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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7일(일요일)

4. 강진 항촌마을
2015. 07.01(수) 10:30확대축소
명발당전경
다산의 유배길목에 자리한 명발당에는 쓸쓸함이 감돌고
아내의 헌 치마폭에 그렸다는 ‘梅鳥圖’에는 짙은 父情이…

‘남도답사 1번지’강진에서 다산이나 영랑의 흔적을 빼고 얘기할 것이 있을까마는 도암면 항촌(項村)은 다산의 흔적들이 곳곳에 스며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다산의 유배길 산책 코스에도 어김없이 들어 있다.

항촌마을에 남아 있는 명발당(明發堂)은 다산의 부친 정재원(1730-1792)과 훗날 사돈이 된 윤광택(尹光澤, 1732~1804)이 교류했던 곳이다. 다산은 17살 때 화순현감으로 재직하던 아버지를 따라서 해남 백연동의 외갓집에 간 적이 있는데 해가 저물어 윤광택의 사랑방에 묵게 되었다. 윤광택은 정재원을 위해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훗날 그의 아들 윤서유(1764~1821)는 정재유의 소개로 진산 유학길에 오른다. 이후 윤서유와 다산은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고 다산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인 윤영희(윤창모, 1795~1856)가 이곳 명발당에서 혼인을 하게 된다. 명발당은 윤창모 가족이 경기도로 떠난 뒤에 해남윤씨 항촌문중에서 사들여 종가로 사용하고 있다. 강진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또한 항촌은 다산의 외손자인 방산 윤정기(1814~1879)가 고향으로 내려와 학동에 백학루(白鶴樓)를 짓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윤서유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어 지내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고 결국 다산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다. 그의 아들이 윤정기인데 다산의 학통을 이어받은 대학자이자 문장가, 서예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중국의 대학자 주소백(周少伯)이 “동국 제일 문장”이라했다니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
유서 깊은 이 마을은 강진읍에서 해남·진도 쪽으로 향하는 18번국도의 계라리에서 완도 쪽으로 좌회전하여 813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된다. 현재 강진 도암면사무소 바로 뒤 하천 건너에 있다. 마을 옆 도로는 가우도(駕牛島) 출렁다리로 가는 길이다.
향촌마을 입구


예로부터 1. 금당(성전면) 2. 항촌(도암면) 3. 군자(작천면)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터가 좋은 곳이라고 알려진다. 석문천 맑은 물이 마을을 감돌아 봉황천과 합수되어 돌아나가고 마을 뒤의 동산은 황새가 날아가는 형국이다. 실제로 이 산은 황새산으로 불릴 정도로 황새가 떼를 지어 날아왔다고 한다. 6.25 이후에 현격하게 줄어 현재는 가끔 한두 마리가 찾는 정도다.

옛날에는 마을 하천에 은어가 올라오기도 했으며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던 선착장이 있을 정도로 부촌이었다.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촌 옥천과 병합하여 항촌이 되었고 보암면에서 도암면 소속으로 바뀌었다. 항촌이란 이름은 지형이 용의 목처럼 되어 있어 목마을, 목말, 목리, 항촌이라고 부른다.

해남윤씨 집성촌…김영진의원의 고향마을

최초 입향 성씨(姓氏)는 해남 윤씨로 시조 존부(存富)로부터 13세손 윤 연이 벼슬에서 물어나 터를 잡았다. (문우주 ‘향약’참고) 그러나 그 후손들이 계속 살지는 않았고 19세손 이면(以冕, 1662~1779) 이상(以相, 1673~1755) 4촌 형제가 들어온다. 항촌마을 입구에는 해남윤씨 세장비가 세워져 있다. 항촌마을은 옛날 200여호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70여 호가 산다. 아직도 해남윤씨가 30여 호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도강(道康) 김씨인데 바로 김영진 의원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김영진 의원은 13대 국회에 진입해 18대까지 활동한 5선의원이다. 도강은 오늘날 강진군의 북부에 있던 고려 때의 고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탐진과 합해 강진군이 되었기 때문에 도강 김씨를 강진 김씨라고도 한다.
마을 입구에는 족히 200년은 됨직한 은행나무 밑에 2층 정각과 항촌마을 노래비가 있다. 이 노래비는 서화가이자 도암면의원을 지낸 윤양현이 곡과 노랫말을 지었는데 마을 행사 때마다 불리어지고 있다.
명발당 옛기와


앞으로는 광야와 산천이 있고 / 위로는 동산이 솟아있구나 / 남으로는 바다에 배가 다니고 / 북으로는 석문산과 학교가 있다 / 중앙으로 모닥모닥 우리 항촌 / 인간살이 좋은 곳이 이곳 아닌가 / 사랑스럽고 향기롭다 우리항촌 / 누가누가 이별하고 어디 가리오 / 왕래하는 사람은 경치 좋다고 / 각지에 소문났더라 우리항촌 /

지극히 소박한 마을의 노래다. 항촌마을가를 콧노래로 부르는 마을이장 윤해성(尹海成)씨의 노래 한 구절을 들으며 동네마다 마을노래가 한곡씩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노랫말을 짓고 군청이나 문화원 같은 데서 곡을 붙여주어 향토축제 때 마을노래 부르기 대회라도 열면 축제참여도를 높일 수 있을 것 아닌가.

항촌마을은 명발당 말고는 특별히 자랑할 것이 없다. 산자수려한 마을인 것은 맞지만 보존가옥으로 지정할 만한 집도 없고 대부분이 서민들의 평범한 농촌 주택 들이다. 그래서 민박은 출렁다리로 유명한 가우도에서나 가능하다.
외형은 그렇지만 배일사상이 짙어 1930년 이전부터 문맹퇴치 운동의 하나로 야학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마을계가 이어지고 있다. 독립유공자 윤양하, 고 윤기석 목사, 윤태현 남광병원장, 윤승욱 국가청렴위서기관 윤재준 성도소프트 사장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명발당은 정조 22년(1798년) 윤광택이 살던 집의 당호다. 해남윤씨 20세조 윤홍좌가 집을 지었을 당시에는 소태정(小台亭)이라 불렸으며 22세 윤광택이 개축하여 명발당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현재 남아 있는 집은 1920년 다시 지은 것으로 앞뒤에 퇴를 둔 -자형 6간집이다. 뒤에 부엌을 드리고 앞쪽에 2개의 방을 두었다. 향은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마당에 정원시설이 있다.
행랑채는 4칸 -자형 팔작집이며 정자는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상량문에는 1958년 윤재기가 개축했다고 쓰 어져 있으며 무학중사(無學中斜) 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곁에 있는 행랑채는 4칸의 1자형 팔작집이다.

일제시대 면사무소
해남윤씨 28세손 윤동옥씨(59)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정원 등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전통한옥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는데 헐리고 뜯기어 아쉽다.”고 말한다. 또한 윤씨는 “다산 선생의 따님이 이곳에서 혼인하여 1년 6개월을 살았고 훗날 방산 윤정기를 회임하여 경기도로 떠났던 유서 깊은 집”이라고 설명했다. 윤정기는 1814에 때어난 다산의 마지막 제자이자 외손자다. 해남윤씨 방산선양회는 윤정기선생 탄생 200주년을 맞아 지난해 남양주 실학박물관, 사단법인 다산연구소와 공동으로 학술대회 등 기념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항촌마을에서 서쪽으로 멀리 덕룡산이 보인다. 산정을 따라 거닐며 내륙과 바다풍경을 볼 수 있어 등산객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이 마을에는 선바위, 가재샘, 장군봉 등 전설이 서린 곳들이 많다. 선바위는 큰 홍수가 났을 때 마을 앞 하천으로 바위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임산부가 소리치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고 하는데 신선이 나타나 임산부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으면 서울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장군봉은 장수가 넘어져 손을 짚었다는 곳인데 이조시대 봉화대가 있었다고 전한다. 가재샘은 용두산 길목에 있는 섬으로 가재가 많이 살았다고 알려진다. 또 석문사 우측 상봉에 있는 상사바위는 신혼부부였던 부인이 방탕한 남편의 개심을 기다리다 병들어 죽어 구렁이가 됐으며, 남편도 기절하여 죽자 남편을 휘휘 감고 있는 형상이라고 전한다.

향촌마을에서 서쪽으로 들판 건너에 있는 마을이 학동이다. 이곳이 바로 다산 정약용의 외손자인 방산 윤정기((舫山 尹廷琦, 1814~1879)가 살던 곳이다. 마을 앞에는 ‘다산선생 따님의 묘소’라는 입석이 세워져 있고 방산의 집으로 오르는 길목에 따님부부의 묘비가 있다. 그가 살던 집은 서당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서책과 그림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자그마한 집이 남아 있다.

방산은 46세 때 경기도에서 내려와 백학루를 짓고 문인들과 교류하고 후학들을 길렀다. 방산은 백학루에서 다산선생의 학문을 논하며 동환록(東豈錄)과 단풍시집 등의 책을 출간하고 글씨를 썼을 것이다. 윤정기의 동환록은 다산의 지리지 ‘대동수경’과 ‘아방강역고’를 이어서 저술한 책으로 1859년 (철종 10년) 찬집이 완료되었다. 동환록은 일제 때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바클리대학에도 천견문고에 필사본으로 소장돼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시경강의속집(詩經講義續集)’ ‘역전익’등을 썼다.
명발당 안체 측면


150년 역사의 백학루는 현재 그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백학루에서 동편 들녘을 바라보면 수많은 백학이 노닐었던 황새산이 눈앞에 있다.
이 대목에서 잠시 다산 장약용의 시 매조도(梅鳥圖) 한수를 읊고 가는 것도 좋겠다.
翩翩飛鳥(편편비조) / 息我庭梅(식아정매) / 有烈其芳(유열기방) / 惠然其來(혜연기래) / 爰止爰棲(원지원서) / 樂爾家室(낙이가실) / 華之旣榮(화지기영) /有賁其實(유분기실)

펄펄 나는 저 새가 / 내뜰 매화에 쉬네 / 꽃다운 향기 매워 / 기꺼이 찾아왔지 / 머물러 지내면서 / 집안을 즐겁게 하렴. / 꽃이 활짝 피었으니 / 열매도 많겠구나.

다산의 강진유배 9년째인 1810년, 두릉의 아내 홍씨로부터 한통의 편지와 함께 치마가 배달되었다. 다산은 이렇게 쓰고 있다. “가경 18년 계유년 7월 14일 열수옹 다산 동암에서 썼다. 내가 강진에 귀양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결혼할 때 입었던 여섯폭 치마를 보내왔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색이 바래었다. 잘라서 첩(帖) 4권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이 유명한 매조도는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다산은 아비의 귀양으로 풀죽어 낙담해 있을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말을 적어 ‘하피첩’ 네 책을 전하게 되는데 훗날 다산연구가 박석무에 의해 ‘유배지에서 온 편지’로 엮어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하피첩(霞奸帖)은 말 말 그대로 노을색깔로 변한 치마라는 뜻이다.

다산은 ‘하피첩’을 만들고도 자투리 천이 남아 3년 뒤인 1813년 마침 강진 사는 친구 윤서유의 아들 윤영희에게 시집간 딸을 위해 한 폭의 그림을 그려주는데 바로 그 유명한 매조도(梅鳥圖)이다. 앞마당에 찾아든 두 마리 새를 보면서 딸이 자식을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09년 6월 다산의 또 한 폭의 매조도가 공개되었다. 이 매조도는 1813년 7월 14일에 지은 것으로 앞서 시집간 딸에게 준 것보다 35일 뒤에 그린 것이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었구나/
어디에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한양대 정민교수는 초당생활 중에 얻은 소실의 딸 홍임을 위해 그린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1818년 유배에서 풀려 홍임 모녀를 두릉으로 데리고 갔다가 다시 초당으로 쫓겨 내려왔다. 이후 다산은 강진으로 내려와 지은 ‘남당사’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읊었다.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같아서 /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 말인가.
다산은 이후 이들 모녀를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두 번째의 매조도는 친한 친구인 이인행에게 건네어져 이인행의 집안과 누대에 걸려 인연이 이어진 문한가의 종손에게 물려진 모양이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명지대)는 이 그림이 다산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어 앞으로 이에 대한 논란과 연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다산은 형 손암(巽菴) 정약전(1758~1816)과 함께 유배를 떠나면서 지금의 영산포 부근의 밤나무밭을 지난 것으로 알려진다. 형은 이곳에서 목포를 거쳐 흑산도로 떠나고 다산은 영암을 거쳐 강진으로 향했다. 다산이 밤나무골에서 헤어지면서 지었다는 ‘율정별(栗亭別)’이란 시를 읽어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초가주막 새벽등불 푸르스름 꺼져가는데 / 일어나 샛별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둔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 애써 목청 다듬어 오열이 터지네 /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 뿐인데 /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형 약전과 헤어져서 강진에 도착한 다산이 처음 머문 곳은 주막이다. 읍성 안에서는 받아주는 이가 없어 성문밖 노파의 측은지심에 기대어 몸을 눕혔다. 그러나 문 밖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고 노파가 불러다주는 여섯명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친 방이 사의재(四宜齋)다. 생각과 용모와 말과 행동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한다는 의미다.

정약용은 7년 동안 제자의 집과 주막을 오가며 지내다가 고성사 보은산방을 거쳐 1808년 봄 해남윤씨 가문의 만덕산 자락 다산초당으로 옮겨 후학들을 가르쳤다. 초당의 동쪽 동암에는 다산이 머물렀고 서쪽 서암은 제자들의 기숙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11년 동안 열여덟 제자를 키우고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서책들을 지었다.

글 지형원 (발행인)
사진 김을현 (사진작가. 시인)

쫸 다산 정약용 유배길 쫸
1코스 : 주작길 휴양림길 20.0키로 9시간소요
해남 북일 장수마을-장전마을-임도사거리-주작산 능선-주작산 휴양림관리사무소-흔들바위-수양리슈퍼-조석루-도암면 월하리-학동 다산 사위묘-항촌사당나무-명발당-고갯길 쉼터-선장마을-표장마을-진등재-다산수련원
2코스 :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15키로 5시간
다산수려원-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남포마을-이학래상가-강진5일시장-사의재-영랑생가
3코스 : 시인의 마을길 13.4키로 4시간 30분
영랑생가-고은사-솔치재-금당마을-성전면소재지-대월 달맞이마을
4코스 : 그리움짙은 녹색향기의 길 16.6키로 5시간 30분
대월달맞이마을-월송-무위사-안운마을(백운동)-강진다원-월남사지3층석탑-달빛한옥마을-상월마을-누릿재-천황사


◇ 주변 가볼만한 곳
▲ 가우도 = 소의 멍에를 닮은 섬이라고 하여 가우도(駕牛島)라고 불린다. 최근 칠량쪽에서 들어가는 다리와 도암면에서 들어가는 다리가 놓였다. 출렁다리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출렁이는 것은 아니며 다리 중간에 유리데크를 설치하여 강진만의 푸른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산낙조도 아름답다. 이 해상보도교가 완성됨으로써 고려청자요지 및 다산유적지 등과 자연스런 연계가 이뤄졌다. 바다에서는 낙지 돔 숭어가 많이 잡힌다. 이곳에 민박을 전문으로 하는 펜션 5채가 건립돼 인기를 끌고 있다.
▲ 백련사 =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다산초당 = 정약용(丁若鏞)이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의 산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돼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던 곳이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謂)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 청자박물관 = 국내 유일의 청자박물관으로, 고려청자의 수집, 전시, 연구, 교육 등을 통해 청자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곳이다. 박물관 주변에 고려청자를 재현하는 작업장이 세워져 우리나라 청자의 과거 및 현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 민 박
▲ 가우도 한옥 펜션민박( 010-9121-1422)
한옥 4채가 잘 지어져 사용하기 편리하다. 보통 12명까지 가능하며 한팀인 경우 20명까지도 가능하다. 사용료는 25만원이며 식사준비 시설이 잘되어 있다.
▲ 민물펜션 (010-7131-3343)
바닷가 언덕위 전망 좋은 곳에 있다. 방안에 앉아 저녁 낙조를 즐길 수 있다. 전체 건평이 20평이고 거실 하나에 방이 2개다. 하루 사용료는 15만원. 식사준비 시설이 잘 되어 있다.

◇ 맛 집
강진에는 2대~3대를 이어가는 오래된 식당 2곳이나 있다. 마량의 완도횟집과 강진읍 구 목리교 인근의 목리장어센터다. 항촌마을 입구 도암면소재에도 한식당인 우리식당과 갈낙탕으로 유명한 현대식당이 있다. 펜션에는 조리시설은 되어 있지만 따로 밥을 팔지는 않기 때문에 가까운 맛집을 미리 알아보는 것도 지혜다.
▲ 완도횟집(061-432-2066)
완도횟집은 고(故) 김양심 할머니가 1958년부터 운영한 완도식당이 모체다. 손님이 많지 않던 시절 마량포구에서 회를 팔기 시작했는데 어죽이면 어죽, 지리면 지리 등 못하는 것이 없어 항상 손님들이 붐볐다.
완도횟집은 장흥출신 소설가 이청준 선생을 비롯 많은 문인과 텔런트들이 즐겨 찾기로도 유명하다. 이청준 선생이 ‘마량이경(馬良二景)’이란 시에서 ‘완도집’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 시에 나오는 ‘아낙네’가 바로 김순자씨로 시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배운 40년 베테랑이다.
지금의 완도횟집은 회를 주 메뉴로 한 한국형 횟집이다. 손맛이 있는 주인이 직접 담근다는 10여 가지의 젓갈은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게 하는 깊은 맛이 숨어 있다.
생선회는 1인분에 2만원선이고 매운탕(대) 4만원, (중) 3만원 선이다.
▲ 목리장어센터(061-432-9292)
강진의 탐진강은 보성, 장흥, 영암, 해남 등 9개 군데의 물이 합쳐져 구강포로 흘러간다. 그래서 구강이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민물장어가 유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목리교 건너편에 장어통조림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목리교 아래에서 간판도 없이 시작한 ‘짱어집’이 지금의 목리장어센터다. 1957년에 시작해 1990년대 중반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장어만 전문으로 한다고 해서 장어센터라 이름을 붙였다.
6.25 직후 고(故) 한양수씨가 탐진강에서 직접 장어를 잡아 구이도 해주고 탕도 끓여 팔았으며 이후 아들 한춘재씨가 대를 이어 2011년까지 운영하다 지금은 이창현씨가 인수했다. 대를 잇는 것은 2대로 끊났지만 음식의 맛은 그대로 이어간다.
목리장어센터에서는 지금도 자연산 장어를 먹을 수 있다. 물론 예약을 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지만 간혹 좋은 장어를 맛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목리장어센터를 잊지 못하는 것은 장어뼈 육수 때문이다. 몸에 좋은 한약재를 넣어 24시간 끓여서 서비스로 제공하는데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본 음식인 장어구이는 설탕이나 조미를 쓰지 않고 매실과 복분자 등 자연산 재료만을 사용하고 숯불에 구울 때도 양념장을 여러 번 덧발라 양념이 골고루 스미게 한다. 소금구이는 소금구이대로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양념구이와 소금구이는 1인분에 2만2천원이고 장어탕도
판다.

▲ 우리식당(061-432-0027)
30년이 다 된 오래된 한식당으로 4인분 한상에 6만원, 8만원, 10만원 짜리가 있다. 강진의 싱싱한 식재료를 이용해 신선한 식탁이 특징이며 10만원짜리 밥상에는 홍어삼합, 육회, 갈비, 사시미 등이 계절에 따라 나온다.

▲ 현대식당(061-432-0333)
갈낙탕 전문집이다. 강진의 사초리에서 잡은 낙지로 만드는데 영암독천 갈낙탕과는 다르다. 큰 낙지 한 마리와 갈비 2대를 넣어 30분정도 끓여 나온다. 반찬 가운데서는 계절별로 즉석 절이지가 유명하며 안주인의 손맛으로 담은 묵은지와 젓갈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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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화순 한천면 정리 23.장흥 안양면 학송리
22. 영광 군남면 동간리21. 함평 대동면 상옥리 옥동
20.순천 주암 죽림리·주암리19.나주 문평면 오룡리
18.나주봉황 철야마을17.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
16 .해남읍 연동15.광산 임곡 너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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