 이뤄 남 고창 북 오산으로 불렸다. 최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

학포당 초당 짓고 시와 그림으로 보내
학포는 벼슬길에서 물러나 어린 시절을 지낸 쌍봉으로 돌아와 칩거하며 시와 그림으로 세월을 보냈다. 34살의 나이에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에 작은 초당을 짓고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춘산 계은사(春山溪隱辭)’를 지어 자기 심중을 표현하였다.

草屋初開江上山 (초막집을 비로소 강 위의 산에 지어놓고)
江干日日釣魚還 (강가에서 날마다 고기를 낚아온다.)
平生擅有玆江勝 (평생 동안 이 강의 승경을 독차지하니)
長謝天公早疱閒 (하늘이 주신 한가로움에 길이 감사한다).

쌍봉은 화순에서 보성으로 가다가 쌍봉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학포당과 정자, 김씨 충신각, 쌍산의소 기념비, 훗날 양씨 문중의 각종 유물과 기록들을 현창한 양재경의 비석 등이 있다. 바로 위편에 쌍봉사가 있고 쌍봉사를 지나 오른쪽으로 향하면 조광조 유허비를 만날 수 있다. 학포는 인생 후반기 25년을 떠받쳐준 학포당에서 많은 문우들과 교유하고 서화를 즐겨 조선 초기의 선비화가로 우뚝 섰다.

학포당
학포당은 1521년 이양면 쌍봉리에 지은 서재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원래는 초당이었으며 이후 유실되자 1922년 14대손 회락이 중심이 되어 중건했다. 뒤편에 면암 최익현이 쓴 ‘학포선생 학포당 유지비’가 있다. 현액은 보성사람 김치주가 썼으며 주련은 학포가 7살 때 지은 ‘천지일월’의 제목에 따라 지은 시와 전라감사가 지어주었다는 답사를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겼다.
이곳에 있는 은행나무 높이는 35 m이고 둘레 8 m 수령(樹齡)500여 년으로 학포당 창건 후 둘째 아들인 응태(應台)가 심었다고 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8개의 굵은 가지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데 후손들은 이 여덟 가지를 학포의 여덟 아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92호로 지정되었다.

양팽손은 말년에 학포당에 머물며 작품을 통해 시대정신을 표출하였다.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는 현실정치에 비애와 한을 그림으로 한 풀이 했던 것이다. 그래서 묵죽도에서는 충절과 처절한 심정을 읽게 된다. 특히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그의 묵죽(墨竹)은 시대를 반영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림에 열중하면서 당시 유명한 사람들과 교유했다. 대나무와 포도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영천자 신잠(1491-1554), 강아지를 잘 그렸던 두성령 이암(1499~) 호랑이 그림의 사처 고운(1495~) 원숭이 그림의 원정 최수종 (1487~1521), 영모화로 유명한 충암 김 정 등이다.

학포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산수, 영모화, 사군자, 기명절지 등의 많은 작품을 제작했을 것으로 보이나 유전작이 10점 내외에 불과해 본격적인 작품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학포가 활동한 16세기 전반은 15세기 회화를 계승하면서 새로운 양식이 형성된 과도기로서 산수화에 안견의 화풍이 압도하였고, 구도나 필치에서 한국적인 특색이 더욱 뚜렷한 시기였다. 양팽손은 호남 화단이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학포는 화순동복의 소상팔경 등 지방의 명승지의 배경을 묘사하고 원체파의 화풍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일본의 승려인 손카이(尊海)가 1539년에 가져갔다고 알려진다. 일본인 미술사학자 관야정(關野貞) 박사는 ‘조선미술사’에서 양팽손의 작품으로 단정한 바 있다. 그러나 국내 학계예서는 최근 ‘소상팔경도’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등이 학포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해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문집으로 학포유집 2권이 전해지고 있다.

쌍봉에는 학포당, 풍영정 등 남아
절해전신도비(좌) 절해후신도비(우)
쌍봉마을 입구에는 학포의 신도비(후)와 풍영정(風詠亭), 김해김씨 충신각(전남도 문화재자료 59호)이 있다. 풍영정은 마을의 동각이지만 옛선비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풍영정 처마에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썼다는 ‘광풍제월(光風霽月)’ 현판이 있다.
정자 안쪽에는 ‘제구곡삭은애(第九曲削銀涯)’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쌍봉천 12곡마다 보(洑)가 있는데 풍영정 앞에 있는 아홉째굽이가 삭은애라는 뜻이다.

풍영정 옆에 있는 충신각은 선조 26년(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김인갑과 그의 아우 김의갑, 그리고 병자호란 때 전사한 김시엽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 김시엽은 김인갑의 아들로 인갑과 의갑은 학포의 처조카다.
학포는 학포당에서 57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1544년 주군이면서 인생의 동반자인 중종이 죽고 7월 에는 그의 아들 인종이 해를 걸러 승하하자 정신적 지주가 무너졌다는 슬픔과 간신배에 대한 나라걱정으로 병을 얻어 이듬해 8월 18일 아침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고종했다.

그는 죽음을 예견한 것인지 여덟 아들로 부터 생일상을 받고 술잔과 함께 만세수를 비는 시를 받아 즐겼다.
둘째 응태는 “아버님이시여 어머님이 수하시고 강녕하시며/ 형이며 아해 화목하고 즐거우니/ 복을 빌어 자손이 창성하리로다” 했고 셋째 응정은 “시절은 태평한 성대요/ 보모는 천세만세라/ 형화제락 처자하면 그 후에 / 그 남은 부귀공명이야 다시 구하여 무엇하리” 란 시를 올렸다. 일곱째 응둔은 “만수산 상상봉에 만수샘이 있더이다/ 그 물에 빚은 술은 만수주라 하더이다/ 이 잔 잡수시고 또 한 잔 잡수시면/ 만세만세 수만세 하시리다” 라고 읊조리며 술잔을 바쳤다.
한세상을 시와 그림으로 풍류했던 선비답게 흔연스럽게 술잔을 받으며 떠남을 준비했던 것일까? 학포의 묘소는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중조산 중턱에 있다. 묘소로 가는 입구에 제각인 영모재가 있고 산길을 따라 30m쯤 올라가면 무덤가는 길을 알리는 학포천(學圃阡)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영모재 앞에는 학포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란 말 그대로 신이 다니는 길을 일컬으며 종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에게만 세울 수 있는 비이다. 그러나 학포는 벼슬이 정5품 홍문관 교리에 그쳐 신도비를 세울 수 없었다. 여기에 세워진 신도비는 자식을 잘 두어 세운 신도비다. 3남 응정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삼품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자 선조 11년 학포의 벼슬이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우게 된다.

후손들은 이를 절혜 전 신도비라 부른다. 이후 기묘명현들에게 내려진 시호가 학포에게도 내려지게 되는데 호남유생들의 3차에 걸친 청원으로 헌종 8년 1842년 정2품 이조판서인 정경(正卿)으로 증직되고 철종 14년(1863)에 혜강((惠康)이란 시호가 내려져다. 이에 후손들이 벼슬의 증작과 시호를 받은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고종 34년(1897) 연재 송병선이 찬해 쌍봉마을 입구 풍영정 옆에 세웠다. 절혜 후에 받은 신도비라 하여 절혜 후 신도비라 부른다.
학포는 화순 월곡의 부조묘와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 순천 용강서원 (증손 신용) 죽수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학포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한 사람 재경
학포가 벼슬에서 물러나 스물다섯 해 동안 글과 그림으로 살았기에 많은 작품이 있을 것이나 전해지는 것은 극히 적다. 이는 학포 뿐 아니라 임란이나 정유재란 전후의 사정이 다 비슷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 나마 자료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뜻 있는 후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남의 고산윤선도 기념관에 남앙 있는 유물과 유적들은 종부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눈물겨운 결실인 것과 같다.

양씨 문중에서는 학포의 13대손 재경(在慶, 1859~1918)이 이 같은 일을 주도하였다. 우선 상·하권의 유고문집을 만들었고 초당이었던 학포당이 초라한 모습만 남게 되자 이를 안타까이 여겨 ‘학포 양팽손 학포당 유지추모비’를 만들어 세웠다. 학포당이 중건한 뒤에는 이 비를 당의 뒷담 밑으로 옮겨 놓았다. 글은 한말 선비요 우국지사였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이 썼다.
학포당을 둘러보고 있는 후손들

재경은 유지비 말고도 제각인 영모정 뒤쪽에 묘 가는 길을 안내하는 바위에 학포천(學圃阡)이라 각을 했다. 또 이조판서로 가증되고 혜강으로 시호가 내려진 경위를 적은 절혜 후 신도비를 쌍봉마을 입구 풍영정에 세운 것도 재경이다.
학포당에서 남겨진 유물들은 실로 30여권이 넘는다고 알려지는데 후손들이 정유재란 피난길에 삼향포에서 왜적을 만나 자결하는 바람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학포의 현손 세남(世南)이 흩어져있던 선조들의 유품을 수습하여 종가에 전했는데 훗날 시문을 중심으로 ‘학포집’으로 간행하였다. 문집은 모두 5차례에 걸쳐 간행되고 2차에 걸쳐 국역되었다.
재경은 쌍봉에 한후당 (寒後亭)이란 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길렀으며 송석정, 영벽정 등에는 그의 시문이 남아 있다. 현재 풍영정 정자 안쪽에 있는 ‘제구곡삭은애(第九曲削銀涯)’란 시도 재경이 쓴 것이다.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은 둘째 아들 희철이 판각하여 붙였으나 세월이 흘러 희미해지자 손자 경승(87)이 새로 각하여 걸었다.
재경은 회백, 회철, 회국, 회숙 등 4남을 두었는데 쌍봉의 양씨들의 대부분 그이 후손들이다. 5부자(父子)의 업적을 기리는 비가 마을 입국에 세워져 있다.

쌍봉12곡 가운데 9곡인 ‘삭은애(削銀涯)’을 옮긴다.
은색청천경리간(銀色晴川鏡裡看)
한정돌올포당안(寒亭突兀圃堂安)
망경귀로고주하(望京歸路孤舟下)
화도기암진급단(化棹奇巖鎭急湍)
은빛 맑은 내 거울 속을 보는 듯
한풍정 우뚝솟고 학포당은 편히 자리하였네
망경하고 돌아온길 고주에서 내리니
노가 된 기암 급한 여울 진정시키네

이양면 강정리 예성산 아래 지석천변에는 송석정이란 정자가 있다. 이는 학포의 증손으로 선조때 훈련원 첨정을 지낸 양인용이 광해군 등극으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유배시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1613년에 지은 정자다.
송석정(松石亭)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중앙에 온돌로 된 재실이 있고 주위는 누물마 회랑으로 되어 있다. 정자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나무와 괴암이 절벽 위에 있어 전망이 좋다. 송석정 아래에는 마치 해자처럼 10여m가 넘는 넓이의 연못이 둘러 있었으나 지금은 연못처럼 되어 있다.

묵죽사계도 양회대 소장
송석정에는 양인용 원운의 시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쓴 편액과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우산 안방준(1573~1654)의 시액, 그리고 광주 학생 운동의 주역인 송홍(宋鴻), 구한말의 한학자 효재(曉齋) 양재경(梁在卿)의 시액 등 50여 인의 시문이 전하고 있다. 화순군 향토유산 제 15호로 지정돼 있다.
한편, 학포 양팽손이 절의의 선비로서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의병과 독립운동가 등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이 많다. 현세에서도 조용하고 각자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칭 출세했다고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구한말의 유명한 학자로 심암 양계묵(12대)이 있고 참의원 양회영(14대), 국회의원 양회수(14대) 양형일(14대) 등이 있다. 법조계에서는 양회경 대법관(14대) 양동관 가정법원장(16대) 양회철 판사(14대) 양동학 판사(16대) 교육계의 양재호(13대) 양동률(16대) 양채열(17대) 전남대교수, 조선대 양정렬(17대) 광주대 양성렬(17대) 교수, 경제계의 건설협회 광주시 회장과 전남대총동창회장을 지낸 양동순(16대), 여수교통 양동일 회장(16대) 언론인 양동균(16대), 그리고 양득승 종회장(15대) 등이 있다.
최근 더민주 전당대회에서 여성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양향자(15때)도 후손이다.

글 지형원 (발행인) / 사진 임철진 (사진작가)
▲ 고인돌 마을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인돌군이 있는 곳은 전북 고창과 전남 화순, 인천 강화군이다. 가장 큰 고창 고인돌 마을은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에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고 있다. 크게는 30톤까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이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고인돌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운주사(雲住寺) =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하며 송광사의 말사다. 창건에 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 보물 제797호인 석조불감, 보물 제798호인 원형다층석탑, 부부 와불(臥佛) 등이 있다. 부부와불은 천불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전한다
▲쌍봉사(雙峰寺)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있다. 송광사의 말사로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창건하였다.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탑비가 있고, 보물 제163호였던 대웅전이 있다.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전은 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로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 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 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가 1986년 중건됐다.


▲양동호 가옥 한옥스테이
(010-3601-2236)
400년 역사의 양동호 가옥을 새주인 조형식씨가 리모델링하여 지난해부터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과 현대식 씽크대 등을 새롭게 설치해 아무런 불편이 없다. 600여 평의 공간에 건평은 60여 평으로 정원이 넓고 고즈넉하다. 한국관광공사로부터 우수한옥체험숙박시설 인정도 받았다. 안채에는 방 3칸, 사랑채 방 2칸이 있는데 하룻밤에 15만원씩이다. 통째로 빌릴 경우 조정이 가능하다. 식사는 불가능하나 주변에 골프장을 주변으로 2,3분 거리에 좋은 식당들이 많이 전혀 불편이 없다. 또 현재 화순군이 숲 테마파크 조성을 추진하고 있어 연내에 수영장과 산책로 운동시설 등이 갖춰지게 된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마을에서 공동식당을 운영할 계획이다.


▲은성가든(화순군 도암면 은성리 6번지, 061-373-9230)
보성 미력에서 손맛 좋기로 유명한 보성댁이 20년 전 이곳에 식당을 개업해 현재는 딸이 이어받았다. 큰며느리는 광주시 서구 풍암동 동부센트레빌 앞에 ‘은성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운영한다. 대표 메뉴는 돼지족발이고 묵은 김치 주물럭과 청국장 백반 등 3개다. 이 집에서 쓰는 모든 식재료가 국산이다. 청국장도 직접 집에서 띄워 만들고 김치도 3,4년씩 저장해 사용한다. 대표 메뉴인 돼지족발은 손이 아홉 번 가는 작업이다. 국산 돼지족발을 깨끗이 씻어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로 고아낸다. 이집 족발맛이 졸깃한 것은 익히고 식히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소스에 대해서는 비밀이란다. 화순CC와 중흥CC로 가는 길목에 있어 골프장 이용객들이 주로 찾는다. 입소문이 전국적으로 나서 어쩔 때는 기다려할 정도다. 낮에 족발을 먹고 골프치고 따로 사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돼지족발은 따스할 때 먹으면 부드러운 맛을 즐길 수 있고 식혀서 먹은 졸깃한 맛이 일품이다. 돼지족발 특(4인기준) 45,000원, 대(3인) 35,000원, 소(2인) 25,000원이고 묵은지주물럭은 1인분에 11,000원, 청국장 백반은 1인분에 7,000원이다.
▲순이네 밥상(화순군 도암면 월곡리 462, 061-373-5255)
도곡에서 ‘순이네 유기농쌈장’이란 식당을 운영했던 안주인이 잠시 쉬었다가 지난해 이곳에 문을 열었다. 거의 모든 식재료를 텃밭에서 길러서 사용하고 있으며 된장과 간장도 직접 집에서 만든다. 밥도 손님이 오면 즉석에서 앉혀서 내준다. 주 메뉴는 된장해물찌게(8,000원) 육개장 순두부백반(7,000원) 등이며 갈치·병어찜(15,000원) 등인데 외갓집에서 먹는 기분이다. 월곡리 민박집 입구에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오전 9시에 문을 연다.

지형원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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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나주봉황 철야마을17.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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