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현명한 농부는 씨앗에 집착한다

2010. 11.13(토) 22:04

인문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기초학문의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걱정이 깊다. 수요공급의 차가운 경제논리가 상아탑에도 휘몰아친 까닭이다. 기업은 당장 써먹을 맞춤형 인재를 내 놓으라고 대학에 아우성을 치고, 대학은 또 이러한 기업논리에 맞춰 춤을 추다보니 빚어지는 현상이다.

문화예술계도 마찬가지다.
기초예술 분야에 몸담은 작가들의 삶이 갈수록 척박해진다. 원형보다는 흥미로운 교잡을 선호하는 멀티아트 유행 속에서 기초예술의 존재감은 단역배우처럼 초라해지고 만다. 변화무쌍한 혼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미디어아트의 현란한 몸짓을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볼 뿐이다.

문화예술계의 이러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다보니 문화생산과 공급의 양 측면에서도 균형이 깨져간다.

소외층에게 공연티켓을 무료로 서비스하는 문화바우처 사업도 지원대상군의 선호도에 따라 지나치게 영화에만 편중되는 형국이다. 무용, 연극과 같은 기초공연예술의 진흥을 위한 취지의 바우처 사업이 또 다른 불균형을 낳고 있는 것이다.

재능 있는 작가 지망생들이 기초예술 분야를 꺼리는 것도 큰 문제다. 소설가를 꿈꿨던 이들은 드라마 스쿨로, 그리고 순수연극을 꿈꿨던 이들은 뮤지컬과 영화판으로 도망칠 궁리에 분주하다. 갈수록 인재가 빈곤해지고 있다.

심각한 현상이다.
이러한 기형적인 쏠림은 결국 ‘문화의 질적 저하’라는 전반적인 현상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기초예술은 문화발전의 종자와 같은 역할과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까닭이다. 종자가 귀해졌을 때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고, 부실한 종자로 품질이 뛰어난 산물을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악순환구조에 따라 엔터테인먼트라는 포장을 앞세운 첨단의 문화산업 또한 점점 더 포장 속 내용물이 부실해지며 경쟁력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미 우리들 주변에서 그 같은 고갈의 조짐은 시작되고 있다.
대규모 영화 제작사들은 좋은 이야기 거리 찾기에 허덕이는 중이고 오페라, 뮤지컬, 미디어아트, 현대무용 등등 모든 종합예술 장르들이 창작 원형의 빈곤으로 활력을 잃어간다. 반면에 문화소비자들의 시선은 갈수록 더욱 높은 곳을 쳐다보기에, 기존의 엔터테인먼트의 기제들은 늙은 기생의 화장처럼 그 초라함이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부실해진 종자가 만든 한국형 문화경작의 증후군들이다.
현명한 농부는 좋은 씨앗을 만드는 일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큰 배는 눈앞의 바다가 아닌 먼 등대의 불빛을 보고 나아간다.

문화를 진흥하겠다고 나선 공적 영역들, 혹은 메세나가 기초예술분야에 더욱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호재< 언론인> pj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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