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운흥사터 벅수가 웃고 있는 까닭은?

전라도문화수수께끼(8)

2013. 09.13(금) 22:55

나주 운흥사지 벅수(좌) 순창읍돌벅수

흔히 알고 있는 ‘장승’이 국도변의 이정표라면, 토박이 말인 ‘벅수’는 마을이나 사찰 또는 성(城) 입구의 ‘지킴이’를 말한다. 전라도 장승·벅수의 사령부는 장흥 보림사와 나주 덕룡산 불회사, 그리고 고개 넘어 암정리의 운흥사터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장승과 벅수의 보물 창고인 전라도에는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884년 건립)가 가장 오랜 금석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乾元 二年(신라 경덕왕 18년, 759년)에 왕께서 특별히 교지를 내려 장생표주를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처럼 우리 지역의 사찰 벅수들은 세운 연대와 다정다감한 얼굴, 확실한 소임을 밝히는 새김글을 몸통에 남겨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받고 있는 유물이 많은 것이다.
서두가 길어졌지만,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 덕룡산 운흥사는 초의선사가 출가한 유서 깊은 곳이지만 이제는 골짜기 깊이 산사의 맛을 느끼는 고찰인지라 찾는 이가 그리 많지는 않다. 절 집 들머리에 마치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을 쏙 빼 닮은 한 쌍의 돌벅수가 300여 년 넘도록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웃고 서 있다.
일반적으로 장승 얼굴은 화가 난 듯한 분노상이나 위협적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시대가 오랜 유물일수록 빙긋이 웃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북 순창읍의 돌벅수는 입을 날름 빼물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며, 남원 산내면 실상사 입구의 대장군은 절빕 입구를 지키는 그 지엄한 소임임에도 눈꼽만큼 혀를 내밀고 있다.
운흥사터 입구의 이 한 쌍의 벅수도 할아버지(높이 207cm)는 탕건을 쓴 얼굴에 동그란 눈과 듬직한 코, 그리고 한 없이 편안한 미소가 일품이다. 턱에는 풍성한 채수염을 두 갈래로 늘어뜨리고 몸통에 上元周將軍이란 음각의 새김글이 있다. 건너편 할머니는 이빨이 몇 개 빠져 합죽히 웃고 있는 전형적인 노인 얼굴이다. 그러나 몸통에는 下元唐將軍(높이 200cm)이 새겨져 있고, 뒤쪽에는 세운 연대를 알 수 있는 康熙 五十八年(숙종 45년, 1719년) 기록이 남아 국가에서 1968년 12월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은근한 미소를 거론하자면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나 충남 서산의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삼존불상이 생각나지만 그런 작품은 종교적인 최고의 경지를 드러낸 전문가들의 작품인지라 비교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또한 불가의 수호신인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은 추상같은 기개와 엄한 얼굴이 보는 이를 오금저리게 하는 반면, 민속신앙물인 이 벅수 한 쌍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라도 보는 양 그 입이 귀에 걸려 있다. 무섭게 새겨 절 집 인근을 어슬렁거리는 잡것 들을 위협해도 부족할 것 같은데 도리어 웃고 있다니 이거 조금 이상하다 싶다.
독재자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긴장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잘 웃는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팬들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삼미 수퍼스타즈 장명부 투수와 해태 타이거즈 시절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투수를 기억해 보자. 안타 하나면 역전될 수도 있는 초긴장의 마운드에서 타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타자는 의아해 할 것이다. 저 사람 왜? 웃지, 도리어 타자가 심리적으로 밀리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너 정도의 타자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실력을 갖췄으니 느긋하게 웃으며 아웃 처리시키고 상황은 종료 되는 것이다.
장승이나 벅수를 만들 때 현장을 참관해 보면 참으로 간섭들이 많다. 땀 흘리며 새기거나 깎는 이들은 한 둘인데 ‘심봉사 눈 밝은 채’ 하는 다수의 어른들이 한편에서 술 마셔가면서, ‘눈이 작네, 코가 크니, 입을 크게 찢으라’는 등 ‘감놔라 배놔라 엎어졌다 뒤집어라 굴러가니 쪼개 놔라’ 식의 별의별 간섭과 시비가 오간다.
이처럼 민속 신앙물인 벅수 같은 제작은 그 지역과 한마을 주민들의 공동 작품인 셈이다. 사람은 정에 막히고, 귀신은 경에 막힌다고 한다. 잡귀들은 경문이야 귀에 못이 박혔으니 무심할 수 밖에. 그런데 절 집으로 들어오던 사악하고 못된 것들이 입구에 서서 빙긋이 웃고 있는 벅수를 보고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쳐 가지만 끝까지 따라오는 저 무언의 미소가 '이놈아 네가 무슨 짓 하러 가는 줄 나는 다 알고 있어'처럼 도리어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이다.
초자들은 인상 쓰고 화를 내며 소리내지만 고수들은 쉽게 그 내공을 드러내지 않고 미소 짓는 것처럼, 역발상을 차용한 기발한 차원 높은 지킴이의 세계를 우리는 운흥사터 벅수에서 한 수 배우는 것이다.

강현구<광주시문화재위원>

mhtong@hanmail.net