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바이칼의 '우리 민들레'
| 2012. 06.22(금) 22: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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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죽으면 자식 세대들이 제사라도 제대로 지낼 수 있을까?’, ‘성묘 다니는 풍습은 또 어떻게 변할까?’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세태가 너무 급박하게 변하니까, 젊은이들은 나이 차이가 아니라 달 차이로 세대 차이를 따진다고 하지 않던가!
이곳 우스찌아르다에서도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다. 브리야트 남자들은 모두 허리에 벨트를 매야했단다. 벨트는 몸을 따뜻하게 할뿐만 아니라 말을 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차림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은 오직 결혼을 할 때만 벨트를 매니 대부분 벨트 매는법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 시베리아에서도 전통적인 생활양식은 지켜질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아내보다도 말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그 말을 타고 세계를 제패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벨트를 맬 지도 모르게 되었다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 일행은 브리야트민속박물관을 떠나 우스찌아르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브리야트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와 생김새가 매우 비슷한 브리야트 젊은이들이 음식을 가져다준다. 옷차림이나 몸가짐이 매우 발랄하고 현대적인 멋이 짙게 풍겨온다. 그렇지! 변해야지! 전 세계가 치열한 생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시대에, 브리야트의 젊은이들이 우리 같은 관광객들을 위해 전통을 고수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신화를 향한 내 미망에서 점차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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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밖으로 나오니 그야말로 일망무제! 툭 트인 초원에 들꽃이 낮게 깔려 온 천지에 가득하다. 초원에 의외로 민들레꽃이 많아 반가운 마음에 한 송이 뜯어서 살펴본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민들레가 아닌가! 호기심에 민들레 꽃송이를 여러 송이 살펴보았으나 모두 다 ‘우리’민들레, ‘토종’민들레들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민들레는 대부분 꽃받침이 꽃잎 아래로 쳐진 ‘서양민들레’인데, 이 시베리아에 있는 민들레는 모두 꽃받침이 꽃잎을 위로 감싸고 있는 ‘우리민들레’라니 참으로 놀랍다. 야생화 전문가이신 김태정선생은 백두산까지도 모두 ‘서양민들레’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고 하시던데, 시베리아 초원은 아직 서양민들레로부터 침공을 받지 않은 청정구역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 보던 그 민들레를 ‘우리민들레’라고 또는 ‘토종민들레’라고 부르면, 시베리아를 지키고 있는 이놈들이 무척 화를 내겠다는 생각이 든다. “꽃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들이 뭐? 토종민들레?”
이르쿠츠크로 돌아온 우리는 마지막 답사코스로 제카브리스트의 상징인 발콘스키(1788~1865)의 집으로 갔다. 발콘스키의 집은 제카브리스트들을 기념하기 위해 제카브리스트 박물관으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제카브리스트는 말 그대로 ‘12월혁명당원’을 뜻하는데, 1825년 12월 14일에 일어난 러시아 인텔리겐치야들의 쿠데타를 일컫는 말이다.
제카브리스트의 거사는 1884년에 일어난 우리나라 갑신정변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위로부터의 개혁'을 꾀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에 의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났다. 1789년에 일어난 이른바 ‘프랑스대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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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러시아는 ‘위로부터의 개혁’도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지식인 귀족계층에 의한 ‘옆으로부터의 쿠데타’가 일어난 셈이다. 우리나라의 갑신정변처럼 제카브리스트의 거사는 '인텔리겐챠'라고 불리는 개혁적 귀족계층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이들에게는 권력도 군사력도 없었고 민중들의 지지 역시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제카브리스트의 거사는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이념을 갖춘 선진적 지식인들의 현실 변혁 움직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이 거사 실패 후, 고종의 측근으로 개화를 꾀하거나 서재필처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만민공동회를 열었던 것처럼, 제카브리스트도 정치권에 적극 진출하여 짜르의 개혁정치를 돕거나, 혹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을 계몽하려는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러시아 왕실은 이들을 외면하고 민중들은 인텔리겐챠를 백안시하게 되어 결국 인텔리겐챠의 개혁운동은 '모두' 실패하게 된다.
이 반란 사건으로 5명의 주모자가 교수형을 당하고 100명 이상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때 그들의 부인들은 반란자들과 이혼하여 헤어지거나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유형지로 함께 가야 했는데, 귀족신분이었던 이들은 대부분 헤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남편들과 함께 유형지로 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박물관이 된 발콘스키 집 안에는 제카브리스트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삽화 등이 방과 복도에 꽉 차있고, 당시에 정치토론과 시 낭송 그리고 음악회를 열었던 거실과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이드 최군이 창문 옆에 있는 조그만 인물상 앞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40센티미터나 될까? 동으로 만든 조각 같은데 조각 전체가 검은 모습이어서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그 조각상은 바로 푸쉬킨(1799~1837)의 모습이라고 한다.
왜 푸쉬킨의 조각상이 여기에 있지?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인 그는 명문 귀족의 장남이었으나, 외조부가 표트르 대제(大帝)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기 때문에 열등의식도 많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 아래 자랐고, 다니던 학교의 자유주의적 기풍과 나폴레옹 전쟁을 통한 근대적 의식 등으로 제카브리스트들과 매우 깊은 유대를 가지게 되었단다.
1825년 12월 제카브리스트 괴멸 후, 그는 이듬해 수도로 소환되었다. 아내 나탈리아를 짝사랑하는 단테스와 결투하다 38세의 나이에 죽게 된 푸쉬킨도 그런 연유로 발콘스키의 집에 조각상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카브리스트였던 트루베츠코이의 집도 제카브리스트 기념관으로 만들어졌는데, 전면 개보수 작업 중이라서 우리는 가보지 못했다. 이 트루베츠코이의 아내가 바로 예카체리나인데, 그녀는 이르쿠츠크 문화전통을 세운 제일의 공로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발콘스키의 집에도 발콘스키의 아내였던 마리아여사 못지않게 예카체리나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동토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트루베츠코이의 집이나 발콘스키의 집은 문화센터의 역할을 했고, 그 전통이 오늘날의 이르쿠츠크문화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발콘스키는 톨스토이의 먼 친척이었고, 발콘스키를 숭배하던 톨스토이는 그 유명한 소설 <전쟁과 평화>를 쓰면서 그를 실제적인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바이칼여행을 마치고 이르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초원길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4박5일 동안 달려야 한다. 기차를 타기 전에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아리수라는 식당으로 갔다. 전주식 한정식 집이었는데, 의외로 러시아사람들이 여러 명 식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음식을 좋아해 이 식당을 찾는 러시아인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마침 박대일선생이 전송을 하러 나와 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박선생은 이르쿠츠크에서 여러 해 여행사를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바이칼여행을 이렇게 단기간에 해치우는 것은 무리라고 이야기한다. 최소한 5~7일간은 둘러보아야 바이칼다운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이처럼 3일 정도로 휙 둘러보고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수긍이 간다.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 너무 짧은 기간에 보고 가려니 여러 가지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박선생은 ‘사간달리’라는 차를 한 봉지 선물로 주었다. 사얀산맥에서 따온 향이 매우 짙은 차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사간달리를 마셔보니 그 짙은 향이 나를 저 먼 시베리아로 다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저녁을 먹자마자 하바로프스크행 열차를 타기 위해 이르쿠츠크역으로 갔다.
김상윤<지역문화호남교류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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