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란숙: 현대적인 미적 감각을 적극적으로 반영
| 2011. 09.30(금) 13:37 |   |
그러나 그림으로 표현되는 물상의 형태는 사실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평면 위에 실제를 가장해서 묘사한다는 점에서 사실과 같을 수 없으며, 더구나 물감이라는 인위적인 재료가 가지고 있는 허구성 때문에 실제와는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그 다르다는 점이야말로 재현적인 그림의 존재성이다. 재현적인 그림은 실제보다 아름답게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의 미의식 및 미적 감각에 의해 실제와는 다른 회화적인 해석이 덧붙여지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재현적인 그림을 실제와 동일시하려 한다. 회화적인 허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재현적인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오해는 그런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는 비극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그 비극적인 상황을 개의치 않으면서 소신을 다해 진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 물상을 재현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하는 그림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란숙이 그림이 그렇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그림 속의 실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 사실적인 느낌은 때로 숨이 막히게 할 정도로 박진감을 느끼게 한다. 캔버스라는 평면공간에 그려진 일루전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러한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허구적인 세계라는 사실이 도대체 실감나지 않는다. 그래서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실제보다 더욱 실제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인상이야말로 바로 그가 노리는 점인지 모른다. 허구가 실제처럼 보인다면 적어도 기교적으로는 더 이상 이를 데 없는 데까지 갔다는 말이다. 재현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실적인 묘사력, 그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평가할 만한 하나의 뚜렷한 성과이다.
이처럼 사실주의의 굳건한 반석 위에 스스로를 올려놓는데 성공한 그는 이제 실제의 재현에 그치지 않는, 회화적인 가치라는 새로운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회화성이라는 문제를 부단히 의식하며 작업해 왔다. 이러한 의지는 소재 선택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는 정물화에 전념하고 있다. 정물화는 풍경화나 인물화와 달리 소재의 다양화 및 구도 및 구성의 변화를 통해 그 자신의 조형의지를 관철하기가 가장 적합하다. 다시 말해 미의식 및 미적 감각을 반영하는데 효과적인 장르인 것이다.
실제로 그의 경우 소재선택으로부터 개별적인 세계를 확보하고자 한다. 대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광주리라든가, 수를 놓은 형형색색의 반지고리, 조각보, 수저집, 노리개, 주머니 따위의 갖가지 생활소품을 선호하고 있다. 이들 소재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전통적인 한국여성들의 일상사에 빈번하게 쓰였던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히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이미 서구적인 현대식 생활방식에 젖어든 우리들 삶에서 사라진 존재들을 새삼 들추어내는 것은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 소재가 가지고 있는 형태 및 색채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회화적인 조형미를 충족시킨다.
이들 소재를 조합하여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구성 및 구도를 모색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전통적인 생활소품들이 가지고 있는 색채 및 형태의 아름다움은 그림의 시각적인 인상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색채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앙징맞은 형태미는 장식적인 효과가 크다. 사실 현대인의 생활공간은 색채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작 원색적인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살리고 있는 일은 흔치 않다. 이에 비해 전통적인 생활소품들에 쓰인 원색적인 이미지는 현대인의 감각으로 보더라고 무척 세련되고 조화롭다. 원색은 조화롭게 배치, 배열하지 못하면 자칫 천박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생활소품에 쓰인 색채 배열은 시각적인 화려함은 물론이오,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는 이렇듯이 충분히 검증된 아름다운 이미지를 캔버스에 끌어들임으로써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유도하는 한편 그 자신의 작업이 가지는 의미를 정당화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적중하고 있다. 여성인 그 자신의 감수성과 섬세한 손길로 이들 소재를 조화롭게 배치하여 일차적으로 구성적인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소품들과 바구니 따위의 소재는 실제보다 훨씬 아름답게 재현된다. 현실적인 공간에서 느끼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회화적인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특히 그의 그림은 실제보다 밝고 맑게 묘사된다. 이러한 특징은 그림이란 어차피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그 자신의 감정이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그는 사실적인 재현성을 담보로 하는 전통적인 가치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조형성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가령 같은 크기 및 형태의 대나무 광주리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하는 형태로 화면 전체를 채우는 작품이 있다. 이는 현대회화의 특징 중의 하나인 전면성, 즉 화면 중심을 두지 않고 전체에 균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형식을 도입하고 있다. 역시 그가 의도한대로 이러한 소재의 배열방식은 화면 중심에 소재를 배치하는 정물화의 전통적인 구도와는 다른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동일한 이미지가 반복되는 소재의 배열방식은 확실히 차갑고도 냉정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이지적인 해석의 여지가 있다. 소재가 사실적인 만큼 거기에서는 정연한 흐름을 가지는 질서의 아름다움, 즉 반복되는 리듬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확실히 현대적인 미적 감각의 산물이다.
전래의 생활기물인 대나무 광주리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꽃을 함께 배치하기도 한다. 꽃을 대비시키는 작품에서는 역시 원색적인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밝고 맑으며 쾌적한 정서가 넘친다. 장식적인 측면을 염두에 둔 꽃을 소재로 한 작품은 여성적인 취향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림이 삶의 공간에 놓였을 때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회화가 점차 장식성을 강조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이러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그의 작업은 전통과 현대성의 조화, 즉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인 감각을 적절히 수용함으로써 현대인의 생활정서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 그는 사실주의 조형개념을 그대로 따르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 자신의 미적 감각을 반영함으로써 좀더 현실적인 그림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회는 사실주의 미학개념을 현대성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묻는 자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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