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우 : 야성으로 춤추는 ‘붓 너울’
| 2011. 09.30(금) 13:10 |   |
유승우의 작품을 보면서 야성을 느낀다면 그것은 시골에서 살고 있다는 데 대한 선입견 탓일까. 아니, 선입견이 아니라 응당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십여 년 가까이 도회지를 떠나 자연과 벗해왔다면 그러한 삶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지 작업에 반영될 수밖에 없겠기에 그렇다. 자연적인 삶은 감정 및 정신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보고 듣는 것, 즉 몸으로 부딪치는 체험이야말로 산지식이기에 그렇다. 산지식은 확신을 갖게 만들고, 확신은 스스로의 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뿐더러 자연에 대한 체험적인 학습은 성격 및 체질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단순한 신체적인 기능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림 그리는 행위는 감정 및 정신 그리고 신체적인 리듬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연성, 즉 야성이 체질화되었다면 필경 그림 속에 그러한 요소가 반영되기 마련이리라.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야성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억지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속에 엿보이는 야성은 거칠다거나 투박하거나 촌스럽다는 식의 일반적인 인식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붓의 움직임이 활달한 나머지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표현에서 야취가 짙게 풍긴다고 보면 좋다. 야취는 아름다운 자연이 만들어내는 정취를 즐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야성이란 것도 야취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거기에는 분명히 지적인 세련미가 깃들이고 있다. 이로 미루어 자연을 즐긴다는 의미를 애써 부정하지 않는 듯하다.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야취란 어쩌면 그 자신의 내부에 숨겨진 자유정신의 표상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지 모른다. 시각적으로는 다듬어지지 않아 거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문명의 냄새가 배어 있는 듯싶은 이중적인 이미지이다. 한마디로 순화된 감정의 표현에 가깝다. 그 순화된 감정이란 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습성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지식인으로서의 삶의 정서에 합당한, 즉 윤리적인 행동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자기절제의 상황으로 굳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야취는 지적인 정신활동이 배설한 의식의 침전물일 가능성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명상 또는 관조의 세계로 이끄는 정신의 유희일 수도 있다.
그는 그림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한동안은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는, 반복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면서 화면은 고통의 표정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풀리지 않는 응어리와 같은 침울한 기운이 팽배하고 있었다. 자기부정 행위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으랴. 지우고 덧칠하고 또 지우는 행위의 반복은 그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자신은 그림이 그러한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이제 그의 작업은 그처럼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와 보다 자유롭고 상서로운 세상의 기운과 만나고 있다. 사회라는 경쟁적인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일체의 세속적인 욕구를 떨어버리고 났을 때 홀연히 자연의 품속으로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 자연을 통해 그는 야성을 취하면서 점차 부드럽고 따뜻한 자기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를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로부터 경직된 시각을 버릴 수 있는 동기를 마련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림 속에 야취를 담을 수 있다는 것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감응의 한 표현일 수 있으리라.
어찌됐든 그림 속에서 야성 또는 야취가 농후하다는 것은 극단적인 세련미로 흐르는 현대회화의 한 속성과는 엄연히 다른 방향을 시사한다. 점 하나 선 하나가 의식화되어 나타나는 현대적인 세련미는 장식성을 의식한 결과물이다. 표현의 순수성을 취하기보다는 갈등구조를 드러내지 않는 순화된 의식의 잔상을 잡으려 노력하는 것이 현대회화의 속성이다. 그러기에 가능한 한 어떤 질서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질서란 조형적인 형식미를 말하는데, 현대회화는 너무 서둘러 거기에 스스로를 맡기려는 경향이다.
이에 비해 그의 작업에서 간취되는 야성은 보다 자유로운 숨결을 중시한다. 흡사 바짝 다가서면 거친 호흡이 후각을 간질이는 듯한 그런 풋풋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장식적인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길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야생성, 그 활성화된 몸짓을 재현하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붓의 움직임은 물감을 통해 싱싱한 생명의 기운을 도처에 흘리고 있다. 캔버스에 그처럼 생기 넘치는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쫓고 쫓기는 짐승들이 눈 위를 숨가쁘게 내닫듯이 힘차고 우직스러운 붓 자국이 선연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는 듯한 쾌적한 감정을 유발한다. 단순히 시각적인 쾌감에 머물지 않고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뜻이다. 감정이 움직인다는 것은 감동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미적 감흥이 이끌어내는 감동의 조짐일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아주 단순하다.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단지 내적인 흥취에 따르는 붓의 놀림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 붓 놀림은 어느 면에서는 무질서하고 난삽하게 보이는가 하면 격정적이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일정한 리듬을 타며 연속적인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경직되지 않고 다만 유연할 따름이다. 무질서하다거나 난삽하게 보이는 붓 자국일지라도 거기에는 일정한 통제기능이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어떤 보이지 않는 선, 즉 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자기절제 회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질서하고 난삽하게 보이는 이미지야말로 야성의 발로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일지라도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결코 허망하지 않다. 거기에는 거역할 수 없는 자유로운 생명의 기운이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묵화의 갈필과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는 거친 붓 자국은 사뭇 역동적이다. 더불어 리드미컬하다. 거친 가운데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형국이다. 그처럼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하는 양면성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변환한다. 연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타악기의 리듬이 몸과 마음을 흔드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하듯이,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크고 작은 무수한 붓 자국도 그와 유사한 감흥을 유발한다. 흥에 겨워 저절로 흥얼거리는 음률처럼 그런 흥겨움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표현방법에서 일정한 패턴이 있다. 붓의 움직임이 그야말로 무심필처럼 자유로운 듯하지만 내적인 리듬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연속적인 흐름을 가진다. 그러나 이 세상을 이루는 온갖 물상의 형태와 연관성을 가지는 그 어떤 정황도 포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마음속으로 그려지는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순수한 추상의 세계일 따름이다. 무엇을 의식하지 않은 채 단지 작업하는 순간의 미적 감흥, 즉 신명이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붓이 거기에 응답하는 형태이다. 그만큼 즉자적이고 즉흥적이다.
이러한 방법은 미적 감성의 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지 모른다. 즉흥적이면서도 자유로운 발상에 이끌리는 그의 미적 감수성은 아주 민감한 붓의 감촉이 이끄는 대로 너울너울 춤을 춘다. 무법인 듯하면서도 끝내는 통일된 조형의 미로 귀결하는 그 춤사위는 자연의 리듬에 맡기는 형태가 된다. 그 리듬은 혼돈 속의 질서처럼 하나의 내적인 법칙을 따른다. 그러기에 혼탁하지 않다. 형태를 배척하는 추상적인 혼돈 속에서도 조화의 미를 추구하는 까닭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어떤 경우에라도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과잉이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을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캔버스에 남겨지는 붓 자국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의 추상언어는 그런 미묘한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내심 그와 같은 이미지가 표출되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의식하지 않을지언정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당연시하고 있기에 그렇다. 아니, 그 자신이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느끼며 사색하는 것이란 대개가 자연이 빌미가 되고 있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일체의 간섭으로부터 놓여난, 완벽한 진공의 상태와 같은 감염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 및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다. 그런 연후에 마침내 자연조차도 놓아버리고 홀연히 자유로운 초법의 경계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적어도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그의 작업은 학교교실에 마련한 차실의 맷방석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차실 옆에 위압적으로 밀집해 있는 왕죽 대밭에 깔린 댓잎을 보고 있는 듯하다. 수십 년 동안 쌓이고 쌓인 댓잎 더께는 반복적인 행위로 덧쌓이는 붓질의 두께와 한통속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작품은 물 비늘처럼 혹은 새털구름처럼 아주 가볍고도 경쾌한 이미지를 오버랩시킨다. 단지 보여지는 사실과의 연관성을 가지는 것만은 아니다. 대숲을 사납게 휘젓고 지나가는 거친 바람소리는 어떠하며, 화실을 가까이 감싸고 있는 수십 년 생 유자향과 치자향 그리고 인동꽃 향기도 물리칠 수 없다. 아니, 그보다는 폐교 너른 마당을 활개치며 무성히도 세력을 확장해 가는 여름날의 잡초들의 이미지를 외면할 수 없다.
조금은 감상적인 이미지로 서술되는 이런 풍경은 바로 그가 머물고 있는 전남 장흥 관산의 폐교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유희이다. 그는 폐교가 된 이 학교에서 수년 째 수도자처럼 살고 있다. 그러면서 주변에 산재한 유적을 꼼꼼히 챙긴다. 역사유적이란 다름 아닌 그 자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살다간 흔적이다. 역사유적은 사뭇 교훈적이다. 그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일이야말로 인간으로의 삶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주변에 산재한 역사유적을 찾아다님으로써 새삼 인간 삶이란 것도 결과적으로는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것임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외부와 거의 절연되다시피 한 벽지에서 살면서도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것은 차를 통해서이다. 폐교에 화실을 차리고 작업하면서 배운 것은 차였다. 차는 부질없는 욕망을 녹이는 데 아주 긴요한 약이었다. 단순히 찻잎을 달여 마신다는 그 단순한 행위에는 형언할 수 없는 많은 가르침이 녹아있었다. 차를 마시는 행위를 도라고 말하는 데는 필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차는 정신적인 빈곤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벗이면서 동시에 은거하는 그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손쉬운 언어였다. 그와 면식이 있는 인근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먼 곳에 사는 지인들 또한 차를 핑계로 심심찮게 폐교를 찾는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지적인 싹이 자라고 있던 초등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마침내 폐교라는 서글픈 정서를 남기게 되는데, 그 낡은 시간 속에 파묻혀 사는 그를 찾는 것은 도회지와 완벽하게 차단되는 공간에 지친 심신을 방목하고 싶은 까닭이리라. 그렇다. 폐교라는 퇴락한 우수에 심신을 맡기면서 잠시 자연의 샤워를 즐기고 가려는 것이다. 물론 자연의 샤워를 주도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가지는 예술가 특유의 정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이런 생활을 통해 자칫 잡초처럼 무성해지기 십상인 미적 감수성의 촉수를 닦아낸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온 것이 적지 않은 시간의 켜를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심신을 맑게 만들면서 사유의 깊이에 이르렀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자연은 단순히 보여지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연은 너무도 평범한 스스로의 일상 속에 숨겨진 생명의 순환이라는 준엄한 법칙을 통해 그를 일깨우고자 했다. 그는 자연의 가르침에 충실히 훈도되는 제자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습득된 야성으로 붓을 쥐는 것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라든가, 그 이미지가 은연중에 발설하는 정서는 모두가 자연에서 솎음질한 것들이다. 바꾸어 말해 그의 그림은 정제된 자연의 이미지를 받아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그는 자연에 깊숙이 들어가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 속내까지도 들춰내고 또 그로부터 비롯되는 아름다운 정서에 감염되고자 한다. 그의 그림에는 결코 친근하지 않은 이미지로 채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서 현실적인 이미지만 탐하지 않는다면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어렵지 않다. 그의 그림에 표현되는 붓의 자국은 어떤 경우에라도 그가 보고 느낀 자연에 대한 인상과 더불어 사색을 통해 걸러진 정신의 그림자인 까닭이다.
예술산책 - 미술
예술가에게 공백은 절망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창작활동을 중단한 채 수십 년을 예술 외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일이다. 예술가에게 수십 년이라는 공백은 거의 소생불능의 상태로 무너진 삶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 더러는 그런 죽음과 같은 절망에서 기어 나와 불현듯 소생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마치 고목에서 어느 날 문득 새순이 돋아나듯 말이다. 이처럼 공백을 이기고 소생하는 경우를 보면 때로는 예술이란 지속이나 단절, 또는 늦고 빠름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예술에 대한 열망만이라도 놓지 않는다면 언제 어떤 식으로 피어날 수 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지난 2월24일부터 3월6일까지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유승우전’은 붓을 손에 놓은 지 20년만에 준비한 개인전이었다. 이번 전시회는 그에게는 잃어버린 세월을 만회하는 것은 물론 화단에 그 자신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묻는 시간이었다. 실제로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홀연히 서울을 떠나 거의 은둔하다시피 했다. 간간이 들여오는 소식으로는 일단 그림은 그리지 않고 있다는 정도였다. 화단에서도 그의 동정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진 탓에 이번 개인전은 적어도 화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러면서도 의구심 반, 호기심 반으로 전시장을 찾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3개 층을 메운 작품을 보면서 과연 그가 진정 붓을 놓고 있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100호에서 500호에 이르는 대작을 포함하여 모두 60여 점의 작품량도 그러하거니와 다양한 형태의 작업은 그의 공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불과 2년 전까지는 작품을 전혀 하지 않는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가 돌연히 창작에 대한 욕구가 되살아나면서 다시 붓을 들었다. 잃어버린 손의 감각을 되찾는 동안에도 손이 좀처럼 풀리지 않아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쑥 손의 감각이 살아나면서 미친 듯이 작업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의 대다수가 겨우 6개월만에 제작되었다. 이 정도면 놀라운 작업량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화단과의 20년의 간극을 단숨에 메울 수 있었던 것
이다.
그의 작업은 순수추상이다. 구체적인 형태를 갖지 않는 뜨거운 추상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형식논리를 가진다. 전적으로 미적 감수성이나 미적 감각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의 미의식 및 조형어법으로 감정을 조율하여 정연한 형식논리에 대입시킨다. 이는 거의 유사한 패턴으로 진행되는 반복적인 붓의 흔적에서 알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붓의 흔적으로만 남겨지는 아주 단순하고 단조로운 작업방식을 보여준다. 텅 비어 있는 화면에 미끄러지듯 흘리고 가는 몇 개의 단출한 선이 전부인가 하면, 마치 잔디를 뜯어 캔버스에 뿌린 듯한 반복적인 선이 무수히 화면을 덮고 있을 따름이다. 그처럼 단순한 선과 무수히 반복되는 선은 언뜻 자유분방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자신의 미적 감각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단속적인 선이 반복되고 교차되며 중첩되는 가운데서도 리듬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리듬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생기, 즉 생동하는 기운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답습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짤막한 선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생기를 쏟아내고 화음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들이 지어내는 이미지는 아주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닌다. 인위적인 조작이라는 혐의가 없는 표현적인 순수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표현은 누구라도 가능할 듯 싶지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우연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까닭이다. 이와 같이 인위성이 개재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표현은 다름 아닌 자연에서 습득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8년 째 폐교에서 생활하고 있다. 외부에서 이따금씩 찾아와 차를 함께 하는 소수의 지인들을 통해 간신히 세상얘기를 듣는다. 물론 티브이도 없고 신문도 오지 않는다.
이처럼 외부와 절연되다시피 한 시골생활을 통해 그는 풋풋하고 투박한 흙의 기운을 끌어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무뎌진 감성을 열어놓고 자연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붓을 놓은 대신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연의 생태를 닮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뒤란에 그득한 대숲을 할퀴는 거친 바닷바람소리와 때로는 후둑이는 죽비소리를 벗삼아 미적 감수성을 살찌웠다. 그런가 하면 학교를 감싸고 있는 유자향이며 인동꽃향 그리고 치자향을 통해 자연의 속내와 교감하였다.
어쩌면 그가 배설하듯이 쏟아내는 무수한 붓자국, 즉 선들은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인지 모른다. 그렇다. 그는 단지 자연의 대리인 역할에 그치고자 하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그의 조형언어는 가장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되어 있다. 거기에 그 자신의 체취를 담고자 했다면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의 때를 거두어내지 못했으리라.
그의 작업은 전면회화 형식이라는 현대회화의 한 속성을 지니면서도 결코 낡은 관념의 창고에만 갇혀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현대회화에서 경원시해 온 자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고자 한다. 굳이 자연물상과 합치되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실성을 구현하려는 것이다. 무수히 난비하는 붓자국에 의해 만들어지는 선의 반복을 통한 집합 및 중첩이라는 방법으로 뱉아내는 이미지는 자연의 어떤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럴 때 그와 같은 이미지는 별안간 극렬한 사실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의 작업은 바로 이와 같은 자연의 생생한 숨결을 이미지화하는 일이다. 어떤 특정의 형태에 한정한다거나 또는 형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아닌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업에서는 풋풋한 자연의 향기가 느껴진다. 왜곡된 관념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무엇이리라. 자연에서 보고 습득한 것을 그저 캔버스에다 온몸으로 실천하려는 것이다.
mtong@mtong.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