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섭 : 속기를 걷어낸 단아한 운필
| 2011. 09.30(금) 13:35 |   |
현림 정승섭의 최근 작품과 마주하면서 새삼 수묵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속기를 거두어낸 단아한 수묵의 운필을 보면서 눈부신 햇살이 내려앉은 한 겨울 눈밭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연상하게 된 것이다. 차가운 겨울 공기는 정신을 곧추세우도록 심신을 긴장시키고 시야를 넓혀준다. 겨울날의 청정한 기운이 視程시정을 확장시켜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차가운 공기는 소리를 맑게 하고 보다 멀리 전한다. 그의 수묵화에서는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그는 수묵으로 그림을 시작한 이래 문인화적인 풍격을 놓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국전 공모전 작품의 대다수가 인물을 제재로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화를 통해 작가적인 역량을 쌓았다. 산수화만을 선호하는 화단 분위기에 따라 그 또한 전시회를 통해 발표하는 작품 대다수가 산수화였다. 이렇듯이 인물화에 능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보여줄 기회가 없어 산수화 화가로만 알려져 있는 형편이다.
화단 상황을 볼 때 산수는 물론이요, 인물에도 일가를 이룬 경우는 흔치 않다. 화가라면 응당 그 어떤 물상의 형용에도 막힘이 없어야 한다지만, 이즈음 수묵화에서 인물을 보기는 좀처럼 힘들다. 설령 인물에 능숙하다고 하더라도 기술적인 완성을 뛰어넘는 문기를 획득한 경우는 더욱 힘들다. 그래서 문인화적인 격조를 갖춘 인물화가 정말 귀한 세상이 됐다. 사정이 이러하니 산수화 속에서나마 인물을 볼 수 있는 일도 참 드물다.
이전의 수묵산수화에는 그래도 점경 형태의 인물이 등장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의 산수화에서 인물을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인물을 그리는 솜씨가 괜찮다고 할지라도 산수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 않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기에 아예 없는 편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그는 되레 인물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의 최근 산수화에서는 인물이 등장하는 빈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자연미 감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물의 등장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는 그 자신의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관심이자, 주변 인물에 대한 관심의 반영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정황을 보면 산방에 앉아 책을 읽거나, 초옥에서 그림이나 글씨는 쓰거나, 차를 즐기거나, 혹은 명상하는 모습, 그리고 눈을 쓰는 촌로가 있다. 이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들 주변 사람들의 일상사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산수화는 애초부터 매양 명사대천이나 기암괴석이 도열하는 장엄한 산세를 찬미하는 시각이 아니었다. 자연에 어우러지는 인간 삶의 모양에 애정이 담긴 시선을 주었다. 명산대천을 실사할 경우에도 대다수의 작품은 절이나 암자 또는 가옥이 함께하는 산수였다. 자연미를 해치지 않는 유려한 곡선의 기와집에서 느끼는 그 온기는 인간의 체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산수화는 언제나 인간 삶이 중심이 되는 풍경을 지향한다. 인간이 배제된 빼어난 자연미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의 존재감을 중시한 것이다.
인물이 들어 있는 산수는 확실히 생기가 감돈다. 동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존재인 인물은 응당 산수 가운데 중심이 된다. 즉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산수가 되는 것이다. 정황이 이러하니, 자연경치를 감상하는 산수를 위한 산수가 아니라 인물을 위한 산수가 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화면을 주도하는 형국이다. 인물과 자연이 정겹게 어우러지는 그의 산수화를 통해 새삼 수묵산수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담담하고도 잔잔하게 전개되는 그의 필치는 결코 감정의 과잉을 허락하지 않는다. 언제나 극도로 절제된 마음가짐으로 필을 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어느 작품이나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감상자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점 하나 선 하나 허투루 놓지 않는다는 자기절제 및 정련된 미의식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 마음가짐이 감상자에게 그대로 전이되는 것이다. 최근 작품에서는 이러한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배어나온다. 이제야말로 사회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한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일체의 욕망을 소진, 탈속한 선인 같은 삶의 태도를 견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허심탄회하게 세상을 소요하고 관조할 수 있는 진정 자유로운 시간의 강으로 심신을 던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필치는 이전보다 한층 담백하고 한가로우면서도 살가워졌다.
농묵과 담묵을 적절히 안배하면서 물상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솜씨는 오랜 실사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웅변한다. 보지 않고도 능히 산수를 전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실사의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 물론 사생을 기반으로 한다지만 정작 필을 든 시간에는 실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아무리 자연경치가 빼어난 구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산수경은 따로 있기에 첨삭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실경에 의해 경물의 형태를 파악함은 물론 비례를 익히고 손의 기술을 숙달하게 된다. 이 과정이 계속되면 심안이 갖추어져 물상과 마주하지 않더라도 산수경치에 대한 응용력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심안에 의해 걸러진 산수의 묘경을 간단히 장악하기에 이른 셈이다. 그의 산수가 실제의 자연보다도 더 간곡한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름 아닌 심상의 반영에 있다. 그의 심상에 비친 산수경은 일테면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순도를 높인 정화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산수에는 그런 정갈함이 깃들이고 있다. 여백을 많이 활용하는데 따른 시원스러움, 즉 시각적인 개방감과는 다르다. 정갈함이란 일테면 그림 속에 흐르는 기운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담백함과도 상통한다. 달리 해석하자면 기교에 치우쳐 산만하기 쉬운 정서 또는 속기와는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생략하고 비우는 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경계도 아니다. 오직 금욕적일 만큼 엄격한 자기수양을 통해 익힌 고요한 품성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산수는 작품에 따라서는 번다하다고 할 만큼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런 작품일수록 되레 더욱 간결하게 보인다. 어쩌면 역설적인 이런 결과는 수묵의 농담변화를 적절하게 구사함으로써 실현되는 공간적인 깊이, 즉 거리감과 무관하지 않다. 거리감이 잘 표현되니 물상들이 겹쳐지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입체감 또는 심도는 물상의 형태를 포함하여 그 주변정황까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의 산수화가 지향하는 곳은 일테면 선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매한 인격미를 최선으로 하는 문인화로서의 격조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삶과 연관된 속박에서 초탈한 도인의 경지를 이상으로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이는 정신과 행동이 일치되는 지점으로서 궁극적으로 철학적인 성찰에 따른 이상적인 인생관 및 세계관의 발로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림 속에 담을 수 있는 이상경인 것이다.
산수화는 실경으로 시작하는 것이 온당하다. 필법, 즉 기술을 익힘과 동시에 물상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심상이 명료해지는 단계에 이르면 그 때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관념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필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가 공력이 요구되는 실사에 진중한 태도를 보였던 것도 득의에 찬 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의 그림은 실사이든 관념이든 산수화로서의 이상경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인의 격조 및 철학적인 사유의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관념산수의 맥을 찾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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