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호 : 신비한 검은색의 아름다움
| 2011. 09.30(금) 13:40 |   |
임종호의 그림을 보면서 색채이미지가 어쩌면 저처럼 맑고 투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밝고 화사한 원색 때문만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의 그림에서 원색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검은색이 주도하는 화면에서 원색은 부분적으로 채용될 따름이다. 더구나 우리가 원색으로 이해하는 색채들도 순도가 높지 않은 중간색일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혼색으로 이루어진 중간색조인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면에서는 순색보다도 더 순도 높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검은색과의 대비로 인해 시각적인 인상이 한층 명료해지는 까닭인지 모른다.
그렇다. 이제껏 그처럼 맑고 투명한 검은색을 과연 본 일이 있었던가 싶으리 만치 아름답고 짙다. 순도 높은 검은색은 상대적으로 유채색을 더욱 선명하고 명료하게 떠받치게 된다는 사실을 그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이 맑고 투명하게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검은색과의 절묘한 대비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그만의 감각으로 찾아낸 색채의 연금술인 셈이다. 이런 형태의 색채감각을 가진 화가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단지 색채의 순도를 높인대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힘겹게 터득한 색채감각이리라. 아마도 후자 쪽에 가까우리라 생각되는데, 적어도 그처럼 맑은 색감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깊은 사색 및 성찰이 있었지 않나 짐작될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색채이미지가 그처럼 맑고 투명하게 보이는 데는 평면적인 이미지의 도입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의 그림에는 다양한 형태의 소재 및 인물이 등장하는데도 혼란스럽지 않다. 흡사 섬세한 미적 감각에 의해 미려하게 꾸며진 쇼윈도를 보는 듯하다. 도무지 소재들이 엉키는 데가 없다. 그림을 지배하는 시각적인 이미지는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차분하다. 이는 아마도 평면적으로 처리되는 색채이미지 때문인지 모른다. 정제된 듯한 중간색조는 팔레트에서 충분히 혼합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멀리서 보면 색종이를 오려붙인 듯한 인상이다. 형태는 그처럼 선명하고 명쾌하며 명확하다. 그러기에 숨겨지는 듯한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소재는 저마다 명료하게 자리한다.
이처럼 명료한 이미지는 형태의 단순화와도 관련이 있다. 그의 그림에서 모든 형태는 단색조의 평면적인 이미지로 처리되고 있다. 생략 및 절제 그리고 단순화와 함께 부분적인 형태의 변형 왜곡은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평면적인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형태의 단순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명암을 배제하고 세부묘사를 생략함으로써 평면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의 조형어법은 이처럼 지극히 간결한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기에 어떤 경우에도 시각적인 이미지는 간명하다.
어디 그 뿐인가. 그의 그림은 소재 및 내용조차도 색채이미지와 부합된다. 마치 정화된 세상을 보는 듯하다. 그림에 따라서는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 그대로 가감할 데 없는 선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과 유리된 낯선 정경이 아니다. 일상적인 실내공간을 배경으로 하는가 하면, 일반적인 풍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특히 알몸의 여인들이 함께 하는 숲 속 풍경은 그야말로 낙원이지 싶다.
고갱의 그림이 세상사람들에게 남태평양의 타히티가 지상의 낙원이리라는 꿈을 안겨주었듯이 그의 그림에는 그처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감각을 상실한 이상주의만이 존재하는 그런 세계는 아니다. 현실에 닿으면서 그 현실로부터 한 차원 승화된 미적 감각의 세계일 따름이다. 한마디로 부정적이거나 세속적인 감정이 개재할 수 없는, 오직 순수한 시각적인 체험만을 가능케 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는 그림으로서 구현할 수 있는 하나의 이상적인 세계인지 모른다. 이처럼 순수하고 순정한 세계는 그 자신의 인생과 또는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삶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한 형태인 까닭이다.
그림을 구성하는 인물 및 소재들은 한결같이 꿈과 낭만과 사랑의 감정을 불러들인다. 갖가지 꽃과 나비는 물론이려니와 꿩 크낙새 부엉이 공작새 학 따위의 조류와 사슴 염소 등 가축 및 짐승 그리고 나비 따위가 여인들과 함께 한다. 이들 소재가 이합집산하면서 그가 만들어 놓은 조형적인 규칙에 응답한다. 조형적인 규칙이란 위에 제시한 중간색조 및 형태의 단순화 그리고 평면성이다. 이러한 조형의 규칙성은 남도지방의 풍경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촌이나 산촌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남도풍경은 그의 화면에서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바뀐다. 검은색이 지배하는 미묘한 시각적인 이미지 위에서 적요와 순결의 정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화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무연의 화면구조를 통해 동양화의 여백개념과 유사한 정서를 맛보게 된다. 이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이다. 그는 검은색의 신비, 그 베일 한 겹을 벗겨낸 것이다. 그는 검은색을 통해 이전의 화가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 그 신비의 퍼즐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임종호 :화합과 조화, 평화가 있는 맑은 세상
그림은 어떤 경우에도 화가 자신의 이상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상적인 세계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한 꿈의 공간인 셈이다. 스스로 가능한 조형적인 상상력을 자극해 이루어놓은 꿈의 공간은 동시에 일상적인 우리의 삶의 공간을 확장시켜준다. 그로부터 우리는 정서적인 안분을 맛보는 한편 승화된 현실로서의 이상향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임종호는 세상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림을 보면 한 눈에 그가 지향하는 이상향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의 이상향은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다. 거기에서는 질시와 미움과 다툼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세상 만물이 한데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세상이 전개된다. 그림과 마주하면 누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오직 아름답고 착하고 진실한 삶의 방식만을 허용할 뿐인 이상적인 세계관을 웅변하는 것이다.
‘한나절 풍경’이라는 일관된 명제는 하루의 반을 의미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어느 특정의 시간대를 상정한다. 즉, 아침과 저녁 사이, 밝고 따사로운 햇빛이 넘치는 시간대를 의미한다. 일조량이 가장 많아 모든 생명체가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 둔 채 태양의 눈부신 빛을 온몸으로 한껏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이때는 생명의 환희가 절정에 이른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멋을 마음껏 발산한다. 눈이 시릴 만큼 밝고 맑은 색채의 광채는 바로 그러한 시간대를 암시하는 것이다. 도대체가 그늘과 같은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이 화면 전체가 오로지 밝고 맑은 색채의 향연으로 출렁인다. 빛과 색채가 만들어내는 조형의 마술인 셈이다. 그러기에 모든 생명체는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며 스스로 빛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는 인물을 포함하여 네 발 짐승과 새들, 곤충들, 그리고 다채로운 색깔과 모양을 가진 꽃과 나무들이다. 이들 소재는 화면을 빼곡히 채우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한편 조화와 화해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서로 한데 어우러짐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절묘한 조화의 미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들 소재는 새삼 조물주에 의해 주어진 생명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그렇다. 그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뭇 생명체들의 존재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차별이 없는 세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들 소재는 상하전후좌우 개념과 무관한 자유로운 존재방식을 가진다. 그러기에 하늘과 땅과 바다의 구분이 없다. 실제적인 공간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세상이다. 하늘 땅 바다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그야말로 이상경을 연출한다. 그곳은 오직 생명을 찬미하고 생의 환희를 노래하는 이상적인 세상인 것이다. 새와 꽃과 물고기가 하나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설정은 현실감각을 떠난 환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게도 환상이 아닌 실제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는 현실적인 공간개념을 버리고, 자연의 질서조차 거부한 채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예술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상적인 분위기가 강조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와 다른 원색적인 색채이미지임에도 왠지 현실적인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하다. 이는 아마도 형태가 명확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는 명료하고 명백하다. 오히려 실제의 모양보다 더 강렬하고 명확하다.
이렇듯이 형태가 명확한 것은 역시 평면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색종이를 오려낸 듯 윤곽이 예리하고 명석하게 처리되고 있다. 거기에 부수적인 표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표현하고자 하는 소재 또는 대상의 형태만을 명백하게 나타낼 뿐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종류가 다양할뿐더러 화면을 빼곡이 채우고 있다. 그런데도 신기한 일은 소재들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이미지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다양하면서도 많은 숫자의 소재들이 숲을 이루며 겹쳐지는 상황인데도 서로의 존재를 침해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에서 원색의 물결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다채로운 색채를 동원하지만 결코 복잡하다거나 엉키는 일이 없이 명쾌하다. 소재가 겹쳐지는 데도 겹쳐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소재의 색깔을 저마다 다르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색상이 동일한 소재를 겹치거나 같이 붙여 놓는 일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색채배열에 따른 남다른 감각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구성적인 요소가 강한 그의 그림에서 색채배열방식은 그림의 전체적인 이미지 및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로써 그만의 미적 감수성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조형적인 질서가 만들어지는 셈인데, 이는 평면적인 해석, 원색적인 색채이미지, 구성적인 요소, 그리고 헝클어지지 않는 정연한 색채배열로 요약된다. 소재 하나 하나는 스스로의 존재성을 과시하면서도 주변의 다른 소재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음은 물론 전체적인 조화 및 화합을 위해 기능한다. 이런 방식의 조형어법은 그 어떤 형태일지라도 또는 다양한 소재들이 한데 겹치더라도 시선의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 열린 구조인 까닭이다. 이렇듯이 다양한 소재와 다채로운 색채 그리고 번잡해 보이는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인 이해는 명료하다. 그가 찾아낸 새로운 형식미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 즉 자연계의 생명체는 화합하고 조화롭게 그리고 평화로운 관계를 통해 낙원을 모의한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번잡하고 획일적이며 경쟁적인 인간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되돌아보게 한다. 동시에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 및 삶의 자유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자각케 한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조형적인 형식미는 맑은 세상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mtong@mtong.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