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칼럼> 화엄사 鳳泉菴 가는 길

2017. 05.22(월) 10:26

한국이 작은 나라 같아도 골짜기 골짜기마다 이야기와 인물들이 숨어 있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는 우리나라에서 주먹이 센 장사 스님을 많이 배출한 절이다. 계룡산 갑사(甲寺)와 함께 화엄사는 터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강해서 역대로 한주먹 하는 스님이 많았다. 1960~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화엄사에 가서 술 먹고 행패 부리는 건달들은 화엄사의 주먹맛을 보고 참회를 해야만 하였다. 화엄사는 좌측 봉우리가 청룡이고 우측에는 봉황이 버티고 있어서일까.

정유재란 때 진주성을 불태우고 전라도 쪽으로 쳐들어오던 왜군을 맞아 결사항전 했던 석주관(石柱關) 전투. 그 석주관 전투에서 보름 동안의 처절한 전투 끝에 모두 사망한 1200명의 승려 가운데에도 화엄사 출신이 많았을 것이다. 왜군들은 석주관을 넘어 화엄사에 쳐들어와 절에 남아 있던 동자승과 노승들을 모두 죽였다고 전해진다. 세상은 정권이 바뀌어서 설왕설래하지만 지리산 화엄사 골짜기의 녹색 신록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푸르기만 하다.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 불변(不變)의 청산이 존재한다는 게 사람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

화엄사 뒤로 올라가면 구층암(九層菴)을 거쳐 봉천암(鳳泉菴)이 나온다. '차나 한잔하자'는 봉천암 암주(菴主)의 연락을 받고 산길을 올라가다 보니 오른쪽에는 채마밭이 있다. 상추, 쑥갓, 고추, 아욱, 고수, 감자, 부추(정구지), 더덕이 자란다. 공양주 보살이 햇볕을 가리는 밀짚모자를 쓰고 그 채마밭에서 상추와 쑥갓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고향에 온 것 같다. 왜 이렇게 한가하단 말인가!

왼쪽 언덕의 비닐하우스에서는 새로 나온 햇차를 멍석에다 깔아놓고 사람 너댓명이 손으로 비비는 작업이 한창이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머리 깎은 백인이 회색 승복 바지를 입고 땀을 흘리며 햇차를 만들기에 "스님이냐?"고 물어보니 템플 스테이 장기 숙박자라고 한다. 독일 사람인데 몇 년 전 우연히 이 절에 놀러 왔다가 좋아서 눌러앉을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일단사(一簞食) 일표음(一瓢飮)'의 경지를 서양인이 안단 말인가! 봉두혈(鳳頭穴) 밑의 봉천(鳳泉)에서 나온 샘물로 햇차를 한잔하였다.

< 건국대 석좌교수 · 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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