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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4일(금요일)

한학자 박래호: 흰고무신 두루마기자락에명분과 정리를 휘어감고 사는 ‘21세기 조선인’

퇴계 이황-하서 김인후 학문의 교량역할-장성 필암서원서 한학 가르쳐
2015. 03.18(수) 15:34확대축소
노강(蘆江) 박래호(72. 朴來鎬) 선생
흰 고무신 두루마리 자락에 명분(名分)과 정리(情理)를 휘어 감고 ‘훠어이 훠어이’ 산길을 걷는 사람. 마음 속 아픔 같은 것 두루마리 자락에 감춰놓고 두리번거림 없이 내닫는 발걸음. 그래서 마파람 소리가 나고 어쩌다 ‘으흠’ 소리 한번 할라치면 온 집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지는 말없음의 권위(權威). 우리가 기억하는 선비는 그 정도다.

한학자 노강(蘆江) 박래호(72. 朴來鎬) 선생. 그가 흰 고무신자락에 두루마리 자락을 휘어감고 걷는 것은 맞다. 그러나 큰기침을 하거나 추상같은 마파람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가 어디에 나타나면 모두가 조용히 그를 맞는다.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에게 보내는 경의다.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애당초부터 없다. 선하디 선한 얼굴에 꾸밈이라고는 없는 ‘벌거벗음’이 만나는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의 현재의 직함은 성균관 부관장이자 필암서원의 학장이다. 평생을 한학과 함께 살아 왔고 그 학문적 가치를 ‘인간답게 사는 삶’에 두고 살았다. 사실 그는 평생을 글을 읽고 글을 가르치며 살아왔을 뿐 다른 세상을 기웃거려 본 적이 없다.

그는 거동이 불편하다. 스물 두살 때 모내기를 하다가 허리가 뻣뻣해져 치료를 받았으나 좋아지지 않아 그대로 살았단다.
“하나님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몸 밖으로 밀어내면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아플 것 같아 그냥 살았습니다.”

대명천지에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명의를 만나보았고 한방치료도 받았다. 현대의학으로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데 허리 말고는 매우 건강하다.
“내가 몸이 아프기 전까지는 운동을 잘했습니다. 마을행사 때 배구나 축구선수로 뛴 적도 있습니다.”
그의 눈은 패기에 찼던 10대 소년으로 되돌아갔다.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은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다. 조선시대 청백리이자 장성 백비(白碑)의 주인공인 박수량(1491~1554) 선생의 고향이다. 박수량이 그의 15대조이고 20대조는 단종의 절신이었던 대호군 박연생이다. 13대조 배우당 박상의는 임진왜란을 정확히 10년 전에 예측했던 선비다. 밀양의 옛지명 이 밀성(密城)이어서 밀성박씨 또는 밀양박씨로 불린다. 그 가운데서도 전북 태인으로 내려와 절의를 지키고 살아온 선조를 두고 있어 태인 박씨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白碑의 주인공 박수량의 후손
성균관장으로부터 부관장 수여장면

부친 일구(鎰求)도 한학을 많이 공부했다. 노강이 훗날 그의 부친이 남긴 시들을 모아 ‘백헌유고’를 발간했을 만큼 학문이 깊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담양 대전면이다. 3남 2녀의 장남인 노강은 5~6세 때 부친의 무릎 아래서 추구(推句)와 천자문(千字文)을 익히고 서당에 나가 본격적으로 한학을 배웠다. 10대초에는 용암 임종배 선생에게 소학과 대학을, 이후에는 항암 이정순 선생에 사서를 배웠다. 향암은 당시 대문장가이던 효당 김문옥이 이정순의 편지를 읽고 방문했을 정도로 문장에 밝았는데 서예가 학정 이돈흥의 윗대 할아버지다. 그 인연으로 노강과 학정은 지금도 오랫동안 우의를 나누며 매주 한차례 학정서실 제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15세가 넘어 성암 봉학구 선생에 사서를 끝내고 후반에 휴재 공병주 선생으로부터 손자인 공연웅(광주 향교)과 함께 삼경을 뗐다. 20대 초에는 경남 합천 출신으로 필암서원의 초헌관을 맡았던 추연 권용현 선생을 찾아가 집지제자가 되었다. 집지(執贄)란 스승을 처음 뵐 때에 예폐(禮幣)를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함으로써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만큼 학문적 깊이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노강은 공부를 마친 뒤 곡성 출신의 청송심씨 집안의 동갑네기 규수 심경순과 결혼한다. 훗날 노강이 호를 지어주었는데 청심당(淸心堂)이다. 마음이 정말로 맑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편 하나 믿고 가난한 선비 집안으로 시집을 왔는데 이듬해 갑자기 몸이 불편해져 집안 살림이 모두 그의 차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노강이 허리병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청심당도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삯바느질로 3남 1녀를 모두 대학에 보내 훌륭한 사회인으로 길러냈다.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대의 위선사업도 모두 바느질 품삯으로 한 일이다. 몸이 불편한 남편의 손발노릇에서부터 여비를 챙겨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노년에는 2억원을 쾌척, 장학회를 만들어 장남 택열(교사)에게 운영하도록 했다.

淸心堂의 고향에 심씨문중이 찬양비 세워
부인 청심당이 장성군수로부터 효행상을 받는 장면



그러던 그가 지난 2009년 홀연히 세상을 떠나버렸다. 심씨문중에서는 마을 입구에 ‘장한딸 청심당 심경순 찬양비’를 세웠고, 훗날 노강이 직접 아내의 묘비문을 썼다.
이 대목에서 노강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참 좋은 사람이 가버렸어.” 그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청심당은 생전 신라박씨총본부로부터 효행상을, 장성군에서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부인이 먼저 떠나면서 자녀들에게 남편을 부탁했고 자녀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며 매주 당번을 정해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뒷바라지하고 있다. 아내복과 자녀복을 모두 잘 타고난 복인인 셈이다. 잠시 얘기가 다른 쪽으로 흘렀지만 노강은 결혼 후 처자식을 보살펴야 하기 때문에 화순군 북면 곰실마을에서 6~7년간 훈장을 지냈다. 창녕 조씨들이 자작일촌하는 마을로 5효자를 낸 자존심이 강
한 마을이다.

30대로 접어들어 장성 고향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마침 한학자 변시연(邊時淵) 선생이 각 가문을 대표하는 문장가의 대표적 문집을 정리한 문원(文苑)을 제작중이어서 마무리작업에 참여했다. 변시연 선생이 만든 문원은 73권으로 유림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그는 변시연 선생 곁에서 일하면서 선비의 꼿꼿함을 배웠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고증이 되지 않으면 비문을 써주지 않았으며 동성동본 결혼을 반대하는 등 선비의 목소리를 냈던 분이다. 김영삼 정부시절 국회 이숙종 의원이 허용입법을 추진하자 변시연과 박래호는 유학자들의 서명을 받아 서울까지 올라갔다. 연합통신과의 인터뷰가 나가자 여론이 들끓어 중단되었다.

이런 일도 있다. 변시연선생과 필암서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을 때 일본인 대학교수 일행이 필암서원을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변시연과 박래호는 필암서원에서 일본인을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해 돌아가게 했다는 것. 국가침탈에 대한 개인적 항의였던 것이다.
동성동본 결혼 문제는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평민당 박영숙 부총재 이희호 여사 등이 다시 입법을 추진한 바 있다. 이번에는 노강 혼자서 장문의 글을 지어 청와대 국회 언론사 등에 900여 통의 편지를 보낸다. 김대중 대통령이 박석무의원으로부터 호남 유림들의 반대문이라는 보고를 듣고 역시 입법추진을 중단한 바 있다. 글의 내용은 ‘동성동본의 결혼 허용은 금수(禽獸)나 다름없다’는 내용으로 당시 지방신문에도 크게 실린 바 있다.
1980년대 향토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된 적이 있다. 전석홍 전남도지사 시절로 노강은 반상진 정채균 이종일 김연수 등과 함께 향토문화운동에 깊숙이 참여했다. 노강을 언론에 처음 보도한 이훈씨, 광주일보부설 향토문화연구소 김정호 소장에 대해 지금도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산다.

필암서원에서 수많은 후학길러
외국인대상 필암서원 한문강좌

민선자치가 시작된 뒤에는 노강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김흥식 장성군수는 서원에서 글읽는 소리가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필암서원에 학당을 열도록 독려했다. 서원의 운영비와 강사비를 책정해주고 읍·면별로 인원수를 할당해 강의를 받도록 한 것. 주로 40대와 50대가 많고 더러는 20,30대의 젊은 사람들도 찾아왔다. 강의를 받는 사람은 1주일에 한 번이지만 강의하는 사람은 주 4회를 가르쳤다. 김흥식 군수가 3선으로 물러난 뒤에는 주 2회 정도로 줄었지만 필암서원의 학당에서 사서를 공부한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른다.

필암서원은 이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고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장성출신의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선생(1510~1560년)을 기리는 곳으로 사적 242호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필암서원에서는 그보다 먼저 전주대학교 한문교육학과 학생들과 원광대학교, 멀리는 상지대 한의학과 학생들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중에 강습을 받았다. 노강은 당시 전주대학에서 객원교수 위촉을 받았다. 학기마다 40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공부하러 왔는데 강사는 언제나 노강이 맡았다. 전국적으로 길러낸 제자가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는 서당을 열거나 고전 번역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표적인 제자가 순천 낙안읍성에서 이화서당을 운영하는 김대중 원장이다. 노강의 장남인 택열도 중등학교에서 국민윤리를 가르치면서 노강에게 한학을 배워 아버지의 뒤를 밟아가고 있다.

노강은 뿐만 아니라 영호남의 학맥을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학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성균관 명륜당, 거창향교, 김해향교, 김해시청 등 전국 곳곳에서 초청을 받았다. 전라도에 살면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대로사의 총무, 대전 남간사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호남 ‘학문의 다리’ 이어가는 사람

그는 지난 2009년 하서 김인후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안동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서의 9년 선배인 퇴계의 기념행사 자료를 구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도산서원에 들렀을 때 강당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제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이들은 선비정신을 체험하기 위해 모인 기업은행 신입행원들이었다. 내빈은 퇴계 종중의 이승필선생, 안동대 총장, 선비수련원 이사장, 김병일 전 예산기획처장관 등이었다.
노강은 불청객으로 행사에 참여했다가 느닷없이 축사를 제의 받았다. 그는 즉석연설로 온고지신을 예로 들어 경상도의 퇴계, 전라도의 하서의 학문이 온고이며 여러분이 대학에서 배운 신시식을 보태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켜달라고 축사했다.
이를 들었던 김병일 장관이 “500년 전의 영호남의 도덕적 다리 위에 박래호 선생이 새로운 학문적 다리를 놓았다.” 고 동아일보에 기고함으로써 우리나라 유림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노강은 이 일을 계기로 국학진흥원 자문위원을 맡아 수차례 특강을 했다. 전국 공직자,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조상이기도 한 박수량 선생의 백비정신을 교육하고 체험시키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모든 교육의 기본은 인성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노강은 “언제 우리나라에서 노인을 걱정했던 일이 있었으냐?” 면서 “부모가 장수하는 것은 큰 자랑이었고 몇 달이라도 더 사시도록 하기위해 논밭을 팔아 병구완을 했다.”면서 오늘의 부모경시 풍토를 한탄했다.
옛날에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학문을 계속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이라도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의 근본을 익혔다고 말한다. 어른들이 마을 입구의 누각에 올라 옷차림과 언행을 살펴 교육했는데 오늘날은 도덕과 윤리를 등한시함으로써 패륜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강은 평생 동안 30여책을 번역했다. 면앙정 송순의 시집, 옥봉 백광훈시집, 회재문집, 녹천 고광순 문집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랫동안 문화에 끼친 공로로 장성 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일본에 가서 漢詩 목에 걸고 1인시위 하고 싶어”
자택 기양정사에서


“저도 고희를 넘어 서서히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천상병의 시처럼 세상에 소풍 나와 잘 살았으니 큰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살아온 이야기, 내가 써온 글을 모아 작은 책이나 한권 내고 싶고 또 하나는 우리 민족을 36년간이나 압제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아베 정권에 맞서 일본정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 한번 하고 싶습니다. 한학자로서 당당히 한복을 입고 멋진 한시(漢詩) 한 편 써서 목에 걸고 서 있고 싶습니다.”
노강의 항일정신은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 녹천 고광순 문집’ 등을 읽으면서 가슴에서 울분으로 자랐을 것이다.
선비정신의 핵심적 가치는 ‘義’

선비정신의 핵심적 가치는 뭘까.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뿌리 한 ‘의리’(義)이다. 공자는 “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말해 의리와 이익을 대립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선비정신은 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충(忠)이 되기도 한다. 고려말과 조선초 왕조 교체기에 절의를 지킨 정몽주와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의 충돌은 충절로, 세조의 왕위찬탈에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은 선비의 의리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추존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비들은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고, ‘의리’에 따라 죽는 순의(殉義) 정신을 발휘했고 병자호란 때에도 오랑캐에 대한 화친과 항복을 거부하는 척화론(斥和論)이 의리정신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선비의 품격과 지조를 철저히 각성했다.
노강이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책이 궁금하다. 노강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맹자와 서경’을 든다. 글방에서 공부하는 선비이면서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가 바로서야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노강 박래호 선생. 그는 의(義)든 충(忠)이든, 절의(絶義)이든 모두 ‘사람다운 것’에 다름아니냐며 ‘사람답게 살자.’고 강조한다.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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