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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4일(금요일)

무등고미술원 고송석 대표

동국진체 서예박물관 열어 전라도의 書脈 한눈에 보게
원교 이광사, 설주 송운회, 미수 허 목의 작품 1,000여점 수집
2016. 01.28(목) 13:51확대축소
고송석 대표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사업이 진행되면서 지역 문화계에서 일어난 큰 변화가 있다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 말 현재 광주와 전남지역 사립미술관은 30개(광주 5, 전남 25) 박물관은 52개(광주 5, 전남 47)개다. 여기에 미등록 미술관과 박물관 숫자를 더하면 훨씬 많아진다.

광주 예술의 거리 주변만 해도 궁동에 ‘비움’박물관이 오픈을 준비하고 있고 금남로3가 5.18 기록문화유산보관소 뒤편 대동갤러리 자리에도 세계 조각·장식품 박물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런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이 여러 종류의 소장품을 수집하기 보다는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도 근·현대 작품만을 수집, 차별화하거나 서예작품만 전시하는 서예박물관 등이다. 같은 서예박물관이라 하더라도 추사의 작품만을 수집, 전시하는가 하면 특정 서체만을 한자리에 모은 서예박물관 등도 태동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광주 예술의 거리에서 오랫동안 무등 고미술원을 운영했던 고송석(高松錫. 65) 대표가 동국진체 서예박물관 개관을 준비하고 있는 주인공이다.
동국진체란 조선후기 들어 중국의 서체를 모방하지 않고 진정한 우리의 글씨를 써보자는 문화운동으로 시작된 서체다. 이 같은 운동은 비단 서예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중국의 관념산수와는 다는 진경산수 운동이나 다른 분야에서도 바람이 불었고 이런 문화자립운동을 일컬어 동국진풍(東國眞風)이라 부른다.

동국진체는 옥동(玉洞) 이서(李宖 : 1622~1723)로부터 시작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 1668 ~1715), 백하(白下) 윤순(尹淳 : 1680~1741),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 1705~1777)가 완성했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 모수명(牟受明, ?~?)~ 석전(石田) 황욱(黃旭 : 1898~1993), 전남의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 : 1874~1965), 호암(湖巖) 박문회(朴文會),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 1907~1987)으로 이어졌다. 사실 현재 광주전남지역 서단은 거의 모두가 동국진체의 서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허미수 병풍을 설명하고 있는 고송석 대표


“예술이 창의적 정신의 소산물이라 점에서 동국진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합니다.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그 시기에, 그것도 호남을 중심으로 이러한 생각이 시작되었고 개화, 결실했습니다. 호남이 한국의 예향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동국진체 서맥 줄줄이 꿰어

고송석 대표는 매우 조용하고 온화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국진체’라는 말만 나오면 쉽게 흥분해 목소리가 커진다. 동국진체의 시작에서부터 발전과정과 현재의 서단의 상황까지를 단순하고 경쾌하게 정리해준다.
몇 년 동안 몇 점의 작품이나 수집했고 작가들은 누구누구일까?

“동국진체를 완성했다는 원교 이광사 선생의 작품은 적어도 국내에서 제가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고 대표작들도 가장 많습니다. 창암 이삼만, 설주 송운회, 사호 송수면, 기초 모수명, 효봉 허소 등등 … ” 호흡이 멈출 때까지 이름을 댄다. 소장 작품은 100여 작가의 작품 1,000여점이다. 동국진체서예박물관을 개설한다면 단연 최고의 박물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국진체에 흠뻑 빠진 것은 까닭은 뭘까?
황기로 작


“완당이 일찍 중국으로 들어가 신학문과 서예, 금석학까지를 섭렵한 대학자이지만 가장 예술적 완성도를 보인 것은 제주도 유배 이후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사실 완당이 제주 유배길에 창암과 원교의 글씨에 대해 평가한 일화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 대목에서 침을 삼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가 호흡을 멈춘 까닭은 이렇다. 완당이 전주 창암의 집에 들러서 한 말은 “노인장께서는 글씨로 지방에서 밥은 먹고 살겠습니다.”라는 것이었고 해남 대흥사의 초의에게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현판을 내리고 자신이 써준 대웅보전이라는 글씨와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글씨를 각해서 걸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고독한 유배생활 8년 3개월을 보내면서 윤기 나는 서체는 골격이 힘이 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를 완성했다고 전한다. 제주에서 나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완교의 글씨를 다시 걸라고 했고 창암이 세상을 떠난 뒤라 그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렸다는 것.
바로 추사가 오랜 고난을 거쳐서 깨달은 서도(書道)를 원교와 창암은 훨씬 전에 체득한 것이다. 군더더기를 털어 내버린 골법, 그림으로 말하자면 화골(畵骨)이며 서예로 말하면 서골(書骨)을 드러낸 것이리라. 아무런 사심과 꾸밈없이 써서 내건 ‘개조심체’라는 것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한국화가 아산 조방원 화백은 생전 원교의 글씨 가운데 완당을 능가하는 것이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서예작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광주일고와 인하공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금호타이어 연구실에서 10년간 재직했다. 금호타이어 재직시 외국의 퇴역 기술자들이 주말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투어를 하면서 동행을 요청해 따라다니다가 고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그러나 70,80년대에는 한국화가 엄청나게 비싸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상대적으로 값이 싼 서예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월급을 탈 때마다 한 두 점 씩 사기 시작하다가 아예 예술의 거리에 무등고미술원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무등고미술원은 그림을 사고파는 화랑이 아니라 수집을 위한 장소였던 셈이다.

금호타이어에서 나와 잠깐 미국에서 매형과 함께 화장품사업을 시작했으나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귀국해 고미술원을 오픈한 것. 90년에 시작했으니 25년이 넘었다. 물론 동강 정운면,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 현당 김한영 등 선전작가들의 작품도 간혹 모으긴 했지만 동국진체 서예작품에 올인 했다.
동국진체 가운데서도 이를 완성했다는 원교에 대해서는 가히 박사(?)다. 부친 이진검은 예조판서로 노론 4대신을 탄핵했다가 죽었고 그는 백부 이진유가 나주 괘서사건(1775년)에 처벌당할 때 연좌되어 완도 신지도에 이배(58세)되었으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향년73세)는 이야기, 이듬해 2월 아들 형제가 경기도 장단에 어머니 류씨와 합장했는데 현재 비무장지대(DMZ)에 있어 갈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인생스토리를 꿰고 있다.

원교는 공조 공조판서 백하 윤순(白下 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고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이룩했다고 한다. 대표작이 서울대 박물관 소장의 <행서 4언시> 간송미술관 소장의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국립중앙박물관의 <산수도> 등이다. 특히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 <원교집선>(圓嶠集選) <동국악부>(東國樂府) 등은 후학들에게 큰 길잡이로 남아있다. 신지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린 <기속(記俗)>은 신지도의 풍속을 그린 것이다. 해남 대흥사(大興寺) 현판 “침계루(枕溪樓)”, “대웅보전(大雄寶殿)” 강진 백련사(白蓮寺) 현판 “만경루(萬景樓)” 구례 천은사(泉隱寺) 현판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 등도 그의 작품들이다.

유산으로 받은 땅과 도자기 팔아 작품구입

그러나 마땅한 수입이 없어 작품을 사지 못할 때 가슴이 아팠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과 도자기 등을 처분해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림을 파는 사람들이 거둬오면 하나씩 사서 모으고 설사 나중에 가짜로 판명이 되어도 ‘공부했다’는 셈치고 그냥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정도전의 병풍은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해서 샀는데 아직껏 원금을 갚지 못했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 이른바 ‘장사밑천’이 차츰 줄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주식이다. 그는 워랜버핏이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말을 중시한다. 이른바 데이트레이딩이 아니라 오래오래 두고 승부를 거는 인내의 투자자다.
교사로 명퇴한 부인의 퇴직금으로 10여배의 차익을 남겨주고 ‘정당한 수고료’를 받아 계속 글씨를 사 모으고 있다. 오늘도 동국진체의 작품만 나오면 달려간다. 이제 배관이 있든 없든 글씨만보면 어느 시대에 쓴 것인지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예술의 거리에서는 진위가 애매하면 그에게 달려갈 정도다.

한국고미술협회 소속 최창섭 감정위원은 “동국진체 감정에서는 고송식 대표의 의견을 매우 비중있게 받아들인다.”면서 “작품수집에 있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진정성과 진지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 가운데 대표작 몇 점을 들라면 이광사의 병풍, 서첩, 서간문을 비롯하녀 허미수의 ‘전서병풍’ 고산 황기로의 ‘서첩’, 옥봉 백관훈의 ‘초서병풍’ 송시열의 ‘閑邪存誠’편액, 송재 송일중의 서첩 등 수없이 많다.

이밖에도 추사의 ‘덕이논세지실(德以論世之室)’편액, 문인화가 강세황의 작품, 오세창의 작품 등도 귀한 작품이다. 최근 고흥의 남포미술관에서 동국진체의 서맥을 정리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가진 바 있는데 대표작 대부분이 고씨가 수장한 것들이다. 20여점을 빌려주었는데 보험산정가격이 2억여원이 넘는다. 이런 귀한 작품이 1천여점이나 되니 가히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예가 외에도 요즘 인기 높은 수채화가 배동신의 작품을 비롯 남도의 대표적인 작가의 작품도 심심찮게 수집해놓았다.

어려서 한문과 바둑 익혀 옛문화에 관심

그는 전남 담양에서 창평 고씨로 불리는 장흥고씨 중시조 고경명 선생의 14세손으로 태어났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골기와 솟을대문이 있는 집이었고 할아버지가 한학자 전우 선생의 제자다. 한학을 하신 할아버지로부터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어깨너머로 바둑도 배웠다. 실로 광주일고 재학시절 ‘돌무리’라는 써클에 들어가 바둑을 두었고 금호타이어 재직 시에는 후지쓰배 직장 바둑대회에 회사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또 바둑명문 고등학교 끼리 겨루는 고교 동문전에 일고 대표로 나가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고교 동문전에는 충암고, 경기고, 경북고 등 지방명문들이 대거 참여하는 대회다.
6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요즘도 바둑을 즐기는데 고서화와 바둑이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고서화 가운데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은 꼭 사서 모은다면서 이 역시 선비들의 여기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다시 동국진체 서예박물관 얘기를 꺼내며 현재 광주와 고향인 창평을 놓고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는 접근성이 좋지만 부지 매입 등 비용이 만만치 않고, 고향 창평은 접근성에서 광주보다는 조금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나 정말 보람스런 일 한 가지는 하고 싶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도 충분히 의견을 나눴다면서 머지않은 때에 전라도 동국진체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얘기를 마쳤다.
중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퇴임한 부인 박하경 여사와의 사이에 선영(35) 은지(33) 등 두 딸을 두었다, 큰 딸은 출가했고 둘째 은지가 현재 박물관을 맡기 위해 열심히 수업을 받고 있다.

<박원지 기자>

박원지 기자 mhtong@hanmail.net        박원지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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