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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4일(금요일)

절의(節義)를 실천한 참 선비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율곡 이이·성혼의 무고를 밝힌 변무소를 비롯 척화소, 호남의록 등 지어
2015. 10.12(월) 21:25확대축소
대계서원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는 말이 있다. 부와 권력이 있는 집안에서 출세한 아들이 나오면 하는 말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도 있다. 어버이와 아주 딴판인 자식이 있을 수 없음을 일컫는다. 또‘개천에서 용 난다’ 말도 있는데 변변치 못한 집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오는 것을 이른다. 실제로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서두에 이런 속담을 꺼내는 것은 이렇다. 왕대밭에서 시누대가 나오기도 하고 시누대 밭에서 왕대가 나오기도 하지만, 또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한 집안의 내력이나 뿌리를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마을을 취재하면서 여러 번 실감한 것이다. 학자 집안에 학자가많고 의사 집안에 상대적으로 의사가 많다. 예술인 집안에 예술인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 달에 만나는 보성의 죽산(竹山) 안씨(安氏) 가문도 조상 가운데 큰 선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엊그제 광복 70주년을 지냈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길지 않은 역사에서 4명의 교육감을 비롯하여 많은 교육자와 국회의원, 시장, 군수를 배출한 데는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 중심에 있었다.

은봉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학자·저술가이자, 절의(節義)를 실천한 참 선비다.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자는 (士彦), 호는 은봉(隱峰) 또는 우산(牛山)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은봉이라는 호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충의와 절의를 사모하여 스스로 지어 부른 것이다.

은봉은 보성군 오야리(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나 이황의 제자인 박광전과 조광조의 재전 제자인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고경명의 제자 박종정에게도 배웠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며, 한평생 처사로 자처하고 교육과 저술에 몰두했다. 특히 그는 참된 선비가 지녀야 할 정신과 기풍을 환기하는 데 주력했다.
이이가 무고당한 곡절을 밝힌 ‘변무소(辨誣疏)와 국가의 치욕을 씻고 대의를 천명한 척화소(斥和疏), 조정의 기강을 잡고 대책을 간언한 언사소(言事疏) 등을 지어올린 일은 너무 유명하다.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호남의병장으로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완주로 직행, 영무사 이원익과 군기를 의논했고, 1636년 병자호란에도 창의하여 여산까지 진군하였다.

임진왜란사를 정리해 진주서사·삼원기사·호남의록 등을 남겼고, 쇠퇴해가는 사림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기묘유적·항의신편 등을 집필했다. 또 당쟁과 관련해 혼정편록·기축기사 등을 저술했다. 교지와 대계서원의 진신장의안·유안·심원록 등 132점은 전남유형문화재 303호로 지정돼 있다. 고경명의 아들인 영해부사 고용후에게 보낸 유묵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스승인 성혼은 당시 “안방준은 나에게 배울 사람이 아니라 나를 깨우칠 사람”이라고 했고, 송시열은 “하늘이 사문(斯文)을 도와 우산 안선생을 낳으니 거의 도학과 절의를 겸비했다 하겠다.”고 평한 바 있다. 잠시 은봉의 어록과 문장을 살펴보자.

“학문은 남음이 있는데 절의가 부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문은 부족한데 절의가 남는 사람이 있다. 학문은 남는데 절의가 부족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학문은 부족한데 절의가 남는 사람이 낫다. 이름난 현인과 참된 선비의 차이는 학문에 있지 않고 절의에 있을 뿐이다.” - <우산답문>에서
“독서하고 강학하는 것은 과거의 말과 행동을 정확히 알아서 자신의 덕을 쌓는 것에 불과하다. 선비 된 자가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소학(小學)》이면 족하고, 치국평천하의 대업을 구하려 한다면 《대학(大學)》 한 권이면 족하다. 오늘의 학자는 죽도록 강학하여 만 권의 책을 독파하지만 하루도 몸소 실행하지 않고 한 글자도 가슴에 새기지 않으니, 이는 아침 내내 밥 먹는 얘기만 하고 조금도 배부름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참으로 충과 효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충효’ 두 글자를 수만 번 외우더라도 애초에 ‘충효’ 두 글자를 모르는 것과 무엇이 조금이라도 다르겠는가?” - <유사(遺事)> 중에서
학산재


대표적인 저서는 《은봉전서》로 그의 도학과 절의, 문장이 함축되어 있는 문집이다. 초고본은 《우산수필》·《은봉수필》이라 부른 적이 있다. 1773년에 《우산선생집》 5책을 간행하였고, 1864년에는 20책으로 중간하면서 《은봉전서》로 개칭했다.

대계서원(大溪書院)에 배향

은봉이 1654년(효종5) 82세로 화순 능주면 쌍봉리 은봉정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사림들은 그의 학문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능주에 도산사(道山祠)를 세워 제향하고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 배향했다. 3년 뒤 지방유림의 공론으로 은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대계라고 부르던 보성읍내 시냇가에 대계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 서원은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훼철과 복설이 거듭되었다. 1691년(숙종17)에 은봉 사우에 대한 훼철이 결정되어 이듬해 능주 도산사와 함께 훼철되었으며, 그 뒤 1695년(숙종21)에 이르러 복설되었다.
1704년(숙종30) ‘大溪(대계)’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는데, 사액서원이란 국가의 공인을 받아 서원 현판(懸板)과 노비·서적 등을 하사받았던 서원을 일컫는다. 서원은 제사를 지내는 기능과 학문을 가르치는 기능을 했던 곳이다. 1787년(정조11)에 수재로 옮겨 세웠으나 불행하게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고 말았다.
이후 144년만인 지난 2012년 국가와 문중이 20억여원을 들여 옛 대계서원 터 건너편에 다시 세웠다. 이곳에는 조문사, 숭도문, 강당, 격치재, 성정재, 전사청, 은봉유물전시관, 장절문 등 10개의 건축물이 세워졌으며, 사당과 강당의 현판도 동춘당 송준길과 숙종 어필을 집자(集字)하여 걸었다.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삶
옛날의 빙월정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소뫼 마을)에 가면 빙월정(氷月亭)이란 정자가 있다. 빙호추월(氷壺秋月)에서 따온 말로 은봉이‘호리병 속의 가을 달’처럼 맑고 깨끗한 삶을 살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곳은 원래 보성군 문덕면 우산리에 속했으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승주로 편입되었다가 지금은 순천시에 속한다.
은봉은 보성에서 정자강과 보성강 줄기를 따라 옥과 - 임실 - 전주를 거쳐 한양까지 몇 차례 오르내렸는데, 꿈속에서 보았던 경치와 소뫼로 불리던 이곳이 너무 흡사하여 1614년 한양에서 낙향할 때 소뫼에 터를 잡고 살았다. 당시에는 하씨와 옥씨 등이 많이 살았으나 은봉이 터를 잡으면서 ‘소뫼파’후손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은봉은 서당을 열어 강학하는 여가에 보성강 순호(蓴湖)에 나가 낚시를 드리웠다. 조대(釣臺 낚시터)로 사용했다고 하여 ‘은봉조대’라고 부르는 이 돌벼랑에 정자를 짓고 시를 논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6대손인 오봉(五峰) 안수록(安壽祿)이 송환기 문하에서 공부할 때 ‘은봉조대’라는 글씨를 받아두었다. 그러다가 100여년 뒤인 1912년 오봉의 5대손인 후송 안종민이 조대 남쪽에 ‘은봉조대’를 새겼고 12년 뒤 후송의 큰아들 안사순이 5개월여에 걸쳐 완성하였다. 그러나 1981년 애그니스 태풍으로 휩쓸려 가버려 2년 뒤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보성에서 순천 고인돌 공원으로 가는 길목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목미암(木美菴)과 상관재(相觀齋)

빙월정에서 나와 반대편 산길로 5분여 올라가면 서당인 목미암(木美菴)과 강당인 상관재(相觀齋)가 있다. 관리하는 사람을 따로 두어 비교적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동백과 서나무가 그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목미암은 은봉의 증손인 매계처사(梅溪處士) 안후상(安後相, 1665~1726)이 증조부가 후학들을 가르쳤던 유풍을 이어받아 지은 작은 서당이다. 목미암이라는 이름은‘우산지목 (牛山之木) 상미의(嘗美矣)’에서 유래한다. 소뫼라 불리는 우산(牛山)은 맹자가 살던 시대 제나라의 동남쪽에 있던 지명과도 같은데 “아름다운 나무들을 베어 가버리니 어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안후상은 증조부처럼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인의(仁義)를 쌓았으며 향약(鄕約)을 만들고 의고(義庫)를 건립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이미 300년 전에 마을의 자치규약과 학규를 만들어 공동체 생활을 운영하고 인재를 양성했던 것이다. 목미암은 이후 손자인 직우당(職憂堂) 안창훈(安昌勳)이 중건하고 성관재를 창건했다. 지금도 목미암에는 유명한 학자들이 지은 기문(記文)과 시(詩), 주련(柱聯) 등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보존해온 일도 장한 일이려니와 우봉파 종친회가 뜻을 모아 모든 현판과 주련을 관리하고 관련 문서를 번역, 편찬하였으니 집안의 저력의 대단하게 느껴진다.
목미암의 현판은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의 작품이고, 강당인 상관재와 수정와(守靜窩) 등의 글씨는 모두 당대의 석학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썼다.

고송팔매(孤松八梅)의 송매정(松梅亭)
송매정


송매정(松梅亭)은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에 있다. 정자 곁에는 지금도 종손이 터를 지키고 있으며 정자의 유래와 현판, 주련, 문집 등을 번역하여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송매정은 목미암을 중건한 은봉의 5세손 안창훈이 지은 정자다. 은봉은 소뫼 마을에 정착하자마자 우산전사(牛山田舍) 동쪽에 단을 쌓아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 여덟 그루를 심고 은둔하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송매정이란 이름은 고송팔매(孤松八梅, 외로운 소나무와 여덟 그루의 매화)에서 비롯되었다.
안창훈은 은봉의 유지를 받들어 정자를 짓고 송매정이란 현판을 달았는데 아들 오봉 안수록이 상량문을 지었다. 그 상량문에 “곧은 절개를 지키며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길이 전하려는 뜻”이라고 썼다. 안수록은 실학자인 하백원(河百源)과 같이 송환기의 문인이다. 이 송매정을 일명 ‘초당(草堂)’이라고도 부른다. 수천 권의 책이 소장되었다고 하는데 여순사건 때 옮기는 과정에서 분실되고 말았다.
안창훈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깊이 연구하고 효심이 뛰어났는데 부인인 진원박씨가 길쌈과 검소한 생활로 부를 일으켜 가난한 친척과 이웃을 구휼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송매정 곁에는 사당이 남아 있다. 그때 심었던 한 그루의 소나무는 노송이 되었고 여덟 그루의 매화는 노매(老梅)가 되었으나 옛 선비의 향취는 더욱 깊이를 더해준다. 정자 아래 자그만 연못과 담장 밖으로 백일홍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다.
특히 송매정에는 수많은 문인들의 편액이 걸려 있다. 송매정이란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추사 김정희가 쓴 ‘梅花同心 怪石知己(매화는 나의 마음이요 괴석은 나를 알아주는 벗이다)’라는 여덟 글자를 모사하여 새긴 현판도 눈에 띤다. 주련은 당대 명필인 창암 이삼만이 쓴 것인데 지금도 친필이 남아 보관중이다.
목미암·송매정 등의 편액과 현판을 번역해 책으로 엮은이가 한학자 안동교 교수다.

말년에 은봉정사(隱峰精舍)에서 강학

은봉은 74세 때인 1646년 화순군 이양면 매정리에 은봉정사를 짓고 경학과 성리학을 강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보성은 물론 화순과 남평 등지에서 찾아온 서봉령, 이위, 양주남 등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특히 이듬해 송시열이 이곳으로 찾아오자 ‘충효전가서’를 지어주었다. 1653년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82세에 이곳에서 타계했다. 은봉정사 건물이 언제 허물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도 후손이 대밭으로 둘러싸인 그 터를 지키며 살고 있다. 그리고 1980년 무렵 마을 입구에 유허비가 세워져 옛 일을 추억하게 해준다.

목마른 학이 물을 마시는 형국의 명당

은봉의 묘소는 화순군 남면 복교리 갈학등(渴鶴嶝)에 있다. 갈학등이란 목마른 학이 물을 마신다는 형국으로 풍수지리학에서는 명당으로 치는 자리다. 묘소 아래에 제각인 학산재사(鶴山齋舍)가 있고 입구에 신도비 2개가 나란히 서 있다. 신도비(神道碑)란 신이 다니는 길에 세운 비석을 일컫는다.
이 신도비는 은봉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세운 것이다. 오른편에 세워진 것은 송시열의 9대손인 송병선이 썼고 왼쪽에 세워진 것이 송시열이 쓴 것이다. 처음 신도비를 세웠던 1899년에는 송시열의 비문을 찾지 못했으나 후손 안규용(安圭容)이 여러 문헌을 조사하여 1956년에 세운 것이다. 신도비의 전말을 알리는 추기비(追記碑)도 있다.
안씨들이 이 명당을 지키기 위해 벌인 노력은 문중사에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다. 1986년 무렵 주암댐이 건설될 때에 갈학등 묘역의 일부가 도로로 편입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문중 어른들이 나서 서슬이 퍼런 군부정권에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그 중심에 노유학자 안종선(安鍾宣)이 있었다. 그는 죽곡정사(竹谷精舍)를 창건하여 후학을 양성했던 안규용의 아들로, 묘역이 훼손된다는 소식을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궁리 끝에 한문으로 된 장문의 탄원서를 짓고 지역 유림들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올렸는데, 타당성이 인정되어 이리 국토관리청으로 이관되었다. 마침 이곳에서 근무하던 후손 안병식의 주선으로 설계변경이 이뤄져 갈학 명당이 지켜지게 되었다.

후손들, 교육계·행정계에 대거 진출

여기서 잠시 죽산안씨의 족보를 들여다보자. 죽산안씨는 고려 말에 나라에 공을 세워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진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삼는다. 안원형은 만년에 처가 고을인 광주 평장동으로 내려와 살았는데 평장동은 광산김씨의 관향(貫鄕)이다. 은봉 안방준은 바로 안원형의 10세손이다.
은봉의 후예들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면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경제계나 기업계보다는 교육계·학계·정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먼저 교육계 인물로는 보성중학교와 보성농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을 역설한 안태시, 광복 후 경남고등학교 초대 교장,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제2대 전라남도 교육감 등을 역임한 안용백, 광주광역시 2대, 3대 교육감을 지낸 안준 등을 꼽을 수 있다. 안종일·안순일 전 광주광역시교육감도 죽산안씨이나 은봉의 직손은 아니다.
학계의 인물로는 전남대 법대학장을 지낸 안용섭, 한국공자학회 회장을 역임한 전남대 철학과 교수 안진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가톨릭대 국사학과 안병욱 교수, 한국교총 회장 안양옥 서울교대 교수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또한 신진 인물로 원자물리학을 전공한 KAIST 물리학과 교수 안재욱과 고체물리학을 전공한 부산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안재석 형제는 한국 물리학계에 큰 업적을 남길 것으로 기대된다.
정관계 인물로는 광주광역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안재호, 목포시장을 지낸 안주섭, 국회의원을 지낸 안재홍, 현직 국회의원 안규백 등이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군 인사로는 보병 제35사단 사단장을 지낸 안병태 소장, 경찰계에서는 안재경 전 경찰대학장, 세무계에서는 영등포세무서장을 지낸 안종채가 있다. 서예가로는 송곡 안규동이 유명하다.
<지형원 발행인>


1573년 보성읍 우산리 출생
1583년(11세) 이황의 제자 박광전에게 수학
1586년(14세) 고경명의 제자이자 자형인 박종정에게 수학
1589년(17세) 경주정씨 승복의 딸과 혼인
1591년(19세)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
1592년(20세) 임진왜란에 박광전, 임계영 의병부대에서 활동
1596년(24세) 진주성 전투를 기록한 〈진주서사〉 집필
1611년(39세) 한양으로 이사
1613년(41세) 조헌의 소장과 격문을 모아 〈항의신편(抗義新編)〉 저술
1614년(42세) 보성 소뫼로 낙향하여 우산전사에서 강학
1615년(43세) 〈호남의록(湖南義錄)〉·〈임정충절사적(壬丁忠節事蹟)〉·〈삼원기사 (三寃記事)〉저술
1622년(50세) 조헌의 〈동환봉사(東還封事)〉 편찬
1625년(53세)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에 19일 동안 있다가 사직
1627년(55세) 정묘호란에 창의하여 호남의병장으로 출정
1632년(60세) 성혼의 〈위학지방(爲學之方)〉을 간행
1635년(63세) 당쟁 사료를 모아 〈혼정편록(混定編錄)〉 편찬
1636년(64세)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여산까지 진군
1642년(70세) 〈기묘유적(己卯遺蹟)〉을 편찬하여 기묘사화의 전말을 정리
1643년(71세) 〈기축기사〉와 〈우산답문〉을 지음
1646년(74세) 매화정에 은봉정사(隱峰精舍)를 짓고 강학
1647년(75세) 은봉정사를 찾은 송시열에게 〈충효전가서〉를 지어줌
1653년(81세)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654년(82세) 은봉정사에서 타계
1656년 능주의 유생들이 도산사를 세움
1657년 호남의 유생들이 대계서원을 세우고 도원서원에 배향
1704년 대계서원에 사액함
1773년 대계서원에서 《우산선생집》 발간
1864년 대계서원에서 목활자로 《은봉전서》 중간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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