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칼럼> “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보세요”

2016. 12.12(월) 10:23

“왜 송악산이에요?” 초등생 일까, 여자애가 곁을 걷던 엄마에게 묻는다. 답이 없자 한 번 더 묻는다. 궁금한 모양이다. 지나치려다 그냥 한마디 해주었다. “소나무가 많아서 송악산이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끼어드니 서먹할까싶어 “저기 보이는 산방산은 산에 방 같은 동굴이 많아 산방산이란다.--내 생각이지만--” 언제 들은 것 같아 생각난 대로 말하고 얼른 앞질러 갔다. 나중에 표지판 설명문을 보니 내말이 크게 틀리진 않았다.

깊은 가을, 제주 송악산 둘레길은 환상 그대로였다. 절벽과 절벽을 잇는 나무데크길, 비취빛바다에 떠있는 형제섬, 산방산 그리고 피톤치드 가득한 솔바람까지---. 올레길 10코스 중심부분이다. 지난해 10코스 걸을 때 비바람 몰아쳐 발길을 돌렸던 길이다. 꼭 다시 걸어보고 싶어 이번 제주행에는 하루를 할애했다.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날리는 하얀 억새들은 잎이 다 떨어져 풍성함을 잃었지만 멋은 그대로였다.

절경을 즐기는 가장 멋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시 외우며 걷기’는 틀림없이 최상위 멋 중 하나일 것이다. 시구 하나하나가 솔바람 속으로 수평선너머로 녹아들어간다. 절경과 시구로 가득 찬 머리엔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덕분에 시도 잘 외워진다. 이번 송악산걷기에는 <노을/이성복> 시 쪽지를 주머니에 넣어 갔다. 문구가 안 떠오르면 쪽지를 꺼내본다.

“당신이 마냥 사랑해주시니 기쁘기만 했습니다 -- 언제 내가 이런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 ‘당신’은 바로 ‘이 절경’이다. 비취빛 바다절경이 나에게 주는 사랑은 한이 없다. 마냥 받기만 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당신 일만 생각했습니다 -- 노을빛에 타오르는 나무처럼 그렇게 있었습니다---- 해가 져도 나의 사랑은 저물지 않고 나로 하여 언덕은 불붙었습니다 -----” ‘나’는 ‘노을빛에 타오르는 나무’가 된다. ‘언덕을 불붙이는 타오르는 나무’다.

멜로디만 붙이면 밥 딜런 같은 음유시인도 부럽지 않을 것 같다. 명상노래 <장미꽃 봉오리가 핀 것을 보세요 / 틱낫한> 멜로디가 떠오른다. “장미꽃 봉오리가 핀 것을 보세요 그리고 갈매기가 비상하는 것을 보세요 / 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보세요 그리고 구름이 떠있는 것을 보세요 / 해와 비로부터 헤어질 시간이 없어요 / 바람으로부터 헤어질 공간이 없어요 / 사물은 자연의 섭리를 따릅니다 ” 물결 출렁이는 소리,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멜로디이다.

느리게 걷는 ‘명상걷기’를 전 세계에 전파한 틱낫한 스님은 삶에 지쳐 외롭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명상걷기를 하면서 시를 되뇌라고 권한다. 걸을 때, 운전할 때도 되뇌라는 그 시를 외어본다. “나는 이미 도착했다, 나는 고향집에 있다./ 바로 여기 이곳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 / 나는 바위처럼 강하다, 나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 궁극의 자유 그곳 대자유에, 나는 언제나 머무노라”

지금 이 순간, 불안한 마음이 바람처럼 자유로워졌나! 마음이 즐겁고 편안해진 것은 틀림없다. 돌아가는 길은 솔숲 가운데를 질러간다. 송악산 둘레길 걷기는 솔숲산과 절경바다가 암송시구와 어울리는 ‘시와 함께 걷기’였다. 솔향기 가득 찬 소나무 길을 걸으며 출렁이는 바다 멜로디를 가슴에 안고 돌아온다.

“사물은 자연의 섭리를 따릅니다.-- -- 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보세요 그리고 구름이 떠있는 것을 보세요 --- 그리고 갈매기가 비상하는 것을 보세요--- 장미꽃봉오리가 핀 것을 보세요---- 해와 비로부터 헤어질 공간이 없어요 --- 바람으로부터 헤어질 시간이 없어요 --- ” 왜 송악산인가, 왜 시암송 걷기인가? 집에 있는 지금도 노을 시구를 외우면 송악산 솔바람이 나를 감싼다.

<언론인>

김종남 mht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