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함칼럼> 내 아내의 비밀번호

2016. 09.20(화) 11:13

비밀번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은행거래는 물론이려니와 내 책상 앞의 PC도 비밀번호를 요구한다. 또 한 번 정해놓은 비밀번호를 혼자만 알고 오래오래 쓰면 좋으련만 자주 바꾸라고 강요한다. 생년월일이나 전화번호, 연속되는 숫자도 안 된다고 까다롭게 군다. 그래도 네 자리 수 정도면 외우고 살만한데 숫자와 영문, 특수기호까지를 섞어 8자까지 쓰라는 곳도 있다. 비밀번호 외우려다 머리가 ‘핑돌’ 지경이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가 갑자기 바뀌었다. 아내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터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이가 들어 이사를 하게 되면 맨 먼저 이삿짐트럭 조수석에 앉아 있어야 된다더니 그 말이 실감났다. 그날 따라 아내와의 통화도 잘 안되었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 나와 집근처 커피숍에 앉아 있으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녁시간이 다되어서야 아내와 통화가 이뤄졌다. 왜 아직도 들어오지 않느냐고 되레 핀잔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대목장 보느라고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는데 비밀번호를 바꾼 것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왜 비밀번호를 바꿨냐?”고 따져 묻자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까닭은 말했는데 치밀어 올랐던 화(火)는 오간데 없고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어머니가 오신다고 해서 어머님 댁 현관 비밀번호와 맞춰 놓았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분가해 살면서 서로 비밀번호를 달리하고 살아가고 있다. 마치 집안에 황금덩어리가도 감춰놓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어머님은 우리들에게는 비밀번호를 공개하고 살고 계신다. ‘공개된 비밀번호(?)’ 인 셈이다. 언제든지 와서 쉬었다 가라는 어머님의 속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그래서 아내도 어머님이 언제든 마음대로 자식 집에 드나드시도록 비밀번호를 맞춰놓았다는데 내가 한참 부끄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혼자 사시는 큰 형수님에게서 배웠다는 것이었다.

시부모가 쉽게 찾지 못하도록 아파트 이름이 복잡한 곳으로 이사해 산다는 말도 있고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경비실에 맡겨놓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눈치 있는 시어머니’라는 세상에서 아내의 ‘위대한 결단(?)’은 칭찬할만하다, 아내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는 봐줄 것 같다.

얼마 전 시골 마을에 이런 현수막이 하나 걸렸다고 지방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다. “에미야∼ 어서 와라, 올해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해주마.” 라는 것이었다. 진도의 한 시골마을 이장단협의회에서 내어 건 것인데 아무리 반쪽 심장의 며느리도 이쯤 되면 함박웃음 한번은 웃어주지 않겠는가? 귀성길의 고단함과 명절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며느리와 자녀들의 일을 덜어주려는 마음으로 현수막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행복이 별것이던가. 지금 같이 있는 것이 행복이고 지금이 금(金)가운데서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가을 초입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는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밀번호가 아닐까?

◇ 지형원 <문화通 발행인>

지형원 발행인 mht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